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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6] 아비뇽과 액상프로방스

Onepark 2023. 5. 2. 21:20

아를의 로댕 호텔에서 맞은 아침, 하늘은 어느 때보다도 맑고 푸르렀다.

파아란 하늘에는 비행운 흔적 외에는 구름 한 점도 없었다. 어디선가 비제의 "아를의 여인"에 나오는 미뉴엣이 플룻 연주로 들려오는 것 같아 호텔 풀장에서 물놀이나 하며 푹 쉬면 좋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풀사이드 의자에 앉아 있노라니 갑자기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바람이 휙 불어 종이 뭉치가 바람에 흩날려 물 위로 떨어지자 그때 가까이서 청소하던 여인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바로 영화 <Love Actually>(2003)의 한 장면이다. 로맨틱 코메디에서 주로 진중한 역을 맡는 콜린 퍼스가 프로방스에 와서 원고를 쓰는 영국의 작가로 나온다. 그는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주인의 원고가 망실되지 않을까 물 속에 뛰어드는 포르투갈 출신 가정부에 마음이 끌린다. 그는 포르투갈 어를 몇 마디 배워 그녀가 웨이트레스로 일하는 식당에 가서 떠듬떠듬 프로포즈를 하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는다.

 

하지만 나의 상상의 세계는 순식간에 깨지고 말았다. 건장한 프랑스 남자가 정원을 돌보러 연장을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That's OK!  상관없어요!

이렇게 좋은 날씨에는 아비뇽의 전망 좋은 언덕에 올라 사방의 경치를 바라보거나 아니면 지중해 쪽으로 나가 쪽빛 바다(Mer d'azur)를 구경하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바로 오늘 우리가 소화해야 할 일정이었다.

 

* 아를 로댕 호텔의 풀장

 

일단 아침식사를 한 후 버스를 타고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아비뇽을 향해 출발했다.

이곳은 꾸불꾸불한 프로방스의 2차선 지방도로, 앞차가 속도가 느린 화물차라도 되면 꼼짝없이 뒤를 따라가야 한다. 피터 메일의 <One Year in Provence>를 보면 프로방스의 운전자는 뒷차에 신경을 써서 양보를 해주는 법이 거의 없다.

 

아비뇽의 강변 주차장에서 버스를 내려 우리 일행은 교황청이 있는 성 안으로 들어갔다. 예약해 놓은 교황청 단체입장 시간이 12시이므로 길벗 인솔자는 그 전에 점심식사를 마쳐야 한다고 말했다.

 

* 프로방스의 왕복 2차선 도로에서는 뒷차를 위해 양보해주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세계사 시간에 14세기에 교황청이 이탈리아 로마와 프랑스 아비뇽 두 곳에 있었다고 배웠다. 이스라엘 백성이 느부갓네사르(이태리 말로는 나부코) 왕에 의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바빌론 유수'라 하는 것에 빗대어 이것을 교황의 '아비뇽 유수'(幽囚, Avignon Papacy)라고 한다. 

아비뇽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길벗 가이드가 그 원인과 경과를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다.

 

간추려 말하면, 십자군 전쟁 이후 돌아오지 못한 제후들도 많고 그들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유럽의 왕들은 군사력을 키우고 전비(戰費)를 조달하기 위해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고자 했다. 심지어 교황에 대들었다가 파문을 당하자 참회하는 국왕도 있었다(카놋사 굴욕 사건). 세속 권력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성직자들은 왕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거부했다. 1303년 로마 교황이 휴가 간 틈을 타서 프랑스 필리프 4세가 충복 노가레 장군을 시켜 교황 일행을 기습, 감금하고 교황에게 모욕을 가했다(교황의 뺨을 때렸다고 하는 이른바 아나니 모욕 사건). 그 충격으로 교황이 사망하자 1305년 마침 보르도의 주교가 새로 교황에 선출된 것을 계기로 프랑스 왕과 가까운 사이였던 신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의 지원을 받아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겨버렸다. 이렇게 해서 1309년부터1377년까지 70년 동안 7명의 프랑스 출신 교황들이 아비뇽에서 프랑스 왕권과 결탁하여 권세와 향락을 누렸다고 한다. 중세 봉건제 하에서 일반 백성, 성도들의 생활고에 관심이 없기는 성직자나 왕과 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는 당시 아비뇽이 지리적으로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프랑스 출신 교황들이 굳이 정세가 불안정한 이탈리아 로마로 가는 것을 꺼려한 점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분열사태는 15세기 초 피사와 콘스탄츠에서 열린 추기경들의 공의회에서 해소되었고 그 후 교황청은 베드로의 묘가 있는 로마에만 두기로 결정했다.  

