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6일 주일날 양재 온누리교회 2부 예배 때 이상준 목사가 설교를 하였다.
통상 주일날 양재 온누리교회의 2부 예배 설교는 이재훈 담임목사가 맡고 CGNTV와 다른 온누리교회에서는 영상으로 중계한다. 이 날은 11월 3일 일본 미야자키에서 이재훈 담임목사가 러브 소나타 집회를 인도하였음에도 휴식을 취하지 않고 직접 서빙고 온누리교회에서 1~4부 설교를 하셨다. 대신 양재 온누리에서는 이상준 목사가 설교를 맡았다. 양재 온누리를 담당하고 있는 이상준 목사가 조만간 온누리교회를 떠나 새로 교회를 개척한다고 알려졌기에 우리는 무슨 공지가 있나 하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이상준 목사의 신상 발언은 없었고, 일본 미야자키 러브 소나타[1] 행사 보고에 이어 올들어 진행 중인 로마서 강해설교를 계속하셨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지난 주에 이어 로마서 9장 19절에서 33절까지였다. 사도 바울은 예레미아 18장에 나오는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들어 토기장이 하나님이 당신의 뜻에 따라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만드셨다고 했는데 이는 기독교 핵심교리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비유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누구는 귀한 그릇, 누구는 함부로 쓰는 그릇으로 만드실 수 있다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면 이러한 해석은 자칫 "난 어쩔 수 없어" 하는 운명론적인 체념으로 끝날 우려가 있다. 이상준 목사는 로마서 강해를 통해 선택권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설교 중에 강조하셨기에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생각해보면 요즘 젊은 세대는 돈을 주고 자기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option)라는 개념에 매우 익숙하다. 새 차를 구입할 때 자동변속기나 파워핸들 같이 선택사양인 옵션을 택하고 추가비용을 내지 않는가! 새 직장을 구할 때에도 스톡 옵션(stock option)을 주는 회사를 찾아 다니며, 파생금융상품을 거래할 때에는 콜 옵션, 풋 옵션을 골라 사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요컨대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선택권이란 없다는 걸 잘 안다.
본문 말씀
그대는 내게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여전히 책망하시는 것입니까?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하겠습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말대답을 한단 말입니까? 지음을 받은 것이 지은 자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라고 대들 수 있겠습니까?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를 가지고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다른 하나는 막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진노를 보이시고 능력을 알리시고자 멸망받도록 예비된 진노의 그릇에 대해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에 대해 그분의 영광이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면 어찌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로 이 그릇으로 부르셨으니, 곧 유대 사람 가운데서뿐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도 부르셨습니다.
세아서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받지 못한 자를 사랑받는 자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그들에게 말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도 이스라엘에 대해 부르짖기를 “비록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알 같을지라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받을 것이다.
주께서 그 말씀하신 것을 땅 위에서 온전하고 신속히 이루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하기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소돔같이 되고 고모라같이 됐을 것이다” 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 사람이 의, 곧 믿음으로 인한 의를 얻었으나 의의 율법을 따르던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로 의를 얻는 것처럼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기록되기를 “보라, 내가 시온에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두리니 그를 믿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9:19-33.
이상준 목사는 "도대체 왜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책망하고 계시는가?"라는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율법을 위반하면 징계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속도위반을 한 운전자가 잘못한 것은 교통딱지를 뗀 게 아니라 교통법규를 위반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여 죄를 범한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일이지 하나님이 인간이 죄를 범하게끔 악을 조장하신 게 아니란 점이다.
하나님은 단지 惡을 허용하셨을 뿐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자칫 인간이 실족할 수 있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허용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참사랑은 그러한 위험을 부담하고도 그가 선택하여 이루어가도록 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선악과가 열리는 나무는 인간이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의 대상으로 에덴 동산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惡을 선택한 결과로 세상에 罪가 넘치고 망가진 것이지 하나님에게는 책임이 없다. 하나님은 온전한 인격적인 사랑을 받기를 원하셨을 뿐이다. 이것은 선택권의 대가로서 충분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이 대목에서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셨는가?"하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따지는 사람이 있다.
