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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Day] 하루 동안 일어난 일

Onepark 2023. 12. 13. 07:00

〈24〉는 필자가 미드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만든 미국 드라마였다.

2001년 Fox사가 시즌 1을 시작한 이래 2014년 시즌 9로 마감할 때까지 미 백악관과 정권의 이너서클, 핵무기, 미-중관계, 테러 문제를 다루었던 인기 TV 드라마였다. 한 시즌이 24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긴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시간대 별로 테러대응 특수부대 요원들(주연 잭 바우어 역의 키퍼 서덜랜드)이 어떻게 대처하며 무슨 행동을 취하는지 손에 땀을 위게 만들었다.

매 시즌 하루 24시간 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이곳 저곳에서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이 각 편마다 1시간씩 리얼타임으로 드러매틱하게 전개되곤 하였다. 한 번에 몇 편씩 정주행하면서 하루 24시간 동안 수많은 연관 사건이 이렇게 일어날 수도 있구나 생각했었다.

 

* 서울 강남에는 홀로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이런 고즈넉한 공간이 있다.

 

문학 작품 중에도 한 주인공에게 24시간 동안 벌어진 일을 다룬 소설이 있다. 작품 속에 온갖 신화와 고전, 서양 지성사, 그리고 의식의 흐름 같은 표현기법을 다룸으로써 문학사에 길이 고전으로 남게 된 《율리시즈》(Ulysses, 1922)가 바로 그것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1904년 6월 16일 아침 8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 2시까지 일어난 일을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이의 행적을 따라 장편소설로 옮겨 놓았다.[1]

 

내가 24시간이라는 시간(time limit)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요즘 주목을 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rtificial intelligence) 챗GPT 때문이었다. 은행원과 대학교수로서 도합 40여 년간 이것저것 모아놓은 온갖 자료와 기록, 사진이 엄청 많은데 이것들을 高부가가치의 체계적인 기록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차례 챗GPT와 상담한 결과 얻은 답은 일단 목적을 분명히 한 후 카테고리 별로 자료를 정리(extract and organize, then clean and format)하여 AI에 맡기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이러한 자료를 이용하는 입장에서 카테고리를 무엇으로 정했을 때 독자들이 관심을 갖고 흥미롭게 찾아볼 것인가였다. 역사책도 연대별로 기술한 편년체(編年體)보다 한 인물의 삶을 종합적으로 기술한 기전체(紀傳體)가 더 재미있지 않은가! 이와 마찬가지로 사건 중심으로 적는 것이 좋을 듯 싶었고 그 기준을 어떤 날 하루로 설정하는 것에 관심이 갔다.

 

 

그러던 참에 우연찮게 손에 들었던 게 일본 장편소설이었다.

처음엔 제목이 '스무살, 도쿄'(원제 「東京物語」 , 도서출판 은행나무 2008)이길래 내 나이에 걸맞지 않은 청춘 소설이려니 했다. 그런데 오쿠다 히데오(奧田英郞, 1959 ~  )라는 작가가 '제2의 무라카미 하루키'로 주목을 받는다기에 목차를 훑어보았다. 1979년 6월 2일 레몬, . . . 1989년 11월 10일 베첼러 파티로 되어 있었다.

 

마지막 편 '1989년 11월 10일'이라는 날짜에서 오래 전의 직업의식이 발동했다. 바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이 아니던가? 또 배첼러 파티(Bachelor Party)는 무엇이지? 장가 가는 친구를 위해 남자들끼리 벌이는 술잔치가 아닌가! 

야릇한 호기심마저 발동하여 그 대목을 찾아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주인공은 20대의 나고야 출신 다무라 히사오. 대학 진학을 핑계로 무조건 집을 떠나 도쿄에서 '니힐한 시티 보이'로 살고 싶었다. 무지하게 즐겁고 무지하게 바쁘고 부지하게 고민도 많은 젊은 날을 보내고 나서 나름대로 재능을 발휘해 몇몇 뜻이 맞는 친구들과 광고대행사를 차렸다. 그 사이 존 레넌이 불의의 총격으로 사망하고, 올림픽 개최지 선정에서 나고야가 서울에 밀리는 것을 보았다. 스포츠에 열광하는 여성 팬들이 등장하고, 부동산 경기가 호황을 보임에 따라 히사오는 트렌드에 맞는 아이디어와 열정 넘치는 프리랜서로서 두각을 발휘하고 있었다. 

 

[1989년 11월 10일 아침] 칫솔을 입에 꽂은 채 텔레비전 리모컨 스위치를 켜자 모닝 와이드쇼에서 어딘가의 학교 축제 풍경이 방영되고 있었다.
"기코 씨, 미혼으로서는 마지막이 될 학교 축제에······" 라는 리포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무라 히사오는 한 여성의 넘칠 듯이 웃는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싱크대로 돌아왔다. 요즘 들어 텔레비전은 아야노미야(일본 국왕의 차남)의 약혼녀에 대 한 소식으로 온통 채워지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 수염 기른 젊은 세자께서 프러포즈를 했다고 한다.
저 사람이 형님을 제쳐두고. 그런 혼잣말을 하면서 수돗물로 입을 헹궈냈다. 하긴 히사오와 동갑인 히로노미야(일본 국왕 의 장남)가 아직 독신이라는 건 실로 마음 든든한 일이었다. 나고야의 어머니에게 "너, 이제 곧 서른이야'라는 공격을 받을 때마다 히사오는 "히로노미야도 아직 독신이잖아"라고 대꾸해주곤 했다.
앞으로 며칠이면 히사오는 서른이 된다. 대략 우울하다. 스무 살 때쯤에 어렴풋이 머릿속에 그려보았던 자신의 서른 살은 벌써 결혼해서 아이도 있고 청춘 따위는 일찌감치 끝났을 것이라는 이미지였다.
  327쪽

 

경기(景氣)도 좋은데 20대의 젊은이에게 연애사가 없을 수 없다.

