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에서 사역을 하던 사도 바울은 당시의 제일 부강한 나라인 로마의 신도들에게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바울이 구술로 받아 적게 하여 로마에 보낸 로마서(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는 그리스도교의 진수(眞髓)를 담고 있다.
기독교 신자라면 이 책이 성 오거스틴을 회심케 했고, 번민에 싸인 가톨릭 사제 루터로 하여금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인정(以信稱義) 받아 종교개혁에 나서게 만들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남들이 경탄하는 풍경이 나한테는 별로인 경우도 있는 것처럼, 과연 내 자신의 신앙심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책인가 지레 의아심을 품게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일본의 근대화 시기에 본격적으로 기독교사상을 공부하여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는 "로마서를 모르고서는 기독교를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우치무라는 일본 전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자 6년간 60회에 걸친 로마서 강의를 하고 이를 토대로 한 강론서[1]를 펴낸 것으로 유명하다.
온누리교회에서도 2022년 5월부터 지교회까지 전체적으로 로마서 강해 설교에 돌입하였다.
특히 7월 18일 주일 설교에서 이재훈 담임목사는 로마서 3장 21절부터 시작되는 요절에 앞으로 계속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주제가 들어있다고 하셨다. 그것은 "오직 은혜로 얻는 의(義)"라고 했다.
다음은 온누리교회 이재훈 목사의 이 날 설교 메시지를 간추린 것이다.
신앙생활의 위기는 어느 정도 말씀에 익숙해졌을 때 다가온다. 말씀에 소홀해지면서 구원의 감격도 시들해지고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께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을 깜박 잊어버릴 때가 많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성도들에게 큰 선물을 안겨주셨다. 그것은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피해갈 때가 많다. 때로는 하나님이 일부러 지옥을 만들어 놓고 죄 지은 자를 처벌하시는 분이 아닌가 의심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에 대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진정 선하신 분이기에 죄 지은 자가 응당 받아야 할 벌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감해주신다.
유대인들은 하나님한테 받은 율법을 각색하여 그런 죄를 짓지 않는 자기네의 공을 자랑하곤 했다. 그런데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스스로의 양심과 도덕을 기준으로 죄를 짓지 않고자 했다.
이제는 율법과 별개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거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의 피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 과거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그분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3:21-25.
로마서 3장 21절부터 주제가 율법에서 의로움으로 전환되었다. 우리는 위대한 구원의 시대,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심판으로부터 구제를 받았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눈감아 주시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인정해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복음을 믿음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예수가 행하신 일은 무엇인가. 인간을 구속(求贖)하시려고 하나님의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다.
첫째, 우리의 죄를 대신 속량(Redemption)하시고 모든 죄를 도말하셨다.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게 이런 뜻이었다.
둘째, 화목제(Propitiatory offering)가 되셨다. 인간은 하나님이 생명으로 덮어주신 것을 기념하여 태워 없애지 않고 이웃과 함께 제물(Fellowship offering)을 나눠 먹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뒤에는 그가 가르쳐주신 대로 그의 살과 피를 나눠 먹음(성찬식)으로써 성도간에 교제를 나누고 있다.
셋째, 칭의(Justification)의 문제이다. 값진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것이니 얼마나 귀하겠는가. 내가 따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받은 산소(oxygen)와 같은 것이다.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에 합당한 우리의 태도는 오로지 믿음뿐이다.
하지만 이것을 믿고 행하는 것이 왜 어려운가?
값없이 주어졌기에 쉽기도 하지만 아주 어려운 문제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의심하고 다른 것을 추가하려고 한다.
구원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 하려는 인간의 그릇된 노력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래서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2]
야고보서에서는 이렇게 의롭게 된 성도들이 행동으로 옮겨야 할 바를 말씀하신 것이다.
복음은 인간이 자랑할 게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게 되었음을 일러주신다.
자신의 義는 자랑할 게 없으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박아야 함을 일깨워 주신다. 이러한 믿음에는 차별이 없다.
마침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정치적ㆍ외교적ㆍ경제적ㆍ사회적 문제로 인하여 견해와 입장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있다. 심지어는 진보와 보수로 진영이 나뉘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가계부채, 전월세 대책 같은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놓고도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이 부닥치는 문제는 모두 우리의 죄성(罪性), 즉 선악과를 먹음직스럽게 여기고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하려고[3] 따 먹었던 원죄의 문제로 귀결되곤 한다. 따라서 그 해결방안도 여기서 찾아야 함을 알 수 있다.
목사님은 앞으로 이 같은 내용을 계속 되풀이하여 설교를 할 터인데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므로 예배를 빠져도 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이셨다.
Note
1]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는 1861년 에도에서 태어났다. 동경외국어학교(1874)를 거쳐, 비록 1년도 안 되는 재직기간에 일본의 걸출한 지도자를 여럿 배출한 윌리엄 클라크 교수의 "Boys, be ambitious" 같은 훈화를 들으며 삿포로 농업학교(1877, 現 홋카이도 대학교)을 다녔다. 우치무라는 이 학교에서 처음 기독교를 접했고 세례까지 받았다. 졸업 후 잠시 농상무성 관리로 있다가 미국 유학을 떠나 애머스트(Amherst) 대학에서 기독교 역사, 히브리어, 헬라어, 서양사 등을 공부했으며 졸업 후 하트포드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했다. 1888년 소명을 품고 귀국한 그는 니가타 현의 호쿠에쓰 가칸 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시작했다. 1891년 제일고등중학교에서 가르치던 중 천황의 '교육 칙어'를 불경시했다는 이유로 교직을 떠나야 했으며, 이 때부터 본격적인 저술 활동에 들어가 주옥 같은 저작들을 쏟아 냈다.
우치무라 간조는 한때 월간 <성서 연구>를 통해서 신앙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애국과 정의에 관한 견해를 펼쳤으며, 이러한 사상은 김교신과 함석헌에게로 이어져 <성서 조선>의 창간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기성 교회가 지나치게 의식적이고 조직에 얽매여 있으며 신학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 본래의 생명성을 잃어버렸다고 판단, '無교회주의'를 주창하며 성서 연구 중심의 기독교 복음 운동을 전개했다.
우치무라 간조의 60회에 걸친 강해를 토대로 간행된 <로마서 연구 (상ㆍ하)>는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와 함께 그 내용의 심오함 뿐만 아니라 시대를 개조하고 사람을 개조한 책으로 유명하다.
2] 루터, 칼뱅 등 종교개혁 지도자들이 내 걸었던 세 가지 Sola는 오직 은혜(Sola Gratia, "by Grace alone"), 오직 믿음(Sola Fide, "by Faith alon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by Scripture alone")이었다. 여기에 두 가지를 더 추가(Five Solae)하기도 한다. 오직 그리스도(Solo Christo, "Christ alone" or "through Christ alone"),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glory to God alone").
3] 바로 이 점을 경계하여 공자님도 주역(周易) 계사전에서 "자랑하지 말라(不伐)"고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큰 공을 세우고도 이를 내세우지 않는 것은 선비들의 큰 덕목이 되었다. "子曰 勞而不伐 有功而不德 厚之至也 (공로가 있어도 자기 덕이라고 내세우지 않는 것은 두려움이 지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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