Travel & People

Travel

[독일 2] 튀빙겐, 호엔촐레른 왕가의 영고성쇠

Onepark 2018. 10. 11. 22:30

독일을 한 바퀴 도는 일주여행의 출발지는 튀빙겐이었다. 중세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방점인 호엔촐레른 성에 접근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독일 어느 도시나 그러하지만 녹지가 잘 보존되어 있고 창틀은 물론 다리 난간도 꽃화분으로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보도는 거의 예외 없이 타원형으로 둥글게 배열된 네모난 돌로 포장되어 있었다.

 

* 둥근 원 안의 H자는 Hospital이 아니라 Haltestelle (정류소) 표시이다.
* 이곳에서는 새들도 아파트(사진 오른편의 새집) 생활을 하고 있었다.
* 조울증 있는 헤르만 헤세가 집을 나와 일한 적 있는 서점의 헤세 안내판
* 가로등에도 꽃나무를 장식하여 거리가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 독일의 어느 도시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교회 또는 성당
* 외관은 천주교회 같지만 개신교(Evangelic Church) 예배당이다.

시멘트와 벽돌이 비쌌던 중세에는 나무로 틀을 짜고 진흙으로 벽체를 만들었다.

이 모양 그대로 다른 곳에 옮겨지을 수도 있는데 위 사진처럼 창문이 밖으로 돌출한 것은 토지점용료를 물지 않고 2층부터 공간을 추가로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 출근을 위해 자전거용 유모차를 끌고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러 온 보호자
* 좁은 골목길로 소포를 배달하러 다니는 우편배달부의 전동차

독일 전국을 여행해 보니 남부 지방 외에는 높은 산이 별로 없고 숲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공업국가임에도 각종 농기계를 활용한 농업과 목축업이 상당히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너른 밭에서 일하는 농부는 찾아볼 수 없었으나 체계적으로 경작되어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평지돌출한 삼각형의 지형이 눈길을 끌었다. 바로 호엔촐레른 성이었다.

이 성은 구릉지대에 우뚝 솟은 산 위에 축조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원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엄청난 에너지의 보르텍스(vortex)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누가 보든지 일세를 풍미할 가문의 본거지이자 날카로운 모습으로 인해 찌르거나 깨질 것 같은 강한 인상을 주었다. 여러 왕국과 공국으로 사분오열되어 있던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의 역사가 그러했다.

 

* 호엔촐레른 성에 가려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전용 셔틀버스를 타거나 트레킹코스로 걸어올라가야 한다.

호엔촐레른 가(Haus Hohenzollern)는 어떻게 프로이센을 다스리고 독일을 통일하여 제국을 건설하였는가?

호엔촐레른 성의 기념관에는 그려져 있는 족보(가계도)에 의하면 11세기에 이 지역을 다스리던 영주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프랑켄계는 독일 남부지역을 다스리면서 오스만 튀르크의 진출을 저지하고 신성로마제국에 충성을 하여 기반을 다졌다. 차남 슈바벤계는 일부 영토가 프랑켄계에 흡수되었으나 동유럽에 장가 든 후손이 1881년 루마니아 왕국을 개창하고 1947년 이 나라가 공산화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런데 중세 유럽에서는 왕위는 아들만이 계승할 수 있다는 살리카 법(Lex Salica)이 있어 남자의 대가 끊겨도 조카나 삼촌이 왕위를 계승하는 식으로 호엔촐레른 왕가가 지속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왕국의 기틀을 세운 것은, 나중에 상수시 궁전을 방문할 때 살펴보겠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이었다.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을 석권하기 직전에 프로이센의 부국강병에 힘써 나중에 독일제국이 성립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 호엔촐레른 성에는 독일제국의 초대황제 빌헬름 1세의 동상이 서 있다.

프로이센의 국가경영 방식은 군국주의였는데 메이지 유신 후의 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세계평화를 위해 이것을 바꿀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다. 카이저 빌헬름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공주와 결혼을 하여 같은 독일계인 장인 알버트 공을 많이 따랐을 뿐만 아니라 영국식 민주정치 제도를 선호하였다. 

프리드리히 황태자는 종종 비스마르크 수상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서민을 위한 정책을 폈으며, 보불전쟁 중에는 적군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할 것을 지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후두암을 앓고 있던 2대 카이저의 재위기간은 1988년 겨우 99일로 끝나버렸다. 안타깝게도 그의 성격을 전혀 닮지 않고 할아버지를 빼어닮은 빌헬름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독일제국은 더욱 더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당연히 의회 민주주의를 보고 자란 모후 빅토리아와의 사이도 아주 좋지 않았다고 한다.

 

* 평화로운 성밖 풍경은 사진으로 보았던 이태리 토스카나의 전원풍경을 연상케 하였다.

 

* 호엔촐레른 성은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는데 그들의 자부심이 매우 강했다.
* 기념관 입구의 벽에 그려져 있는 호엔촐레른 가의 가계도
* 이 문 너머의 실내에서는 사진 및 동영상 촬영 금지였다.
* 밖에 나오니 날씨는 여전히 화창하였고 관광객이 중국인을 포함하여 훨씬 늘어 있었다.
* 호엔촐레른 성 자체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 성 아래의 점심식사 장소
* 호엔촐레른 가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18세기에 널리 보급에 힘썼다는 감자튀김과 새우 요리
* 도중의 휴게소 입구에 놓여 있는 벤치가 소가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 독일 알프스 지방으로 가는 고속도로의 표지판에 우리에게 익숙한 휘센(냉방기 상표) 지명이 있다.
* 우리나라의 인삼밭이 아닌가 착각하게 만드는 태양광 발전 패널
* 이렇게 산길로 죽 가다보면 오스트리아 국경을 통과한다.
*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 알프스 산맥의 끝자락
* 높은 산을 와이어로 연결한 출렁다리를 걷는 것 자체가 익스트림 스포츠였다.
* 해가 진 뒤라 출렁다리 위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도로 주변의 산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있고 집들은 어느덧 스키어들이 몰려들 스키 시즌에 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달리지 않아 다시 독일 영내로 들어왔다. 같은 EU 회원국이라서 일부 도로표지가 조금 다른 것 말고는 국경경비대 초소도, 세관(CIQ)도 없었다. 그러나 귓청에 가해지는 압력을 해소하기 위해 침을 꿀꺽 삼켜야 할 정도로 이미 고산지대에 올라와 있었다.

 

* 저 멀리 독일 알프스의 최고봉 추크슈피체가 보이는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시가지
* 산장 모양의 라이니셔 호프 호텔 외벽에는 암벽 등산가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 숙소인 3층에서 보이는 이웃집 풍경
* 내일 우리가 직접 산에 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비프 스테이크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 스키어들이 많이 찾는 이곳에 없어서는 안 될 물리치료사와 현금인출기

저녁식사를 마치고 메인 스트릿을 거닐었다.

이곳은 동계올림픽 개최지답게 4계절 스포츠를 즐길 수 있게끔 뮌헨과의 열차 교통편이나 추크슈피체 산정(해발 2,962m)에 올라가는 산악열차와 케이블카(ropeway)가 완비되어 있다. 불현듯 무더운 여름철에 이곳 펜션에서 몇 주 지내다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튿날 아침 주변 풍경을 바라다보니 알프스 산장에서 자고 일어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