나고야의 본가에서는 어서 동향의 아가씨와 결혼하라고 성화이시지만 히사오는 아직 독신인 왕세자 핑계를 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는 비혼주의자는 아니기에 업무상으로 자주 찾아가는 회사의 여직원과 썸을 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결혼 상대로서는? 지금 확답을 내릴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현재 사귀는 여자는? 신기하게도 있었다. 리에코, 히사오보다 한 살 어린 광고대행사 직원이었다. 만난 지는 4년째인데 연인 사이가 된 건 1년 전이었다. 그림, 그 앞의 3년 동안은 뭘 했느냐 하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사귀는 사람이 없다는 신호를 은근히 보냈었는데" 라고 리에코는 나중에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지만, 그녀가 후배 디자이너에게 유난히 친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질투를 하는지 어쩌는지 보려고 그랬단 말이야"라고 얌체같은 소리를 했다. 그렇다면 밸런타인 데이에 그 녀석에게 손수 만들어 준 초콜릿은 대체 뭐냐고 따졌더니 리에코는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잠깐의 침묵을 지킨 끝에 화제를 바꿔버렸다.
톡 까놓고 말하자면, 그녀나 자신이나 그저 가까운 데서 대충 선택해버린 거라고 히사오는 생각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커플들이 모두 그렇듯이.
  328쪽

리에코와는 매일같이 연락을 주고받고 주말도 함께 보냈다. 창래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어쩐지 서로 그런 말은 피하는 듯한 구석이 있어서, 이를테면 둘이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결혼식장 광고가 나오면 리에코는 갑자기 엉뚱한 말을 꺼내곤 했다.

"아, 마쓰다 세이코의 딸이 사립 유치원에 합격했다네?"라는 식으로 아마 결혼에 대한 바람이 희박한 모양이었다. 직장의 독신 여자선배를 존경하고, 늘 회사 일 이야기를 신이 나서 해댔다.  331쪽

 

작가는 1959년 기후현(岐阜県) 출신으로 잡지 편집자,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를 지냈던 만큼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주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분명히 자신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중요한 클라이언트와 면담 약속이 있는 주인공이 옷차림에도 상당히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바야흐로 일본의 부동산 경기가 절정을 향해 가고 있을 때였으므로 히사오도 한 걸음 떨어져 부동산 버블의 과실을 열심히 줍고 있었다. 유력한 클라이언트가 부동산 거래로 돈을 많이 버는 만큼 그 앞으로 떨어지는 것도 적지 않았으나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2]

 

회색 코듀로이(일명 골덴) 상하에, 오늘은 검은 터틀넥을 맞춰서 입어 봤다. 요즘 들어 '영 이그젝티브'('젊은 중역'이라는 뜻으로 일본 버블 경기가 시작되던 1983년 경에 나타난 남성 엘리트 샐러리맨의 속칭. 24시간 풀가동으로 업무와 놀이, 신상품과 먹거리 등에 집착하는 특성을 보임)라느니 하는 말이 한창 유행이어서 동년배의 이쪽 업계 사람들이 보란듯이 아르마니의 더블 정장을 빼입고 다녔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한차례 시도는 해봤는데 거울에 비친 자신은 홍콩 영화에서 시작한 지 5분 만에 죽는 삼류 갱이었던 것이다.
오전 10시, 맨션을 나와 뒤편 주차장으로 갔다. 최근 2, 3년 사이에 도쿄 땅값이 급등해서 허허벌판인 주제에 주차장 임대료가 5만 엔이나 되었다. 맨션 임대료는 1LDK(거실과 식당을 겸한 주방이 하나뿐인 소형 아파트 )에 15만 엔. 어머니는 "그러면, 얘, 얼른 내려와야겠네"라고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린 한 마디를 했다.
서른을 눈앞에 두고 역시 나고야에 돌아갈 마음은 사라졌다. 아니, 그보다 타임 리미트가 지나가기를 지그시 기다렸다고 하 는게 맞을 것이다. 애초에 시골이 싫어서 도쿄로 나온 것이다.
  329쪽

 

르노를 몰아 야마노테 길을 남쪽으로 내려갔다. 라디오에서는 프리프리(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전반까지 큰 인기를 끌었던 일본의 걸스 록 밴드 '프린세스 프린세스' 의 애칭)의 노래 <Diamonds>가 흘러나왔다. 신주쿠 부도심에서는 거대한 크레인이 몇 개씩이나 목을 길게 빼고 있는 게 보였다. 새 도청 빌딩의 건설 공시가 시작된 것이다.
앞으로 한 달 남짓이면 1980년대는 끝이 난다. 별다른 감개는 없었다. 단지 요즘 들어 일 년이 유난히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331-332쪽

 

사무실에 도착하자 아르바이트 학생 기쿠치요에게서 당장 보고가 들어왔다.
"다무라 씨, '세계 토지개발'의 고다 씨한테서 전화 왔었어요."

