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 People

Holiness

[QT] 우리는 모두 카인의 후예?

Onepark 2022. 10. 25. 22:40

아주 오래 전에 강남대 박종수 교수의 "카인과 아벨" 설교 메시지를 듣고 메모장에 적어 놓은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선 생각에 잠겼다. 1년 열심히 일하고 나서 하늘에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 받아주시는 걸 보고 분개한 카인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

온누리교회에서 도입하여 크리스천들 사이에 널리 보급된 QT(Quiet Time)를 해보기로 했다. QT는 10~15절 분량의 성경 구절을 여러 번 읽고 묵상한 다음 자신에게 그 말씀을 적용해 보고 그 사례를 다른 사람과 나누는 식으로 진행된다.

 

* 아벨과 카인의 제물 봉헌. 겐트 성당의 제단화 (1415-29)

창세기 4: 3 - 15

세월이 흐른 후 가인은 땅에서 난 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가져오고 아벨은 자기 양 떼의 첫 새끼들과 양 떼의 기름을 제물로 가져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인정하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화가 났느냐? 왜 고개를 떨구었느냐? 만약 네가 옳다면 어째서 얼굴을 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옳지 않다면 죄가 문 앞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하니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말해 그들이 들에 나가 있을 때 가인이 일어나 그의 동생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이 말했습니다. “모릅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네 동생의 피가 땅에서 내게 울부짖고 있다. 이제 너는 입을 벌려 네 동생의 피를 받은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네가 땅을 일궈도 다시는 땅이 네게 그 결실을 내주지 않을 것이며 너는 땅으로부터 도망해 떠도는 사람이 될 것이다.”

가인이 여호와께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제 벌이 너무 무거워 견디기 어렵습니다. 오늘 주께서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셔서 주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됐기 때문에 제가 이 땅에서 도망해 떠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저를 죽이려 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 가인을 죽이는 사람은 일곱 배로 복수를 당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한 표를 주셔서 누구를 만나든 그가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 질투심에 아벨을 죽이는 카인. 겐트 성당의 제단화 (1415-29)

설교 메시지

1. 이브의 득남

 

창세기의 "선악과와 실낙원" 이야기(창 2:4b-3:24)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반면, 창세기 4장은 하와(이브)의 환호로 시작된다. 하와는 죄의 대가인 잉태의 고통을 경험하지만 그 고통을 그새 잊어버린 듯 카인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4:1)고 소리질러 기뻐하고 있다. 창세기 3장의 타락 이야기는 인간의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한계성, 즉 죄를 질 수도 있는 불완전성에 근거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된 그 시점에서부터 불완전한 존재인 것이다.

 

창조 이야기를 전한 히브리인들은 인간적 한계를 인식하면서 자신들이 겪는 삶의 고통을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로 이해한다. 동시에 그 심판의 고통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시이기도 하다. 해산의 고통이 더해짐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유지되며, 그들의 역사와 공동체가 형성된다. 아무도 해산의 아픔으로 인해 역사의 단절을 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에 있어야 할 수고와 고통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흔히 우리들의 기도가 만사형통을 부르짖지만 정말 이 일이 이루어진다면 神이 설 땅이 없어지고 말 것이며 인간은 더 이상 신께 부르짖지도 아니할 것이다. 비록 이 고통이 인간의 죄악성과 불완전성으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할지라도 그 고통은 인간에게 삶의 소망과 인간의 한계성을 일깨워 준다.

 

이러한 고통, 즉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 속에 있는 실존적인 인간의 고통은 하와에게 있어서 하나님 찬양으로 연결된다. 히브리어 '카나'(얻다, 창조하다)에서 유래한 카인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로 이해된다. 오직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이 생명의 고귀함과 신비스러움 앞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 외에는 아무것도할 수 없다. 그 속에서 인간의 실존적인 고통은 삶의 활력소로 승화된다. 그러나 이브가 카인을 낳고 기뻐한 것도 한 순간이다. 인류 최초의 형제로 인정받는 카인과 아벨은 커가면서 갈등을 겪게 되고 이 갈등은 형제간의 살인사건으로 발전한다.

 

황순원은 『카인의 후예』라는 책을 써서 인간이 어느 정도 惡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의 삶을 그린 이 소설은 토지개혁(土地改革)으로 인한 인간적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지주(地主)의 아들 박 훈을 소작인의 딸 오작녀가 헌신적으로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신분의 벽은 그들을 하나되게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평생의 의리도 헌신짝처럼 버려야 했으며,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치 않고 앞장서야만 했다. 한민족(韓民族)의 암울했던 시대적 비운을 직시하면서 작가 황순원은 우리에게서 "카인의 후예됨"을 본 것 같다.

