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Day] AI 시대의 '이규태 코너'란?

G :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때 들려주신 '사랑'에 관한 詩와 이야기는 타이밍이 아주 좋았습니다.  오늘은 남성이 여성에게 그 답례로 선물을 한다는 3월 14일 화이트 데이에 관한 이야기인가요?

P : 그보다 더 미래지향적인 인공지능(AI)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지난 달 귀한 책 선물을 받았거든요. 옛 직장에서 신입사원 시절부터 존경해 마지 않던 정봉렬 시인이 서가에 넘치는 책을 정리하던 중 '이사 다닐 때 제일 먼저 챙겼던 책들'이라며 저에게 이규태 전집을 선물로 보내 주셨어요.

 

 

G : 저도 압니다. 조선일보에 장기간 연재되었던 '이규태 코너'를 책으로 묶어 조선일보, 월간조선 등을 정기구독하는 독자들에게 나눠준 비매품(非賣品) 책 아니었습니까! 몇 년에 한 번씩 그 책이 나올 때마다 신문과 잡지를 번갈아 구독하게 됐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P : 저 역시 그 기명 칼럼을 즐겨 읽고 스크랩도 하곤 했어요. 신문이 휴간하는 일요일을 빼고 1983년 3월 1일부터 2006년 2월 23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6702회분의 칼럼은 '한국학의 보물섬'이라는 부제가 붙기도 했죠.

이규태(1933~2003) 씨는 전북 장수 출신으로 전주사범학교와 연세대학교 화학공업과를 졸업하고, 군산상고 교사를 하다가 1959년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습니다. 사회부 기자 시설 소록도를 탐방취재하고 그 실상을 지상에 알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이청준 씨가 3부작 「당신들의 천국」(1976)을 쓴 것은 유명한 일화지요.

 

G : 아~ 조선일보의 인기 연재물 개화백경(開化百景), 한국인의 의식구조 같은 기획물을 담당하는 전문기자인 줄로만 알았는데요.

P : 그건 한참 후인 21세기 이후의 이야기죠. 그가 기자 초년병이었던 1960년「대지」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펄벅(Pearl S. Buck, 1892∼1973) 여사가 방한하여 동행 취재를 했답니다. 시골길을 갈 때 지게에 볏단을 짊어진 농부가 짐을 잔뜩 실은 소달구지 옆에서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고 펄벅이 외쳤다고 하죠. "자기도 소 달구지에 짐 모두 싣고 앉아서 편히 갈 수 있는데…" 시골 출신 이규태 기자에겐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었음에도 감탄하는 펄벅 여사의 모습을 보고 놀랐어요. 그는 자기집 일하는 소마저 배려하는 한국인의 의식을 탐사하고 기록하는 일에 기자로서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G : 그랬군요. '이규태 코너'가 신문에 연재될 당시 우리나라에도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게 많구나 하고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 말로 하면 '국뽕'(한국에 대한 과도한 자긍심을 이르는 말)의 원조였다고 할까요.

P : 이규태 씨는 그 사이에 사회부장, 문화부장, 편집부국장, 조선일보 이사 주필, 논설고문을 역임하는 등 조선일보를 대표하는 대기자로서 건필을 휘둘렀지요. 마지막 칼럼을 쓰고 이틀 후에 세상을 떠난, 천생 기자이셨어요.

 

G : 그럼 오늘은 이규태 코너에서 어느 대목을 찾아서 읽어주실 건가요?

P : 얼마 전 이 블로그에서 "자기 형편이 어려운데도 남을 불쌍히 여기고 돕는 사람들"은 어떤 심리에서 그러한 행동을 할까 하는 문제를 다뤘던 적이 있지요? 마침 이규태 코너에도 그에 관한 칼럼이 있어 여기 소개하고 몇 가지 생각나는 점을 비교해보고자 합니다.

 

 

행상(行商) 할머니

미국 사람들은 헤티 그린이라는 할머니를 기억하고 있다. 80세에 작고한 이 할머니는 8000필지의 부동산과 1억2500만 달러라는 거액을 남겼는데 통조림 깡통에 그 거액 예금통장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값싼 오트밀만으로 끼니를 이었는데 연료비가 든다고 데워 먹는 법도 없었다.
그녀의 14세된 외아들이 응급 치료를 요하는 다리를 다쳤는데도 무료진료소를 찾느라고 닷새 간을 허송한 바람에 이를 절단해야만 했다. 옷은 깃마다 닳아 마치 하얀 줄을 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고 전기를 적게 쓰는 구식 전기구를 찾아 사흘 동안 고물상을 뒤진 할머니다. 이 분이 작고했을 때 뉴욕 타임스는 돈을 쓰지 않은 데서 행복을 개척하는 프론티어라고 찬양했다. 물론 이 할머니가 남긴 유산은 문화기금으로 선용되고 있다.