"뭐래?"
"다무라 짱 있느냐고요. 안 계시다고 했더니,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라고 전하래요."
고다는 요즘의 단골 거래처였다. 삼십대 중반에 독립해서 부동산 회사를 경영하는 인물이다. 도심지의 토지를 구매해서 대 기업에 넘겨 엄청난 차익금을 챙기고 있었다. 이른바 땅 투기꾼 으로, 매일 다른 베르사체 정장을 차려입고 다녔다. 롤렉스 손목 시계도 날마다 갈아 찼다. 최근에 휴대전화를 입수하고는 완전히 전화광이 되었다. 배터리를 비서에게 들고 다니게 하면서 아령 같은 수화기를 늘 귀에 대고 있었다.
"어이, 다무라.” 이번에는 디자이너 오구라가 안쪽에서 얼굴 을 내밀었다. "지난번에 그 '가구라자카 클럽'의 로고 마크, 언 제까지랬지?"
"지금 당장."
"근데, 지난번에도 당장 해달라고 했으면서 제출은 일주일이나 지난 다음이었잖아?"
"그건 고다 씨 때문이야."
고다는 변덕이 심해서 급한 일거리를 부탁해놓고 훌쩍 하와이에 가버리기도 했다.

"어, 깜빡 잊어버렸어"라고,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둘러대며 캬하하 웃는 것이다.
히사오는 현재, 고다의 의뢰를 받아 빌딩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최근 2, 3년 동안은 모든 게 '우선 땅' 이라는 분 위기여서 그 땅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게 비즈니스의 기본처럼 되어 있었다. 이는 사람의 부탁을 받아 우연히 기획서를 냈었는데 그게 고다의 눈에 들었다. 다름아닌 '고준샤'(交詢社, 1880년에 결성된 게이오 대학 출신 중심의 지식인 클럽으로 도쿄 긴자에 고준 빌딩이 있다)에 필적할 만한 사교 클럽 빌딩을 새롭게 짓자는 플랜이었다. 장소가 신주쿠 와세다 거리 쪽의 가구라자카인지라 이름은 단순하게 '가구라자카 클럽' 이라고 붙였다. 그 기획이 먹힐 줄은 솔직히 생각도 못했었다. 그런 거창한 계획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긴 그쪽에서도 일개 프리랜서에게 그런 대형 프로젝트를 맡길 생각은 아니었다. 전담 팀은 회사 안에 조직이 짜였고, 히 사오는 그저 브레인으로서 참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단지 막대한 자금이 움직이는 프로젝트에 관여한다는 게 히사오의 프라이드를 상당히 높여주었다. 히사오는 명함에 당장 '플래너' 라는 직함을 덧붙였다. 잠깐 '공간 프로듀서' 라고 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낯간지러워서 관뒀다.
  332-333쪽

 

고다의 회사에서는 기획서를 낼 때마다 몇 십만 엔씩 은행계좌로 입금해주었다. 한차례 회의에 출석해 허풍을 좀 떨어줬더니 단지 그 명목으로 20만 엔을 내주었다. 그 뒤로 청구서 금액은 항상 높았다.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이십 대 마지막 가을이었다.
리에코의 말을 빌리자면, 작금의 호경기는 밑바탕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도쿄대 교수가 잡지에 그렇게 써 냈더라고. '버블 경기' 라고 해서 머지않아 그 거품이 꺼져버릴 거래."
흥, 그건 월급쟁이 공무원의 뒤틀린 심보에서 나온 소리겠지. 정해진 월급밖에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야 물가만 다락같이 상승하는 재미없는 시대일 것이다.
  334쪽

 

* 부동산 개발의 현장. 출처:&nbsp; 서울신문, 2021.12.17.

 

고다의 말에 히사오는 저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고준샤에 필적할 만한 신사들의 사교 클럽을 만들자던 이야기는 어떻게 된 거야. 히사오가 맨 처음에 내놓은 제안은 가구라자카라는 지역에 어룰리는 프레스티지 높은 회원제 클럽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시골 사람들이란 도쿄 쪽하고 어떻게든 연줄을 맺어두려고 안간힘을 쓰는 법이거든, 지난번에 기후 지역에서 올라온 부동산업자를 긴자에 잠깐 안내해줬는데, 아무튼 창피를 당하지 말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바보같이 마구 돈을 쓰는 거야. 그때 내가, 바로 이거다 하고 생각했지, 그렇게 쓰고 싶어하는데 쓰시게 해 드려야 할 거 아니냐고, 우리 클럽에서."
고다가 궐련을 물었다. 비서가 당장 달려와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이번에는 엎드린 엉덩이 쪽으로 눈길이 갔다.
"그 사람들도 말이지······” 입을 열자 연기가 새어나왔다. "일 년에 몇 차례는 도쿄에 사업차 올라와야 하거든. 그때마다 일일이 호텔 예약하고 여기저기 약속 잡고 하자면 정말 귀찮을 거라고, 그러니 우리 클럽을 도쿄의 베이스 기지로 쓰게 하자는 얘기야."
"하지만 요즘은 호텔마다 그런 정도의 서비스는······."
"아, 그건 괜찮아, 시골 사람들은 호텔이라면 어쩐지 주눅이 들거든, 일본항공에서는 잘난 척을 하면서도 외국 항공사다 하 면 그 즉시 얌전해지는 해외 관광객하고 똑같아. 왠지 겁이 나서 쇼핑 심부름도 못 시킨다니까? 그러니까 아예 처음부터 '귀하를 특별 대접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해줘야 안심을 하는 거야. 우리 클럽에는 오피스 기능도 있고 미인 여비서도 대기하고 있다고. 어때, 좋은 아이디어지?"
"아, 예······."
"무엇보다 도쿄 회원제 클럽의 멤버라고 하면 그이들한테는 최고의 스테이터스가 돼. 게다가 장소가 도쿄에서도 유서 깊은 가쿠라자카잖아?"
   341-342쪽

