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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iness

[신앙] 길갈을 지나 가나안 땅으로

Onepark 2022. 8. 19. 12:45

돌이켜 보건대 나의 20대는 방황과 번민의 시절이었다. 대학 동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재학 당시부터 사법시험(司試)에 몰두하여 1차는 어렵지 않게 합격했으나 2차는 여러 차례 고배를 들어야 했다. 연수(年數)를 거듭할 수록 어려운 가정형편에 언제까지 사시공부만 할 수 있나, 아니면 취직을 해야 하나, 유학을 갈 순 없나 등등 생각이 많아졌다. 나중에는 사시 합격자가 1천명까지 늘었지만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연간에는 60~80명이 고작이었다.

 

나는 결국 사시를 단념하고 직장에 다니게 되었으나 대학 선배인 조성기 교수[1]의 소설 《야훼의 밤 - 길갈》(2002)을 읽고 나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정신적 방황을 겪은 것을 알았다. 그는 대학재학 중 대학생선교단체에 들어갔고 사시공부와 선교활동의 갈등을 경험한 바 있고, 이미 《라하트 하헤렙》(1985)으로  '조성기=기독교 작가'라는 자리매김을 한 터였다. 그의 소설은 크리스천인 나에게도 여러 모로 자극이 되고 인상이 깊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라하트 하헤렙'이란 성경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예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 되돌아 올 수 없도록 그 입구를 지키고 있는  불타는 화염검(창세기 3:24)을 뜻한다. 그렇구나~ 하나님은 인간의 과거회귀 습관을 아시고 제동 장치를 만들어 놓으신 거였다.

 

* 2014년 단권의 개정판이 홍성사에서 발행되었다.

왜 지금 조성기 교수의 오래 전 소설들을 소환하느냐?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부조리한 현상들이 사회구성원들이 충분히 성숙하였음에도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서 그 전 단계로 되돌리려 하는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경제개발(산업화), 민주화 같은 거대담론 뿐만이 아니다. 소비패턴의 변화, 개인주의,  인구절벽 같은 문제도 하루 속히 채비를 마치고 새로운 파도에 몸을 실어야 한다.

몇 해 전 한일 통상마찰이 빚어졌을 때에는 때아닌 '죽창가'와 '토착왜구론'이 정부와 여당에서 터져 나왔다. 두 나라가 수교한 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국민들의 의식세계를 100년 전으로 돌려놓을 기세였다.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토착왜구라며 몰아 세웠다.

 

하기야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벗어난 홍해 물에 바로의 군대가 수장되는 목격하고도 그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자 애굽 노예 시절에 배불리 먹던 것을 기억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으니 말이다. 분명히 해결책은 앞에서 찾아야 함에도 익숙하게 살았던 과거의 방식대로 해결을 시도하면 실패할 것이 자명하다. 

금년에 정권이 바뀌면서 산업화 시대의 노동운동이 4차 산업혁명 -- 인공지능, 로봇 -- 시대에는 노동의 개념부터 바뀌었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즉 아담 같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낙원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다가는 화염검의 제물이 되기 십상인 것이다. 

조성기 교수는 대학생선교단체의 지도부에 반기를 들때 다음과 같은 고민에 잠긴다.

 

종교(Religion)라는 것이, 다시(re) 결합한다(ligio)는 것이 여호와와 결합하면 유대교가 되고, 예수와 결합하면 기독교가 되고, 알라와 결합하면 회교가 되고, 브라아마나와 결합하면 힌두교가 되고, 부처와 결합하면 불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결합을 속성으로 하는 종교가 자체 내에서 분열되어 싸우는 것보다 더 큰 모순은 없는 것 같다. (241쪽)

 

그렇다면 신구약에 밝은 조성기 작가는 소설의 제목 '길갈'을 어디서 무슨 의미로 따왔을까?

 

여호수아 5장 9절에 ‘길갈(Gilgal)’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방랑 끝에 요단강을 도하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선포하셨다.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여호수아는 그 곳 지명을 굴러간다는 의미를 지닌 ‘길갈(Gilgal)’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광야 40년 기간 동안 안식일을 제외하고 날마다 비처럼 내리던 일용할 양식, 만나도 그쳤다. 이제 하나님은 새로운 양식,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풍성한 열매들을 자기 백성이 먹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개인의 인생뿐만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도 ‘길갈’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신다. 애굽의 수치, 강대국에 시달리며 사분오열되었던 한민족의 수치를 세계 선교를 통하여 굴러가게 하신다. 미국 같은 강대국도 복음으로 정복할 수 있다. 이제 한국이 미국 선교사를 필요로 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오히려 미국이 한국 선교사를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다.