우리도 부모를 원망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철이 없고 미숙할 때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독생자조차 십자가 위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신 분이었다. 이러한 우리의 원망을 받아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앞에 놓고서 어떤 그릇을 만들지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그릇 하나는 진노의 그릇으로 다른 하나는 긍휼의 그릇으로 만드셨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는 선택권을 잘못 행사했던 여러 사람이 등장한다.
하나님은 제물(祭物)을 둘러싸고 동생을 시기한 카인이 아벨을 살해했음에도 그를 지켜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부리고 핍박했던 애굽왕 바로에게도 여러 번의 반성할 기회를 주셨다.
가룟 유다가 스승을 배반할 것임을 아셨음에도 예수는 그를 제자로 받아주셨다. 그가 마음을 바로잡고 돌이킬 기회를 주시고자 善과 惡을 동시에 허용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이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善하시다는 증거가 된다. 선택의 시간에 참고 기다려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긍휼(mercy)의 그릇은 영광의 풍성함을 나타내준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원주민을 진멸하도록 명하신 것은 하나님이 잔인해서가 아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인신공양과 성적 타락이 극에 달한 원주민들에게 자칫 동화될까 염려되어 그들과 아예 접촉하지 않도록 하신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면 그들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경고(warning)하시는 의미도 있었다.
하나님은 공정(fair)하신 분이어서 책임도 함께 부과하신다.
죄악이 가득한 땅에서 거룩함을 이루라는 사명을 부여하신 것은 '선민(選民)'이라는 자부심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 들지 말고 매 순간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라는 선택의 의미를 강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호세아가 자격이 없음에도 그를 사랑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그들을 자녀로 삼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예수의 복음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결과 우리도 하나님께 호소하면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새롭게 정의(redefine)된 것이다.
이사야서에서는 '남은 자'를 구원해주신다고 하였다. 이스라엘의 혈통이 사도 바울에 의해 '믿음'으로 바뀌었다.
모두가 사랑을 거부하는 시대에 이것은 우리 크리스천의 특권이자 사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은 소수(Minority)에 속한다. 밋밋한 음식도 약간의 소금을 넣음으로써 맛을 낼 수 있다. 작은 촛불 한 자루로 어두운 방을 밝히지 않는가! 이 혼탁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라는 창의적 소수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비록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지라도 교회를 대표하여 비난을 감수하고 그들에게 사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함으로써 복음에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구원의 반석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상준 목사는 오늘의 로마서 강해설교를 마쳤다.
Post Script
이상준 목사는 2022. 12. 11 양재 온누리 주일 2부와 3부에서 공식적으로 이임인사를 하였다(양재 온누리 담당 후임은 강부호 목사).
새로 개척할 교회는 분당 판교 지역에 소재하며, 사도행전의 말씀에 따라 '1516교회'로 이름을 붙였다[2]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하여 수많은 소형교회들이 문을 닫았고 무엇보다도 젊은 세대가 교회를 떠난 것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한국의 실리콘 밸리로 알려진 이곳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함을 밝혔다.
Note
1] 러브 소나타는 일본에 한류 열풍을 지핀 드라마 "겨울 소나타"에서 힌트를 얻어 'Revival Japan'이란 슬로건 하에 진행되고 있다. 온누리교회의 故 하용조 목사가 일본 복음화를 위한 "문화전도 집회"로 시작한 러브 소나타는 전면에 복음전도를 내세우진 않아도 문화전도라는 컨셉으로 현지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일본인들의 범신론적 사고와 에도 막부 시대의 혹독한 기독교박해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어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러브 소나타가 주요 도시를 순회하면서 지속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일본에 새로운 부흥의 불을 타오를 것으로 기대된다. 집회를 통해 결신한 사람들을 일본 현지교회와 연결시키며, 한국과 일본 교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목회 콘텐츠를 공유하는 데 의의를 두고 있다. 러브 소나타 홈페이지 참조.
2] 사도행전 15: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After this I will return and rebuild David's fallen tent. Its ruins I will rebuild, and I will restor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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