미국의 'USA 투데이'지는 지난 3월 13일자에 헤티 그린 할머니 같은 풍요 속의 구두쇠 할머니들을 특집하고 있다. 텔레비전이며 전화도 없이 노점상 생활 26년 동안 벌어 모은 150만 달러를 공공도서관에 기증한 레이몬드 페리 할머니, 480만 달러를 농아학교에 기증하고 죽은 올리브 스윈들러는 역시 난방 없이 겨울을 지내던 구두쇠 할머니다.
80평생을 라디오 하나 없이 독신으로 살아온 매리 맥긴스는 140만 달러를 장학금으로 남겼는데, 그 중 50만 달러의 현금을 그녀의 유일한 세간인 무쇠난로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의 공통된 삶의 철학은 어릴 적 가난하게 살았거나 종교적 검약의 감화로 돈을 헤프게 쓰는 것에 죄악감을 가졌기 때문으로 학자들은 해석했다.

'동패낙송(東稗落誦)'이라는 문헌에 보면 우리 조상들 가운데 무일푼으로 살림을 시작, 묵밭을 가꾸고 길쌈 행상을 하면서 가산(家産)을 일구는 검약 근면한 여인 이야기가 적지 않다. 남양의 장씨 여인은 그렇게 번 수천 섬을 행려병자 병 구료(救療), 밥 구황(救荒)하는 데 썼고 제주 기생 김만덕은 그렇게 모은 수천 섬의 곡식을 기근에 죽어가는 백성에게 풀어 구황했다.

근년 들어 평생 품 팔아 모은 돈을 대학에 기증하는 할머니가 늘고 있더니 전주에서는 40년 간 홀몸으로 살면서 고구마 떡을 광주리에 이고 행상을 했던 할머니가 평생 모은 돈 1억 원을 전북대학교에 장학금으로 희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살벌해진 세상의 살기 (殺氣)를 무디게 해 준 할머니다.
같은 신문에 실린 -- 세 살짜리 손자에게 12억 원짜리 집을 사준 돈 많은 할아버지와 대조되어 더욱 그렇고, 정국이 검은 돈에 휘말려 파국으로 치닫는데 억 대의 냄새나는 돈으로 비행기 1등석 타고 나가 골프 외유를 즐기는 국회의원들과도 대조되어 더더욱 그렇다.  <1997.3.30>

 

G : 조선일보 독자라면 이규태 코너의 분위기랄까,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시골집 행랑채의 추억 속의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

P : 우리가 주목할 것은 국내외 시사보도의 맥(脈)을 잡아서 칼럼의 주제를 정하고 제목을 붙이는 필자의 고감도 안테나와 센서입니다. 매일 칼럼을 쓰면서 독자들의 반응에도 많이 신경을 써야 했을 테니까요. 이러한 종합적인 감각은 AI가 도저히 모방할 수 없는 거라고 하겠습니다.

 

G : '행상 할머니'의 국내외 사례 조사와 분석 평가는 챗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잘 하겠는데요?

P : 네, 이규태 기자는 생전에 지하실에 만권 장서를 보유하고 그만이 아는 독특한 분류방법으로 도서를 배치를 하여 신문사 출근 전에 대강 자료수집을 마쳤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역시 자료 검색 및 분석은 AI가 뛰어나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사례를 한국의 사정에 비추어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은 사람이 잘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독자들의 호기심 을 자극하고 읽는 재미를 선사하는 것은 사람이 훨씬 잘한다고 봐야지요.

 

G : 네, 정리를 하자면, 자료 조사 및 분석 평가는 AI가 잘하고, 칼럼 주제와 제목의 선정, 한국 사정에의 적용, 읽는 재미는 사람 기자가 앞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데이터베이스가 잘 갖춰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AI 로봇 기자에게는 보조역할을 맡기고 사람 기자가 AI에게 요령 있게 일을 시켜야 한다는 말이 되겠네요?