한국 민족은 이제 광야에서 주워 먹던 만나를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은 이미 새로운 양식을 주셨다. 세계 각국을 한국 민족이 먹을 양식으로 허락해 주셨다.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베드로에게 성령을 통하여 주셨던 환상은 바로 우리의 환상이다. 이렇게 ‘길갈’의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빠른 시일 내에 미국 선교를 위해 파송받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해 히브리 백성, 아니 인류에게 하신 말씀은 더 이상 광야시대의 만나는 없다. 너희 스스로 먹을 것을 찾고 살 곳을 정해야 한다. 다시 되돌아갈 수 없도록 각 지파별로 큰돌을 취하여 이를 기념하고 이 일을 오래오래 기억하도록 하라는 말씀이었다. 길갈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굴러간다'는 뜻도 있으므로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가나안땅'이라 선포하고 힘차게 굴러가면 그곳도 내 땅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작가는 그가 속하였던 선교단체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견지에서 종교개혁가 칼빈의 사례를 들고 있다. 종교지도자의 독선과 편협성이 단체의 선교활동에 큰 문제를 일으킨다고 지적하기 위함이다.

사실 로마 가톨릭 역시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통해 삼위일체론(Trinity)에 반대하던 아리우스 파를 교회에서 몰아냈거니와 종교개혁 당시에도 칼빈은 그의 예정설에 반대하여 하나님 유일신을 믿지만 삼위일체론을 부정한 유니태리언 교인(Unitarianist)들을 단호하게 배척하였다. 그 때 일어난 사건이 1553년의 세르베투스 화형식이었다.

 

* 삼위일체론의 도해. 유니테리언들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인간의 이성을 존중한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를 할 때 단어 하나 때문에 세르베투스라는 젊은 의사를 화형시켜 버렸다. 세르베투스는 라틴역 성서의 개정판을 발행할 정도로 성경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당시 칼빈이 강조하던 삼위일체 교리에는 반대했다. 그래서 예수를 표현할 때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칼빈은 이 표현이 예수의 신성과 영원성을 부인하는 표현이라고 분노하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라고 하든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라고 바꾸라고 했다. 결국 ‘영원하신’이라는 형용사의 위치를 좀 바꾸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르베투스도 나름대로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자기표현을 고집했다.

마침내 화형선고를 받고는 울부짖으며 기절까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형용사의 위치를 바꾸지 않겠다고 버텼다. 화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그는 칼빈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목 더미 위에서 자신의 저서들과 함께 세르베투스가 불에 타들어갈 때 칼빈이 보낸 파렐이라는 사람이 외쳤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에게 기도하라!” 그러자 잘 타들어가지 않는 불길과 연기에 싸인 세르베투스는 몹시도 괴로워하며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예수님,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세르베투스도 지독하지만 그 당시 제네바 최고 권력자로서 끝내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켜 버린 칼빈이 더 지독하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도 예수를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만 표현하는 적이 많은데 ‘영원하신’이라는 형용사를 아들 앞에 반드시 붙이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물론 세르베투스의 反삼위일체론을 의식하고 그리 했지만 성경 이상의 표현을 강조한 것은 지나친 월권행위임에 틀림없었다. 사실 ‘삼위’나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 글자 한 자, 토씨 하나 차이로 사형시키고 사형 당하고 한 것이 기독교 교리 싸움의 역사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세르베투스 화형 350주년 기념일(1903.10.27)에 그가 화형당한 제네바 샴펠 언덕 위에 칼빈의 후손들이 ‘참회비’를 세운 것이다. 칼빈이 살던 시대의 과오를 비난하는 동시에 “양심의 자유가 문자적인 교리보다 더 귀중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이 참회의 비를 세운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비문에도 칼빈의 과오를 인정하고 비난한다고는 하지 않고, 칼빈 시대의 과오라고 표현하여 은근히 그 시대에다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다. 결국 애매모호한 ‘참회비’가 된 셈이다. 아무튼 이렇게 자기 주장에 철자했던 칼빈을 따르는 장로교인들이니 얼마나 독선적이겠는가. 그러니까 쪼개지고 또 쪼개어져 한국에만 해도 장로교파가 몇 수십 개가 되는지 알 수 없는 형편이다. (237-238쪽)

 

작가는 일본이 기독교 전래는 우리보다 훨씬 앞섰으나 에도 막부의 봉건 쇄국정책으로 기독교는 거의 고사 상태에 있었음을 지적하고 근대화 초기에 우치무라 같은 선각자가 나타나 교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하였다고 말한다.

다행히 우리나라에도 그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지도자가 있었으나 일제의 식민지배와 태평양 전쟁으로 제대로 뜻을 펴지 못했다고 아쉬워 한다. 해방 후 기독교계는 일제하 신사참배와 이념의 갈동, 6.25 전쟁통으로 명확한 해답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봉합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일본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삿포로 농업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과 함께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7인 형제의 작은 교회’라고 해서 7명의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신앙 모임을 이루어갔다. 그들은 예수의 사랑에 뜨겁게 심취되어 가면서 또 한편으로 학교생활에서도 모범을 보인 우등 장학생들이었다.