 

어차피 목표는 법인 회원인 것이다. 세금으로 뜯기느니 어디가 됐건 펑펑 써버리자는 게 호경기인 요즘의 구호였다. 백만 엔 짜리 그림일 때는 팔리지 않아도 1억 엔이라는 가격표가 붙으면 당장 팔려나가는 요지경 세상인 것이다.
고다 사장의 말대로 시골 유지에게는 '도쿄의 회원제 클립 멤버'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건 상당한 스테이터스가 될 터였다. 큰 돈을 들여서라도 손에 넣고 싶어할 만한 지위인 것이다.
성공하는 사람은 역시 발상부터 다르구나.  고다 사장을 약간 다시 봤다.
가구라자카 클럽의 부가가치를 생각해봤다. 역시 은신처로서의 의미가 클 것이다. 남자들이란 누구나 은신처를 원하는 법이다.
  346-347쪽

 

노인을 앞에 세워놓고 고다와의 대화가 10여 분 이어졌다. 아마도 매입자에게 트집을 잡게 해서 값을 깎으려는 것일 터였다.
의도를 알고 나면 그다음은 그야말로 쉬운 연극이었다. 단지 이런 일에 끌려 들어온 자신이 한심했다. '플래너'라는 직함은 어디로 갔는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고다가 자세한 사정을 알려주었다. 노인의 토지는 처음부터 고다네 회사에서 구입하기로 정해져 있었 다. 동업자에게는 8억에 전매하기로 이미 결정이 나서, 이제는 매입 가격을 얼마나 후려치느냐에 따라 이쪽의 이익금이 정해지는 것이었다. 고다는 살 사람을 찾고 다니는 척 연극을 했다. 집을 판다는 광고지는 근처에만 나눠주고서 노인에게는 일부러 자주 눈에 띄도록 교묘한 공작도 해둔 모양이었다.
'내주쯤에 '6억에 조금 더 얹어드리는 가격이라면 우리 회사에서 매입하겠습니다만' 이라고 구슬리면 그 영감, 틀림없이 도 장을 찍어줄 거야. 그걸로 우리는 1억 수천만 엔을 버는 거고."
인간이 이렇게 비뚤어지는구나. 고다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반 샐러리맨이었다. 정해진 용돈으로 대충 때워가는 그저 그 런 중년 아저씨였던 것이다.
"요즘 세상은 판단력이 뛰어난 놈이 이기게 되어 있어, 즉결, 즉결, 즉결의 연속이라고, 잠시 생각 좀 해보겠다는 놈은 절대로 이기지 못해."
고다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다시금 가구라자카 클럽에 관한 얘기는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높이 내다보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손에 넣을 수 없다. 꿈만 꾸고 있는 인간은 어차피 꿈만 꾸다 끝난다. 만원 전철에 흔들리며 꼬박꼬박 회사에 다니는 샐리리맨은 바보다, 라는 단언까지 하고 나섰다.
히사오는 대충 억지 웃음을 지어주면서, 나는 도저히 못할 일 이라고 냉랭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물론 배짱이 없는 것도 있었지만, 그건 자신이 바라는 성공이 아니었다.
히사오는 누구에겐가 인정을 받고 싶었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싶었다. 만난 적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현재 하고 있는 일의 충실과 수입 증가를 바라기는 했지만, 이 일은 어딘가 가짜 모습이라는 의식을 품고 있었다. 이 일을 평생 계속할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아마도 자신은, 벌써 스물아홉 살이나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장래에는 무엇이 될까 따위를 궁리하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한숨이 터졌다.
스물아홉 살이 아니구나. 다음 주면 서른이다.
11월 들어 도쿄의 일몰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박모(薄暮)의 하늘에 드문드문 별이 빛났다.
353-354쪽

 

* 수많은 동독주민의 생과 사를 갈랐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


소설의 주인공이 만난 부동산개발회사 사장은 평범한 샐러리맨을 하다가 한두 건의 부동산 거래에서 큰 돈을 번 뒤로 부동산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가 변화한 모습은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고, 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 같았다. 그런 만큼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사회경험이 많지 않은 히사오로서는 상대하기에 버거웠다. 부동산으로 벼락 부자가 된 사람들은 갑자기 불어난 부를 주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분을 맞춰주고 그가 원하는 정보나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기대 이상의 수입을 안겨주었다. 히사오로서는 VVIP 클라이언트인 셈이었다.  업무상으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대단한 존재였지만 막상 그가 돈을 버는 방법을 보니 부동산 개발 붐에 편승한 야바위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마침 그가 지향하는 세계 저편의 철옹성인 줄 알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 사건은 동서 냉전의 종식과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주인공과 같은 사무실에 있는 친구는 결혼식을 앞두고 우울증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주인공은 이제 막 30대에 접어들 참이었으니 해가 바뀌고 부모님이 재촉하기 전에 사귀고 있는 여자와 결혼할 것인지 매듭을 지어야 했다. 

