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 People

Travel

[프랑스 4] 생테밀리옹 와이너리, 보르도

Onepark 2023. 5. 2. 21:00

500년 전 왕과 귀족들이 여유자적한 삶을 누렸던 루아르 계곡에서 밤을 보냈다.

이런 시골에 큰 호텔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앙부아즈 노보텔은 지상에 2층, 앞으로 툭 터진 경사면에 2층을 배치하여 단체 손님을 여러 팀 받을 정도로 큰 규모였다. 새벽이 밝아오는 들판은 평화롭기 그지 없었고 호텔 정원 가운데의 널찍한 풀장에서는 한 젊은이가 수영을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며 밖을 보니 열기구 3개가 동트는 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대부분의 테이블은 단체 팀의 예약 표시가 있어 빈 테이블에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미국 여행자와 같이 앉았다.

 

 

'푸에르토리코' 하면 연상되는 게 몇 가지 있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Westside Story>는 맨해튼 웨스트사이드에서 이태리 이민자 젊은이들이 뉴욕에 갓도착한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젊은이들과 영역다툼을 벌이면서 싹튼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였다. 첫 장면에서 로우 맨해튼을 보여주는데 그때도 쌍둥이 빌딩은 없었고, 9.11 사건 이후 그 빌딩은 스카이라인에서 다시 사라져 버렸다.  뉴욕에서 주재원 근무할 때 사무실 청소 일하던 금발의 백인 아주머니와 나누었던 푸에르토리코 고향 이야기도 생각나고, Yanni가 푸에르토리코에서 야외 공연을 할 때 가수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하던 산들바람이 머리에 떠올랐다.

건장한 체격의 미국 남자는 마이애미에는 큐바와 푸에르토리코 주민이 반반이지만 거주지역이 달라 서로 충돌할 일을 거의 없다고 말했다. 미국의 51번째 연방 주로 편입되기 위한 주민투표 이야기를 꺼냈더니 현지 주민들은 원하지만 US Congress가 재정 문제로 싫어한다고 냉소를 지었다.

 

오늘 아침에 벼르고 별러서 버스의 앞문으로 탔다. 그랬더니 내 기색에 놀랐는지 그 자리에 앉아 있던 그룹으로 온 여성 한 분이 "이 자리를 원하세요?" 하며 가이드 뒷자리를 내게 양보하고 비켜주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이 자리는 내 지정석이 되었다.

내 심정을 이해해준 같이 여행 중인 일행에게 절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간밤에 플랜B까지 생각하고 있었기에 "나 스스로 너무 유치했구나" 하는 자괴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 이번 여행 중 처음으로 버스 앞 자리에 앉아 눈앞에 펼쳐지는 그림같은 프랑스 농촌풍경을 원없이 찍을 수 있었다.

 

오늘의 여행 주제는 포도밭과 와이너리, 포도주 수출항으로 번성했던 보르도 도심 방문이었다.

버스가 일로 남하하는 동안 창밖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농촌 풍경은 같아도 유채꽃이 피어있는 농지가 점차 포도밭으로 바뀌어 갔다.

버스가 출발한지 두 시간이 지나자 인솔자가 우리의 필요를 짐작하고 운전기사와 상의하여 큰 마켓이 딸린 휴게소에 들르겠다고 말했다. 프로방스 몽펠리에 출신의 베테랑 드라이버인 프랑크는 버스 전용 내비와 스마트폰의 작은 내비 두 개를 번갈아보면서 운전을 했다. 

 

* 고속도로 휴게소 옆에 자리잡은 지역특산물 판매장(오른쪽)

 

나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친 후 지역특산물을 판매한다는 휴게소 옆 건물로 갔다. 프랑스는 땅이 넓은 나라인 만큼 지역마다 주산업, 작물이나 주민구성이 다채로운 줄 알았지만 각 지역의 특색을 살려 특산물 판매대를 마련해 놓은 것은 바람직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레스트 에어리어(프랑스어로 Aire de 지명)마다 진열되어 있는 상품구성이 달랐던 게 생각났다. 

판매대를 이리저리 구경하는 가운데 서적 코너가 있고 맨 앞에 Lafayette et l'Hermione 라는 책이 있어서 얼른 집어 들었다.

전엔 프랑스어로 인쇄된 책은 살 엄두를 못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Google Lens나 DeepL 번역기를 쓰면 즉석에서 독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참 좋은 세상이 되었다. 몇 페이지를 훑어보니 라파예트가 미국 독립혁명에 참여한 계기, 조지 워싱턴과의 친분, 워싱턴 장군을 만나기 위해 헤르미온느 호위함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간 비화가 소개되어 있는 것 같아 어서 읽어보고 싶었다. 20대의 라파예트 후작과 조지 워싱턴 사령관의 공통점은? 둘 다 프리메이슨 롯지였다.

 

* 프랑스의 라파예트 후작은 호위함 헤르미온느 호를 이끌고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러 떠났다.

 

구글 렌즈가 첫 페이지를 1초도 안 걸려 한국어로 번역한 내용을 훑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나폴레옹, 탈레랑 등이 라파예트 후작에 대해 언급한 것을 소개하며 그는 논란이 많은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대표적인 프리메이슨(Freemason)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미국에서는 수많은 도시와 지명, 공공건물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다. 이번 여행 중에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유리 피라밋 앞에 가면 <다빈치 코드>나 그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닭고기를 포도주에 절인 향토음식 Coq au vin

 

마침내 생테밀리옹에 도착했다. 점차 굵어지는 빗방울을 우산으로 가리고 작고 아담한 구 시가지를 지나 오늘 코코뱅(Coq au vin)을 먹기로 예약된 레스토랑으로 갔다. 좁은 길바닥은 돌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흔이 넘어보이는 프랑스 할머니가 서빙을 하는 터에 아무도 불만을 털어놓지 못하고 음식 맛은 둘째치고 2시간이 넘는 긴 점심식사를 마쳤다.