그래서인지 아비뇽 교황청은 성벽도 높고 건물들이 크고 웅장해 보였다. 그러나 교황이 로마로 떠난 후에는 모든 것이 텅~ 비어버렸다. 

 

* 아바뇽 성 안에 있는 시청사. 그 지역의 랜드마크이면서 공중화장실이 있기에 반드시 알아두어야 한다.
* 아비뇽을 찾는 관광객 중에는 노년층이 많아 높은 언덕을 오르내리는 데는 미니 열차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곳이 아비뇽 교황청의 주된 출입구이다. 얼핏 보아도 방어적이고 폐쇄적임을 알 수 있다.

신의 대언자로서 또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양무리를 이끄는 목자로서 교황이 이렇게 몸을 사려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비하면 200년 후, 비록 면죄부를 팔아 건축비를 조달했지만, '누구든지 들어오라', '품에 안아주마' 하는 형태의 로마 교황청, 즉 성 베드로 성당은 얼마나 멋있게 설계되었는지 새삼 미켈란젤로의 형안에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베네제 성인이 계시를 받고 세운 베네제 다리. 홍수로 일부 유실된 후에는 복구하지 않고 문화재로 보존하고 있다.
* 아비뇽 교황청 앞을 흐르는 론 강. 아를에 있는 리버 크루즈선이 아비뇽에도 기항한다.

 

우리 일행은 11시에 예약해 둔 식당에 가서 프로방스의 가정식 메뉴인 라타투이와 닭고기 파스타를 먹고 입장시간을 기다렸다.

론 강이 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서니 교황청의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많은 예술가들이 각종 전시와 공연으로 애쓴 흔적이 보였다. 실제로 매년 여름에는 이곳에서 아비뇽 연극제(Festival d'Avignon)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 프로방스의 향토음식 라타투이와 닭고기 파스타
* Lu Ru 손 접시 드럼 연주자

 

교황청 앞 광장에는 입장하려는 사람들과 이들을 대상으로 묘기를 부리는 사람, 기념품이나 미술소품을 파는 상인들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때 솥단지 같이 생긴 것의 여러 군데 구멍을 뚫고 그것을 문지르거나 손으로 쳐서 음계가 있는 소리를 내는 Lu Ru 손 접시 드럼(Google 렌즈로 확인) 연주자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참으로 청아한 음향이 나는 것이 신기했다. 나도 그 앞에 동전을 던져놓고 가만히 그 소리를 들어보았다.

하나의 악기가 되려면 소리가 작고 다른 악기와의 협연이 힘들어 보인다는 게 결정적 흠이었다. 하지만 전자적으로 음을 증폭시킬 수 있을 테니 어떤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와 비슷한 것 같다. 혼자서 믿음을 잘 지키려고 해도 마귀가 훼방 놓을 수 있으므로 다른 교우들과 손을 잡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함을 코로나 비대면 시대에 절감하지 않았던가!

 

 

12시 정각에 현지 가이드를 따라 교황청 안에 들어가 보니 부자가 이사 간 후의 빈집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도 여기저기 옛날의 영화를 짐작케 하는 벽화와 유물들이 남아 있었다.