 

사무실에 돌아오자 기쿠치요가 혼자서 포지 필름을 정리하고 있었다.
"미와하고 오구라는?"
"미와 씨는 출판사에 사진 납품하러 가셨어요. 오구라 씨는 모르겠어요."
"모르다니?"
"잠깐 저기, 라는 말만 하고 나가셨어요."
오구라는 디자이너라서 외출할 일이 거의 없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 잠깐 산책이라도 나간 모양이었다.
내 손으로 커피를 타 들고 다른 일을 하기로 했다. 언제까지나 고다 사장만 상대하고 있을 수는 없다.
"베를린에서 뭔가 일이 터진 모양이에요." 기쿠치요가 말했다.
"베를린? 독일의?"
"아까 밖에 나갔을 때 아래층 전자 대리점 텔레비전으로 봤는데 곡괭이로 벽을 때려 부수는 사람이 화면에 나오던데요?"
아, 그렇구나. 어떤 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난 모양이라고 생각 했던 게 베를린이었나.
"에리히 호네커(1971년부터 동독의 서기장 및 국가 수상, 1989년에 해임되고 동서독 통일 후 소비에트로 망명했다. 소비에트 연방 몰락으로 독일에 송환되어 서독으로 탈출하려던 동독인 192명의 처형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암으로 석방, 반년 후 칠레에서 사망했다)가 지난달에 해임되었으니까요. 그런 관계인지도 모르겠어요."
   355쪽

 

"7시에 기다릴 테니까, 응? 잠깐만이라도 좋아, 얼굴 좀 보여줘. 나, 다무라 짱이 마음에 들었다고, 함께 일하고 싶어, 가구라자카 클럽, 반드시 성공시키고 싶단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다무라 의 아이디어가 꼭 필요하다구. 있잖아, 아까 전통 일본 가옥을 본뜬 플로어를 만들자든가, 그런 얘기 했었지? 그거, 좀 더 자세히 말이지······."
고다는 혼자서 떠들었다. 마치 호스티스라도 꼬드기는 듯한 말투로 줄줄이 늘어놓고 있었다. 고래고래 고함치던 게 채 5분 도 지나지 않은 지금, 이렇게 돌변하는 건 또 뭔가. 완전 정서불안이다. 틀림없다.
희미한 안도감도 있었다. 싸우고 헤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하지만 그보다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앞으로 이 사람과 계속 일을 해도 괜찮은 걸까.
"그럼, 잠깐이라면." 히사오는 그렇게 대답했다.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 열 살이나 더 먹은 아저씨가 이렇게 매달리고 드는 것이다.
고다는 소년처럼 반색을 하더니 "우리 오늘, 술 좀 마시자고" 라며 전화를 끊었다.
우울해졌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정말로 잠깐만에 돌아올 수 있을까. 고다의 기분은 막상 그때가 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었 다. 느닷없이 화를 내서 씨움이 날 가능성도 컸다. 고다는 주사위 도박 같은 사람인 것이다.
   359쪽

 

고다 사장이 들려주는 부동산 거래의 백태(百態)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가 관여했던 거래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있는 사람들은 한푼이라도 더 가지려고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든다고 말했다. 누구든지 그러한 거래에 몸을 맡기고서 불로소득에 희희낙락하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고다를 통해 부동산 벼락부자들의 민낯을 알게 되니 돈이 돈 같지 않아 보였다. 그들이 쌓은 성채는 비바람이 치면 베를린 장벽보다도 쉽게 무너질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여겨졌다. 그렇다면 히사오가 머리를 짜내고 몸을 바쳐서 추구해야 할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떤 대머리 부동산 아저씨가 그렇게 하라고 슬슬 바람을 넣었어, 임대료 7만 엔에 최후 3년을 살았어, 그림, 1년 84만 곱하기 3년을 해보면 끽해야 252만, 그게 그 여자가 들인 금액이라고, 즉 그 아가씨는 700만 엔을 아무 짓도 안하고 그냥 그 집에 살기만 한 걸로 벌어들였다는 계산이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어디 있냐고."
"거참, 정말 굉장한 얘기네요."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실제로 그렇다는 건 알지 못했다.
"상속 때문에 싸우는 건 더 굉장해, 토지 매각 의뢰가 들어와서 우선 큰아들을 만나러 가지? 가격에 대한 희망사항 등을 듣고 구매자를 찾는 거야. 그래서 겨우 정리가 되는가 하면, 느닷없이 둘째아들이 툭 튀어나와. 그 가격으로는 못 판다는 거야. 그걸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야. 한 부모 밑에 피를 나눈 형제인데도 서로 철저하게 비난해. 형은 옛날에 차를 사는 데 아버지한테 이만큼 돈을 뜯어냈으니까 라는 둥, 동생은 이혼 위자료 줄 때 집에 반을 부담시켰다는 둥. 우리는 말이지, 그런 아귀다툼 속에 뛰어 들어서, 네네, 그러시겠지요, 참 맞는 말씀입니다. 해가면서 그 걸 다 들어줘. 돈의 힘이란 무서운 거니까. 재산 포기한다고 잘 난 소리 하던 놈도 땅값이 뛰어서 몇 억이라는 가격이 매겨지면 거기서 갑자기 욕심이 앞서는 거야. 막상 도장을 받으러 가면 자기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고 뻗대요. 분명히 말하는데, 우리가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여기저기서 혈육 간에 칼부림 깨나 났을 거야." 