 

2. 카인과 아벨의 갈등

 

창세기 4장에 소개되고 있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사행위에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려진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고, 땅의 소산으로 바쳐진 카인의 제물은 열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성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연유로 카인이 바친 제물을 받지 않았느냐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다. 혹자는 양의 첫 새끼를 바친 아벨의 희생제사가 카인이 바친 곡식제물[素祭]보다 더 잘 하나님께 열납된 것으로 이해한다. 또 어떤 이들은 카인과 아벨의 갈등을 농부들과 유목민과의 대립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레위기 2장 1절 이하의 기록은 소제는 번제(燔祭)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제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음을 보여준다. 결국 희생제물과 곡식제물사이의 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누구의 제사행위가 옳았느냐를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자기가 바친 제물이 열납되지 못하자 이것을 본 카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한다. 한번 생각해보자. 만일 카인 혼자서 야훼께 제사를 지내는 도중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았다면 그가 그렇게도 분개(憤慨)했을까? 그곳에 자기 혼자만 있었다면 카인은 야훼께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이유를 물어본다든지 다시 제물을 바쳤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자기옆에 아우 아벨이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제물은 열납되지 않고 아우의 제물이 열납된 사실 앞에서 카인은 이성을 잃고 동생을 죽이는 끔직한 일을 저지르고 만다.

 

달리 생각해 보자. 만일 카인과 아벨의 제물이 동시에 열납되지 않았다면 카인이 아벨을 죽이려 했을까? 두 사람의 제물이 모두 열납되지 않았다면, 카인은 동생 아벨을 위로하면서, "아우야, 우리가 바친 제물이 어찌하여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단 말이냐?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죄를 저질렀을까? 자 이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 한번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자"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생의 제물이 열납되고 그의 입지가 강화된 것을 본 카인은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급기야는 살인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카인은 유리하는 방랑자가 되고 인류최초의 아담과 이브의 가정은 파탄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통해 바람직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다. 우리는 운명론적인 공동체 삶을 영위하고 있다. 우리는 혼자서는 살 수 없으며, 한민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공존공생하고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신 이후에 이브를 만들어서 아담과 이브가 함께 살도록 한 것 아닌가? 함께 산다고 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상대방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것이 항상 최고여야하며, 자기의 주장만이 완전 무결하며, 자기 자식이 항상 남의 자식보다 우월하며, 자신의 신앙이 다른 사람의 그것보다 항상 거룩하다는 생각들은 인간을 시기와 질투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3. 맺음말

 

카인은 아마도 자신이 바친 제물이 최상의 것이며 당연히 열납되리라고 믿었음이 틀림없다. 우리 역시 우리가 바친 제물(헌금)이 하나님에 의해 거절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제물의 열납 여부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그 결과에 놓고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다. 오직 신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제물을 바칠 뿐이다. 카인이 보여준 철저한 자기 중심주의는 인간을 죄악의 구렁텅이로 빠트리고야 만다. 그러기에 야고보 사도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라는 표현으로 인간의 이기적 욕심을 경계하고 있지 않는가?

 

카인은 아마도 자신이 바친 제물이 최상의 것이며 당연히 열납되리라고 믿었음이 틀림없다. 우리 역시 우리가 바친 제물(헌금)이 하나님에 의해 거절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제물의 열납 여부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그 결과에 놓고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다. 오직 신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제물을 바칠 뿐이다. 카인이 보여준 철저한 자기 중심주의는 인간을 죄악의 구렁텅이로 빠트리고야 만다. 그러기에 야고보 사도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라는 표현으로 인간의 이기적 욕심을 경계하고 있지 않는가?

 

헤르만 헤세의 경우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보자마자 그의 이마에서 ‘카인의 표지’를 보았다. 그리고 그 표적대로 싱클레어는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는 분명히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된다.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길과 가야할 길에 대한 시도와 암시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뇌하며 진정한 자신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일반의 ‘아벨’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카인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어.
우리가 배우는 대부분이 분명 완벽한 진실이고 정의인 명제들이지만, 이 모두를 선생님들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볼 수도 있는 거야. 다른 관점에서 볼 때 대개 더 나은 가치를 갖게 돼.
사람들은 카인의 자손들이 무서웠던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그 표적을 원래대로 우월한 훈장처럼 설명하지 않고 반대로 설명한 거야. 용기와 개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니까. 자신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것에 대한 반감으로 주홍 글씨 같은 낙인과 소문을 만들어서 퍼뜨린 거지.

 

In My Opinion

요즘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입만 열었다 하면 '국민을 위하여'라고 하지만 천연덕스럽게 거짓말(≒ 위선/僞善)을 늘어놓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것이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하기 일쑤이다. SNS로 전해지는 정치권 소식을 보면 십중팔구 검증되지 않은 페이크 뉴스인 경우도 많다.

 

왜 이처럼 우리는 거짓말을 밥 먹듯하고 사는가? 성경을 읽다보니 창세기 초반부터 거짓말장이가 등장하는 것을 알았다.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도 남 탓을 하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물려받은 것도 있지만, 우리는 질투심에 동생 아벨을 죽이고도 하나님의 추궁에 "모른다"고 대답한 카인의 후예(後裔)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물을 열납하고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인데 카인은 그것을 자기의 기준과 잣대만으로 판단하고 분개했다. 여기에는 이러한 인간의 죄를 어린양의 피로 속죄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깃들어 있음에도 이를 이해하지 못한 카인의 잘못이 컸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탈출한 후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십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다. 

특히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제9계명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제10계명이 이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려고 또는 자기의 잘못을 덮기 위해, 경제적 이익을 바라거나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해서 등 모두가 욕심(欲心)과 탐심(貪心)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