 

 

당시의 고위 성직자, 귀족들의 생활상을 짐작케 하는 벽화도 몇 점 남아서 흥미를 자아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파파게노가 부르는 아리아 '나는야 즐거운 새잡이'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구나 깨달았다. 실제로 귀족들의 사냥터에는 새 사냥을 돕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슈베르트의 "송어" 가사처럼 물고기를 잡는 장면도 있었다. 

 

* 교황 집전의 미사가 열리던 바실리카에서는 마이크가 필요없었다면서 현지 가이드가 "Amazing Grace"를 불러 주었다.
* 아비뇽 유수 시절 어느 교황 성하의 모습일까?
* 아비뇽 연극제 시즌에 대비하여 창문에 붙인 포스터가 마치 실제 배우가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아비뇽에서 액상프로방스로 가는 고속도로는 짐을 실은 트럭이 많이 다녔다. 고속도로의 맨 오른쪽 차선은 버스전용 차선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탄 버스는 목적지에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액상프로방스에  가까워올수록 나무숲이 듬성듬성 나있고 허연 석회암석이 드러나 있는 뤼베롱 산지가 나타났다. 

알퐁스 도데의 "별"이나 영화 <마농의 샘>, <마르셀의 여름(My Father's Glory)> 등을 통해 우리에게도 친숙해진 산지(山地)다.

 

* 뤼베롱 산지가 저만큼 푸르른 것도 이름도 없이 '나무를 심은 사람'(장 지오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윽고 우리 일행이 탄 버스가 액상프로방스에 진입하였다. 

벌써 플라타나스 가로수가 우거지기 시작했고 중심가의 분수대에서는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오래 전 로마 군대가 이곳에 진주하였을 때 물이 풍부하여 지명에 Aix(물)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언덕 위에 있는 세잔의 아틀리에를 문 닫기 전에 가보는 일이었다.

2차선의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주변에는 주차장이 없으므로 버스는 시간에 맞춰 우리를 태우러 오도록 했다. 

세잔 아틀리에의 입구에는 화가(재산)의 미국 관리인이 액상프로방스 대학교에 그 관리를 맡겼다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1층은 관리실, 기념품 숍이고 화가의 아틀리에는 2층에 있었다. 

해설자는 경험이 많지 않은 대학생 자원봉사자였다. 그는 세잔의 작품과 삶에 대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하나라도 더 많이 알려주고자 애썼다.

 

* 아틀리에 주변의 정원에는 세잔 그림(생트 빅트와르 山?)을 형상화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 세잔의 아틀리에는 천장이나 벽에 인공조명 시설이 없고 창을 크게 내는 등 자연채광에 의존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 당장이라도 정물화를 그릴 수 있는 소품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 한쪽 벽의 디스플레이 영상을 보고 해설자(맨오른쪽)가 영어로 설명하면 인솔자(중앙)가 통역을 했다.
* 세잔의 정물화에 실제로 등장하였던 소품들

 

세잔이 '대욕탕' 그림을 그릴 때에는 모델인 여성들이 삼각 형태를 취하도록 하고, 장시간 포즈를 취하기 어려운 모델 대신 목각인형을 파리에 주문하여 쓸 정도로 철저를 기하였다. 

 

* 자신의 대작 그림 앞에서 잠시 포즈를 취한 세잔
* 세잔은 62세이던 1901년 11월 비탈길 위의 올리브 농장 옆에 아틀리에를 구입하여 6년간 사용했다.

 

세잔 아틀리에에서 나와 개인적인 희망 같아서는 세잔이 즐겨 그렸던 (해설자 말로는 모두 62점의 그림에 등장) 생트 빅트와르 산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림제작의 현장도 보고 1개 뿐인 화장실도 이용하였으므로 버스 기사와의 약속시간에 맞춰 액상프로방스의 번화가로 이동하여야 했다. 자칫 추운 날씨에 산쪽으로 그림 그리러 나갔다가 길바닥에 쓰러져 폐렴으로 사망한 화가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카페와 부티크 상점이 즐비한 중앙 분수대 앞으로 갔다. 다행히 서머타임 기간 중이라서 해도 아직 많이 남아 있고 길거리에는 적당히 사람들로 붐볐다.