"원래 부자일수록 더 구두쇠야. 3억에 토지를 판 놈이 겨우 만 엔 이만 엔의 인지대를 속이려고 한다니까? 택시 값이 아까워서 매번 데리러 오라는 소리나 하고." 363-364쪽

 

* 서양의 전형적인 Bachelor Party. Source: www.brides.com

 

"아, 근데, 다무라 짱의 오늘밤 모임은 뭐 때문이라고 했었었더라~? 슬슬 허가 꼬부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 사무실 디자이너가 내일 결혼해요, 그 사전 축하하는 의미의 배첼러 파티~."
"친한 친구?"
"네, 뭐. 그렇지요."
'친한 친구'라는 말을 들어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잠시 당황 했다. 그런 건 생각한 적도 없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재미있겠네, 친구들끼리 난장 치고 노는 거."
"죄다 사내놈들뿐이에요."
"그게 좋은 거야, 사내들끼리 뭉치는 것도 지금 이때뿐이야. 나이를 먹으면 아무래도 서로 조심하게 되거든. 이해관계도 얽 히고, 아무 계산 없이 만나는 건 이십 대까지의 친구들뿐이야."
"그렇습니까······."
"나는 말이지, 그 친구들을 잃었어."

저도 모르게 고다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내려뜨린 채, 비어버린 컵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 회사를 세우고 큰돈이 굴러들고 생활이 바뀌니까 내가 나쁜 놈이 되어 있더라고. 마작이라고 해봤자 천 점에 백엔 짜리, 그거 너무 바보 같아서 칠 마음도 안나. 그런 생각이 내 태도에 다 나오는 거지. 내 차는 벤츠야, 샐러리맨은 기껏해야 마크II인데, '잠깐 굴려볼래?' 하고 열쇠를 내주고 그런다고. 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도 그쪽은 얕잡아본다고 생각해. 그렇게 해서 친구들이 완전히 없어졌어, 십 년 전 친구 중에 나 찾아오는 놈은 한 놈도 없어 ······."   366, 367쪽

 

게이오 플라자에 도착한 건 밤 11시였다.
버르적거리는 고다를 르노 뒷좌석에 밀어 넣고 그의 회사까지 갔다. 입구에서 잔업 중인 사원을 불러냈더니 호스트 같은 젊 은 사원이 "어휴, 또 이러시네"라며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렸다. 고다는 요즘 셀 수도 없이 술이 떡이 되어 회사로 실려 온다고 했다.
아마도 고다는 닳아버린 것이리라. 아주 잠깐의 판단 미스가 몇억 엔의 손실을 낳고 마는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신경이 이상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 같았다.
나는 큰 부자 같은 거, 안 되어도 좋다. 창조적인 일로 신경이 닳아빠진다면 그거야 괜찮지만 돈 때문에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고다는 고독한 사내인 것이다. 히사오는 약간 다정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 때나 호출을 하더라도 상냥하게 대해주자.
아니, 아까 낮에는 고함을 지르고 야단이었는데 ······.
뭐, 될 대로 되라지, 참지 않는다는 게 내 삶의 방식이다.
   371쪽

 

배첼러 파티가 열리는 호텔에 들어섰다. 로비 회분 뒤쪽에 한 남자가 불안한 기색으로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오구라였다.
"무슨 일 있었냐? 내일 결혼식인데,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아니, 문제는 없어, 그런 게 아니고, 뭔가 갑자기 ······. " 오구라가 말을 어물거리고 있었다.

"다무라,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라."

"응." 히사오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팬히 우울해져서 말이지."
"우울?" 곧바로는 할 말이 찾아지지 않았다. "우울하다니, 결혼이?"
"이래저래."
"이래저래라니? 똑똑히 설명해봐."
"얼마 전에 기타하고 앰프, 처분했어. 신혼집에는 놓을 데가 없다고 해서, 별로 미련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없어지고 나 니까, 아, 나는 이렇게 꿈을 포기하는구나, 싶고."
오구라가 짧아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겸연쩍은 웃음을 내보였다.
"우스운 얘기지만 내가 아직도 어딘가에서 꿈을 꾸고 있었나 봐, 이카텐(아마추어 밴드 간의 경쟁으로 챔피언을 선정하여 엄청난 록 밴드 붐과 수많은 개성적인 밴드를 배출한 TV 프로그램)에 나가고 레코드 회사의 눈에 들어서 혹시 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다음 달이면 서른인데, 정말 바보 같은 소리다만."