그런데 그 지역에 미국 감독교회파 선교사 두 사람이 각각 교회를 세우고 농학교를 대상으로 전도를 시작했다. 애초에 그 학생들에게 세례를 주었던 감리교 선교사와 그 두 감독교회파 선교사 세 사람이 전도 각축전을 벌이며 ‘7인 형제의 작은 교회’ 학생들을 서로 끌어가려고 악착같이 대들었다. 그러한 선교사들의 교파경쟁, 전도경쟁으로 인하여 7명의 형제들은 각각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깊은 번민에 빠졌다. 여기서 그들은 미국식 교파주의적인 경쟁심에 실망하고 결국 모든 교회를 떠나기로 했다.

그 후 우치무라는 썩어가는 제도적인 교회에 대항하여 「무교회」라는 잡지를 발행하며 원시 기독교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 잡지 명칭 때문에 무교회주의자라는 이름이 생겼다. 우치무라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일생 동안 제도적인 조직화를 거부했다. 자기 제자들도 자기 밑에 있지 말고 속속 다 독립해서 나가 일하도록 함으로써 끊임없이 무조직이 되게끔 하였다. 죽을 때에도 자신의 성서잡지를 폐간시키고 자신이 강의하던 강당 집회도 폐쇄하라고 유언하였다. 사후에 자기 이름을 빌린 또 하나의 조직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한국에는 김교신이라는 기독교인이 있었다. 그도 19살 때 자기가 속해 있던 교회에 내분이 일어나고 목사가 사임을 하고 하는 것을 보고는 교회생활과 신앙 전반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졌다. 그런 중에 우치무라를 만나 마음에 빛을 얻고 신앙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조국애에 불타게 되었다.

그는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면서 다른 문제들보다 먼저 인간 해방을 역설했다. 여기서 인간 해방이란 교회제도로부터의 해방도 포함하는 말이다. 그의 무교회주의는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공간을 점유하는, 눈으로 보이는 회당을 진정한 교회로 여기지 않고 신자들의 친밀한 교제 속에 교회가 있다고 보았다.

둘째, 성직제도나 신자들의 조직을 부인하고 직분을 빙자한 권위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셋째, 교회나 목사의 성서 해석권을 인정하지 않고 신자 각자가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넷째, 세속적인 직업에 충실하는 것이 하나님께 봉사하는 길임을 역설하면서 뚜렷한 직업관을 가지고 일하라고 격려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민족이 감당해야 할 세계사적인 사명이 무엇인가 그것을 찾는 것이 인생의 과제요 신앙의 과제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5천 명이 넘는 한국인 노무자들이 흥남 질소비료 공장에서 혹독한 괴로움을 당하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공장에 직접 취업해서 들어가 노무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다가 노무자 숙소에 번진 발진티푸스에 걸려 해방을 앞두고 아까운 나이로 애석하게 죽고 말았다. 그는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실제 생활에서 직접 몸으로 애국의 길과 구도의 길을 감으로써 모범을 보인 특별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시대의 단독자”라고 불렀다. (299-301쪽)

 

Note

1] 趙星基 (소설가, 前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 호는 빈성(貧星), 서울대 법대 제26회 졸)는 일찍이 문학적인 천품과 의지를 드러내 경기고등학교와 법과대학 시절에 소설부문 학내 문학상을 수상하고 특히 대학 3학년 때 단편소설(만화경)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한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1977년 8월 대학을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였으며, 그 후 작가보다는 대학선교단체의 사역자로 봉직하였다. 그러나 1985년 발표한 장편 <라하트 하헤렙(불칼)>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제9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함으로써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장편 <야훼의 밤>을 비롯하여 우리들의 성장기, 근현대 사회상, 신앙추구 등을 소설로 담아냈고, 유일한, 한경직, 윤치호의 생애를 새롭게 그려낸 평전과 창작집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했다. 또한 <카를 융 자서전>을 비롯한 번역서들을 출간하였으며 시대 문제와 관련하여 성서를 해석한 신학서적들을 집필하기도 했다. 2013년에는 헌법 에세이 『헌법의 아홉 기둥』을 선보이는 등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후학을 가르치는 일과 신앙 공동체를 섬기는 사역에도 묵묵히 헌신하고 있다.

趙 동문은 "법조계가 아닌 다소 엉뚱한 길을 걸어왔지만 제26회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  상을 통해 법대가 제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앞으로 이 사회를 위해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 새롭게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창회, "수상자 프로필", <낙산회보> 제106호, 2018.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