P : 그렇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겪은 일인데요, 법원도서관장을 역임했고 우리나라 스마트폰 사용법에 관한 일타강사인 서울고등법원의 강민구 부장판사가 책을 펴낸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강 부장판사의 사법연수원 동기인 윤성근 부장판사가 와병 중인 것을 알고 그의 책을 펴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단 며칠만에 전자책 형태로 뚝딱 만들어낸 것입니다. 구글 검색만으로 고인의 언론 기고문과 신문기사, 학술지 논문을 모으고 주변인사의 글을 함께 수록하여 근사한 단행본[1]을 단 며칠 만에 완성하여 모두가 놀랐습니다.

데이터가 충분히 갖춰져만 있다면 한 사람의 기획자가 AI를 활용하여 못할 일이 없겠다는 가설이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G : 그러니까 이규태 대기자의 후임자가 AI 시대인 지금 이규태 코너와 비슷한 내용의 칼럼을 쓰기로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P : 시사성 있는 주제 선정은 사람의 몫이고 자료 검색 및 분석은 기계(GPT)에 맡기는 게 좋겠죠. 어디까지나 한국 사정에 맞게 고치고 맛갈나게 글을 쓰는 것은 여전히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봅니다.

 

G :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자료 검색과 분석은 기계가 해줄테니 사람은 한가롭게 문제의식을 지니고 독자, 즉 지식상품의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찾아서 재미있고 유익하게 쓰는 일에나 힘써라 -- 아주 건설적인 결론이 나는군요. 앞으로 사라질 일자리, 새로 생겨날 일자리도 판가름나는 것 같습니다.

P : 어느 교회 목사님이 챗GPT 시대에 크리스천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어요.[2] 성경 사사기 7장에 나오는 기드온의 300 용사 예를 들면서 미디안 십만 대군이 침공해 왔을 때 기드온 용사가 대적한 것은 엉뚱하게도 횃불을 숨긴 항아리와 나팔이라고 하였습니다. 미디안 대군을 제압한 것은 창과 칼이 아니라 그네들이 상상도 못한, 하나님이 그 비결을 알려주신, 일제히 항아리 깨는 소리와 우렁찬 나팔 소리[3]였다는 것입니다. 아주 상징적인 비유 아닌가요? AI의 거대 언어 모델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는 Some Things를 발굴하여 사람이 AI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하겠습니다.

 

Note

1] 강민구 편, 윤성근 부장판사 칼럼집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 바른디자인, 2021. 11. 15. 저자가 2022년 1월 11일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책은 고인을 추모하는 책이 되었다. 고인의 법치주의에 대한 열정과 판사 재직 시 우리나라 국제거래 사건 해결에 대한 공로를 기려 2022년 10월 제6회 천고법치문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법률신문, "고 윤성근 서울고법 부장판사, 미·중 법률에 능통…국제사건의 대가", 2022. 10. 13.

 

2] 서울 사랑의 교회 주일예배 설교: 오정현 목사, "챗GPT 시대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2023. 2. 26.

 

3] 온라인 게임, 바둑 등 AI를 적용한 소프트웨어가 많이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이세돌 9단은 2016년 3월 13일 구글 딥마인드 AI 알파고와의 네 번째 대국에서 승리를 거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7년 만에 이세돌 기록을 깬 사람이 등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미국 아마추어 바둑 기사 켈린 펠린이 AI ‘카타고(Kata Go)’와 15번 대국해 14번 이겼다. AI 카타고의 실력은 이세돌 대국 당시 알파고를 뛰어넘는다. 펠린은 카타고의 돌을 느슨하게 포위하면서 공격 의지가 없는 것처럼 방심하게 만들고, 갑자기 귀퉁이에 돌을 두는 도발적 수로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었다. 펠린에게 AI 필승법을 알려준 것도 AI였다. 이 AI는 카타고와 100만번 대국하면서 카타고의 사각(死角)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펠린이 둔 것과 같은 변칙은 AI가 배운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박건형, "AI의 약점", 조선일보 만물상, 2023. 2. 21.

사람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AI를 이긴 비결이란 바로 '사람답지 않게' 두는 것, 즉 미디안 군대의 허를 찔렀던 '기드온 기습 전법'이었다. 아무리 사나운 말도 재갈을 물리면 온순해지는 것처럼 사람이 AI를 요령있게 다루는 비결은 이것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