"아냐, 바보 같을 건 없어."
"악보도 다 처분하고 레코드는 어머니 집에 보내고, 그런 주변 정리를 하다 보니 뭔가 완전히 끝났다는 기분이 들더라고.
"그 기분, 나도 알 거 같아."
"이 머리도 장인 장모한테서 은근히 지적이 들어오더라고, 결혼식에 그 머리로 나올 거냐고,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자, 그럼, 왜 기르고 있냐고 자문을 해봤더니 딱히 대답이 안 나오더라고, 한마디로 이건 정신적인 모라토리움인 거야, 이십 대 내내 어른이 되기 싫다고 생각했었어."
"그렇게 말하자면 나도 마찬가지야."
"대학 졸업하고 기업에 취직한 녀석들은 주위에 어른들이 있으니까 저절로 사회나 세상에 동화되잖아?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게 없었기 때문에 계속 학생 기분으로 이십 대를 보내버렸나 봐. 내일 결혼식은, 너희들 이제 어지간히 좀 나가라고 대학 12학년 생을 억지로 등 떠밀어 졸업시키는 거나 마찬가지야."
히사오가 말없이 맞장구를 쳤다. 오구라의 말을 들으면서 어쩐지 자기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친구들하고 함께 떠들고 웃고 할 마음이 안 나더라. 마음 독하게 먹고 머리를 잘랐는데 너무 안 어울려서 얼굴 내밀 기도 싫고,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신주쿠에서 나 혼자 술 한 잔 했다."
"야야, 잘 어울려" 작은 웃음을 던졌다. "어른이 되려고 깎았는데 괜히 더 어린애 같지?"

"데뷔 당시의 몸매카트니를 달았는데?"

"그런가?" 오구라가 전에 없이 수줍어하고 있었다.
오구라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우리는 늘 자유업이라고 가슴을 내밀면서도 이딘가 책임이나 의무에서는 계속 도망치고 있었다. 오구라는 이제 그런 마음 편한 처지로는 살 수 없없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는 것이다. 내일이 그에게는 졸업식인 셈이었다.
"다들 기다릴 거야. 가자, 위로." 히사오가 턱으로 가리켰다.
"응, 그래." 오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여자와 손을 끊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해주지."
"바보냐, 너?" 겨우 평소의 웃는 얼굴이 돌아왔다.
   373-375쪽

 

 

그때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히사오 도련님--." [3]
깜짝 놀라 돌아보니 리에코가 거기에 서 있었다.
"그쪽 얘기, 끝났어?"
"뭐야? 왜 여기 와 있어?" 갑작스러운 일에 히사오는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 생일 선물" 리에코가 테이블 위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스웨터야, 잘 어울리긴 할 텐데, 아무튼 열어봐."
"고마워, 하지만 내 생일은 다음 주인데?" 허둥거리면서 상자 를 열어보았다.
"알아, 하지만 꼭 오늘 주고 싶었어."
짙은 감색의 세련된 스웨터였다. 상당히 뛰어난 솜씨로 보였다.
"정말 고마워.” 다시 한 번 인사를 했다. "진짜 마음에 쏙 들어, 따뜻하겠는데?"
"아, 다행이다." 리에코가 안심했다는 듯 하얀 이를 내보였다.
"하지만 왜지? 아침부터 전화했던 거, 혹시 이것 때문이었어?"
"응, 이상하지?"
"이상할 건 없지만, 왜 꼭 오늘인가 하고."
"일 년 전 11월 10일, 기억 안나?"
"무슨 일이 있었던가?"
"남자들은 이렇다니까." 리에코가 과장스럽게 몸을 젖혀 보였다. "일 년 전에도 똑같은 날에 선물을 줬잖아."
"그랬던가?” 히사오는 생각해내려고 애썼다.
"그래, 시부야 카페에서 머플러를 선물했었잖아.”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업무 때문에 상의할 게 있다고 불러내더니 시부야 도젠자카의 카페테라스에서 리에코가 머플러를 건네주었던 것이다.
"나. 그때 엄청 긴장했던 거 알아?" 리에코가 몸을 앞으로 슬쩍 내밀었다. "그 일주일 전부터 계획을 짜고 10일로 하자고 결정하고 머플러 고르고 업무 때문이라고 이유를 둘러대고 할 말 까지 미리 다 준비했었어."
"그건 몰랐네." 눈을 떨구고 머리를 긁적였다.
"히사오 도련님이 우리 회사에 왔을 때, 내가 일부러 잡지에 나온 별자리 점을 펼쳐놓고 다무라 씨는 무슨 자리냐고 물어봤 었지? 그걸로 자연스럽게 생일을 알아냈어. 그게 내 계획의 첫 걸음이었다구."
“그랬구나.”
"어째서 일부러 생일을 피했는지 알아?"
"글쎄.” 웃으며 목을 움츠렸다.
"은근슬쩍 속마음을 떠보려고 그랬던 거지. 생각 안나? 생일에는 다무라 씨가 틀림없이 예정이 있을 거 같고 그래서 좀 빨리 준비했다. 내가 그랬었잖아. 여자친구는 없는 것 같았지만 혹시라도 있으면 내가 정말 멍청한 짓을 하는 거라서 그렇게 미리 예방선을 쳤던 거야."
리에코는 유난히 신이 나 있었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쳐들었다.
"그랬더니 히사오 도련님이 '예정은 무슨, 나 그런 거 없어요'라고 수줍어해서 내가 속으로 야호, 했었어."
"예. 그랬구나."
"그래, 그때 선물 받고 자기가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했고, 그게 우리 교제의 시작이었어."
"아, 정말 그렇다." 대답을 하면서 리에코의 반짝이는 눈동자 를 들여다보았다.
"그게 나로서는 사랑의 고백이었어. 그러니까 나한테는 자기 생일은 11월 10일이고, 내가 크게 용기를 냈던 기념일이기도 해. 알았어?"
"응, 알겠네."
"어휴, 정말, 여자 쪽에서 먼저 고백하게 하다니. 자기도 남자로서 참 문제 많다." 리에코가 꾸짖듯이 미간을 찡긋해 보였다.
"그렇다면," 약간 장난스럽게 말했다. "다음 고백은 내가 먼저 할게."
"흥, 그래 주세요.” 리에코도 지지 않고 장난하는 포즈로 턱을 쑥 내밀었다.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둘이 동시에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사이는 좋은데 별다른 드라마가 없어서 좀 만들어보고 싶었어."
"그렇구나."
"자, 그만 갈래, 미안, 여자 친구의 어린애 같은 놀이에 억지로 끌어들여서." 리에코가 일어섰다.