일부 희망자에 한해 인솔자를 따라서 생소베르(聖구원자라는 뜻) 성당으로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 주변에서 자유시간을 갖기로 했다. 나는 전자의 그룹에 속하여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위를 살피며 성당으로 바삐 걸어갔다.
역시 발품 팔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당 건물의 위용도 대단했거니와 그 안에서 깜짝 놀랄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중앙분수대에서 골목길을 통해 한참 걸어간 곳에 있는 Paroisse Cathedrale Saint Sauveur Aix-en-Provence
* 마침 오르가니스트가 Ave Maria를 연주하여 듣는이의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만들었다.

 

평소에도 음악을 들으면서 느끼는 바이지만 마음이 한결 정화되는 것 같았다.

이번 여행 중에 마음에 쌓였던 스트레스와 피로감이 구노의 '아베 마리아' 오르간 뮤직을 들으며 봄눈 녹듯 사라졌다.
이곳 성당에서 5월 중에 합창단과 오르간 연주회가 있을 예정이라는 포스터를 보았는데 잠시 스쳐가는 나그네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음 행선지로 떠나기 위한 집합시간에 늦으면 안되기에 도중에 일어나야 했다.   

* 부활하신 예수가 의심 많은 도마에게 옆구리의 창에 찔린 자리를 만져보게 하고 있다.
* 골목길의 마들렌느 가게는 재료가 떨어졌다며 문을 닫을 채비를 하였다.

 

성당에서 내려오는 짧은 골목길에도 참으로 다양한 인간군상이 걷고 있었다.

빨간 판탈롱의 패셔니스타, 나무 모양의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 쓰레기 봉지를 치우는 사람,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관광객 등.  나는 물론 그들의 사진을 찍고 ······.

 

* 중앙분수대 앞의 이 거리는 한쪽은 카페가, 다른 쪽은 브티크 숍들이 즐비하여 관광객은 물론 시민들도 즐겨 찾는다.

 

꿈에 그리던 프로방스 벼르고 별러 왔건만
나를 맞아준 건 무심하게 물을 뿜는 분수뿐

Provence has been the place of my dreams
that couldn’t be reached for years.
Sadly,  all that greeted me was
only the indifferent fountains.

(17-syllabled English haiku)

 

* 마르세유 구 항구의 풍경. 내일 아침 저 언덕 위의 성모사원에 올라갈 참이다.
* 유럽의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연두색 FLIXBUS
* 매운탕을 기대했다간 비린내만 나는 듯한 마르세유 향토음식 Bouillabaisse
* 반려견이 존중(?) 받는 마르세유 거리의 풍경
* 골목 사이로 불쑥 나타난 19세기의 프랑스 국가기념물 마르세유 대성당
* 저녁 놀이 퍼지기 시작하자 광장의 사람들이 마치 Ready~ Action! 을 기다렸던 것처럼 보였다.
* Mercure Marseille Centre Vieux Port 호텔 화장실 문을 열자 셀피를 찍고 싶어졌다.

 

프랑스 호텔에 들어갈 때마다 든 한 가지 의문점은 호텔 화장실에 분리형이든 전자식이든 비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에서는 가정집은 물론 공중화장실에도 설치되어 있는데 비데의 원조격인 프랑스에 없다는 게 놀라웠다.
나중에 New Bing에게 이 점을 물어보니 비데가 17세기에 프랑스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맞지만 1960년대부터는 그 유행이 시들해졌다(falling out of fashion)고 한다. 20년 전만 해도 비데가 100% 설치되었으나 지금은 프랑스 가정집의 42%만 비데가 있다는 조사 결과를 소개했다. 

 

5. 카르카손의 콩탈성, 아를과 반고흐

7. 마르세유, 칸, 생폴드방스, 모나코

세잔과 모네의 아틀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