 

* 생테밀리옹 포도밭에서는 낮은 키로 잘라준 줄기에 벌써 포도알이 될 꽃이 피어 있었다.
* 우리 일행은 이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4종류의 와인을 시음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예약이 되어 있는 '아침기도의 성(城)'이라는 뜻의 Chateau des Laudes 와이너리를 찾아갔다. 아주 너른 포도밭이 펼쳐진 사이로 창고 건물에 들어가 포도주 제조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지금이 꽃이 피기 시작하는 시즌인데 초록색 포도 알이 점차 굵어지며 8월에는 짙은 빛을 띠고 9월에서 10월 사이에 포도를 수확한다고 했다. 그 후 통 속에 넣고 여러 도구를 써서 전통의 맛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레드와 화잇 와인 4병을 꺼내놓고 와인 시음(wine testing) 행사를 가졌다. 이곳 와이너리에서는 연간 레드와인을 1만5천병을 생산하는데 해외 수출에 주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주로 Netflix에서 보았던 포도주와 와이너리를 소재로 한 여러 영화가 떠올랐다. 생각나는 순서대로 적어보기로 한다.

* Paris Can Wait (파리로 가는 길, 2016): 남편 친구인 프랑스인 셰프의 차를 타고 칸에서 파리로 가는 다이안 레인. 직업의식을 살려 질 좋은 포도주를 권하며 유쾌하게 때로는 아슬아슬하게 여러 이벤트를 겪으며 파리로 간다. 강변에 피크닉 돗자리를 펼쳐놓고 잔을 부딪히며 와인을 마시는 장면, 숲길을 지날 때 초승달을 보고 전에 만났던 소녀의 눈썹이 생각난다는 일본 하이쿠를 낭송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 A Good Year (어느 멋진 순간, 2006): 런던의 워커홀릭 펀드매니저인 러셀 크로우가 삼촌의 부음을 듣고 그가 상속받은 와이너리를 매각하기 위해 알프스 산지에 가까운 고르드 마을로 간다. 와이너리는 팔리지 않고 사사건건 부딪히던 그 마을의 카페주인 노처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진부한 스토리이다.

* Sideways (2004): 고급 와인 피노누아를 좋아하는 고교 교사인 주인공이 늦장가 가는 친구의 총각 파티를 위해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의 와이너리를 여러 곳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 로드 무비. 한국계 여배우 산드라 오가 오토바이 타는 걸크러시로 등장한다.

* A Walk in the Clouds (구름 속의 산책, 1995): 제대 장병 키아누 리브스가 곤경에 처한 포도원 주인의 딸을 구하기 위해 하루만 그녀의 남편 역할을 해주기로 한다. 포도열매가 서리 피해를 받지 않도록 포도원에 들어가 천사날개로 부채질을 하고, 또 포도를 수확한 다음 포도확에 넣고 음악에 맞춰 포도밟기를 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 Emily in Paris (미국 드라마): 에밀리가 친구를 따라 포도 수확철에 포도원에 간다. 그곳에서 친구의 오빠 동생들과 함께 일도 하고 사랑을 나눈다는 약간 뻔뻔스러운 에피소드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다시 버스를 타고 2시간 여 이동하는 동안 비가 오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간만에 대도시에 와서 거리를 메운 차량과 트램, 시민들을 보니 새삼 이곳이 프랑스 보르도(Bordeaux)구나 하고 놀랐다. 보르도는 가른 강변에 위치한 이 지방의 가장 큰 도시로 전에는 포도주 무역항으로 아주 번창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인솔자를 따라 UNESCO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생 탕드레 대성당 앞에서 인증사진부터 찍고 보르도 구시가지의 상점가를 죽 걸어가며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몇 년 전 가보았던  오사카의 번화한 상점가 도톤보리(道頓堀)가 연상되었다.

 

* 보르도 도심에 있는 중세 고딕 양식의 성 앙드레 대성당(Cathedrale Saint-Andre de Bordeaux)
* 장거리 여행에도 피곤을 모르셨던 우리 일행 할머니 세 분과 멋쟁이 프랑스 여성과 애완견
* 보르도 대극장 앞 광장 한켠의 얼굴 조형물
* 보르도 시내 분수대 앞의 Water Mirror
* 보르도 강변의 시민공원

 

6시에 인솔자를 만나 보르도 대극장과 얼굴 조각상을 구경하고 물이 거울처럼 비추는 워터미러, 크루즈선 모양의 선상호텔/레스토랑이 있는 공원 길을 함께 걸었다. 퇴근 후의 저녁시간을 강변 공원에서 산책하며 보내는 프랑스인들이 아주 많았다.

끝으로 무슨 행사준비로 부산한 켕콩스 광장에서는 원기둥 위 조각상을 보았다. 프랑스 대혁명 때 희생되었던 보르도 시민들을 기리는 조각상이라고 했다. 한때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지롱드 당원 중에는 보르도 출신 온건 부르주아가 많았는데 루이 16세와 왕비의 처형, 영국 스페인과의 전쟁을 둘러싸고 급진파에 밀려  실각하고 말았다.

 

* 파리의 콩코드 광장보다 1.5배 큰 켕콩스 광장의 프랑스 대혁명 희생자를 추모하는 3개의 기념탑

 

3. 루아르의 앙부아즈와 쉬농소 성

5. 카르카손의 콩탈성, 아를과 반고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