"아냐, 만나서 너무 좋았어."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눈앞의 리에코가 진심으로 사랑스러웠다.
코트를 입혀주었다. 호텔 현관까지 배웅했다.
얀녕, 이라고 말하고 리에코를 택시에 태워주었다. 받은 스웨터를 품에 안았더니 가슴 저 깊은 속까지 따스해졌다.[3]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위트룸이 있는 플로어로 향했다. 손목 시계를 보니 이제 슬슬 오늘 하루가 끝나려 하고 있었다.
길고긴 하루였구나. 한숨이 새어나왔다. 고다에게 이리저리 휘돌리고, 오구라의 속 깊은 얘기를 듣고, 리에코의 귀여운 놀이를 상대해주고--.
하지만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남의 속마음을 들으면 어쩐지 나 자신까지 치유된 듯한 기분이 든다. 사람들끼리 서로 통하면 용기가 솟구친다. 도쿄의 에너지는 분명 수많은 사람의 에너지다. 리에코도 더욱더 좋아졌다. 언젠가 틀림없이--.
큰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드디어 내 입에 술을 넣게 되었구나. 그러고 보니 배도 고팠다.
힘차게 호텔 스위트 룸의 문을 열었다.
  375-379쪽

 

물론 이 소설은 주인공 히사오가 친구의 배첼러 파티에 참석하여 '나쁘지 않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끝난다.

방대한 개인 자료를 어떻게 정리할지 카테고리를 정하는 기준으로 24시간이라는 타임 리밋을 생각해 보았었다. 그런데 작가 오쿠라 히데오는 20대를 보내고 서른을 맞는 주인공의 인간적으로 성숙해진 모습을 하루 동안의 여러 사건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를테면 기승전결이 뚜렷했다.

[起] TV에서 보여준 일본 왕세자의 근황과 자신을 비교해보고, [承] 이십대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차린 사업체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VVIP 고객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고심한다. 그러나 [轉]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듯이 돈 잘 버는 그의 고객도 한낱 외롭고 불안에 떠는 인간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배첼러 파티의 주인공이 결혼식을 앞두고 돌연 우울감에 빠졌던 속마음을 그에게 들려준다. [結] 마침 그에게 생일선물을 미리 전해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썸 타던 여친을 만나 그녀의 고백을 듣고 그녀와 평생을 같이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뛰어난 생성형 AI라 할지라도 이와 같이 기승전결을 갖춘 '플러스' 창작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작해야 어떤 카테고리 안에서 '마이너스'를 하며 간추리는 요약에 능할 뿐이다.

그러므로 퍼스널한 자료를 정리할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는 프라이빗한 자료는 빼고 카테고리 별로 분류하여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창작(content creation)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는 것으로 목표(goal)를 현실화하기로 했다.  

 

Note

1] 율리시즈는 그리스어 오디세이아의 영어 표기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유대계 광고업자 레오폴드 블룸, 그의 부인 마리온, 학생이며 시인인 스티븐 디달러스 등 3명이다. 작품의 전체적 구성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본떴는데 블룸은 오디세우스, 마리온은 페넬로페, 디달러스는 텔레마코스에 해당한다. 또한 《오디세이아》와 마찬가지로 칼립소, 하데스, 세이렌, 키클롭스 등 18개의 스토리로 구성되었으며, 각 삽화도 《오디세이아》의 그것을 따랐다.

1918∼1920년에 뉴욕의 문예잡지 《Little Review》에 연재하던 중 외설적이란 이유로 게재금지를 당했으나. 1922년 파리의 셰익스피어 서점에서 간행되었다. 이 소설은 의식의 흐름과 내면의 독백을 종횡으로 활용하는 등 종래의 소설 형식을 근본적으로 뒤엎은, 문학사상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조: 두산백과 두피디아.

 

2] 이 소설의 소재인 도쿄의 부동산 버블은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기시감이 있는 현상이다. 투자 대상을 부동산 외에 고수익 고위험 펀드, 파생금융상품, 가상화폐로 넓혀보면 이 소설과 같은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신종 가상화폐를 고안하여 세계적인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가 수많은 피해자가 속출했던 권 아무개도이 소설 속의 고다 씨와 오버랩되어 보인다.  

 

3] 일본에서도 '보짱'(도련님, 坊ちゃん)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시동생을 부르는 말이지만  이 소설에서와 같이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부르는 애칭이기도 하다. 이 호칭은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소설을 통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에 착안하여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한 것이 있는지 Yahoo Japan을 통해 찾아보았다. 오쿠다 히데오 원작의 만화(위의 사진)는 있으나 다른 작가의 동명의 영화 「東京物語」 외에는 검색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