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아내와 같은 직장에 일했던 인연으로 해마다 방문하는 천세균 목사의 김포 새소망교회를 찾아갔다. 작년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성탄예배에 참석했는데 이번에는 추수감사절 한 주 전인 11월 13일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다.
김포는 갈 때마다 임립(林立)해 있는 아파트 단지를 보고 놀라곤 한다. 이번 방문은 새소망교회가 조금 넓은 운양동 핵심상가 6층으로 이전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도 있었다.
새소망교회 주일예배의 성경 말씀은 창세기 19:1~23으로 설교 제목은 "소돔에서 소알로"였다.
롯이 삼촌 아브라함과 동행하다가 훨씬 살기 좋고 번성해 보이는 소돔 쪽을 택하였으나 타락한 소돔성이 유황불로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 동안 구약성경의 창세기는 여러 설화(說話)들로 구성돼 있다고 보고 이야기 책을 대하듯 했다. 야곱의 이야기는 어떤 소설책보다 재미있고 교훈적인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날 천세균 목사의 강해설교를 듣고 난 후에는 마치 하나님이 감춰놓으신 퍼즐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 답을 얻기 위해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하듯 읽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마치 가벼운 산책 길에 나섰다가 경치에 취해 발길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산봉우리에 오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천세균 목사는 "소돔이 멸망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것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열(10)"은 히브리어로 '작다', '겨자씨 같다'는 뜻으로 성경에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한다"라고 말했다. 정말 "적은 수의 의인이 없으면 그렇게 번창하던 도시도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구나!" 조그만 깨달음이 왔다. YouTube에서 새소망교회 주일예배 동영상을 찾아봐도 되지만, 이하 설교 메시지를 최대한 간추려 마치 퍼즐 푸는 것 같은 창세기 소돔성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소돔성이 멸망 당한 이유는 다음 네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소돔 주민들이 떼로 몰려와 롯을 찾아온 잘생긴 두 사람과 관계를 갖겠다고 요구했다. 영어 'sodomite'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한 것처럼 동성애(男色) 같은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
어느 목사는 9:13의 '그들에 대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은 것'이 동성애가 아니라 잘사는 자가 없는 자를 핍박하고 고아나 과부를 멸시하는 것을 호소한 것이라고 풀이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 후서 2:7에서 의로운 사람 롯이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것에서 건지셨다고 했기 때문이다.
계시록 18:1~4에서도 지적했듯이 바벨론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인 곳이었다. 우상숭배와 음란이 성행하는 오늘날의 대도시가 그러하다. 애굽과 소돔처럼 심판 받고 멸망 당할 세상이므로 여호와의 백성은 이러한 곳에서 속히 빠져나와 재앙을 피해야 한다. 히브리어로 여호와 철자를 잘못 쓰면 '소(牛)'가 되는데 모세가 여호와에게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히브리 백성은 저희들끼리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에 절을 했던 것이다.
둘째, 거짓 영(사탄), 짐승 같은 세상의 지도자, 거짓 선지자의 더러운 영에 빠질 때 소돔성 같은 재앙을 피할 수 없다.
이들은 한결 같이 복된 소식을 전한다고 하지만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복음을 왜곡해 전달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진실이 아닌 가짜 뉴스(fake news)를 만들어 퍼뜨리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셋째, 위급한 진실의 소식을 듣고도 늑장부리고 피하지 않는 것도 멸망의 이유가 된다.
롯은 두 딸과 정혼한 예비 사위들에게 위급한 소식을 전하고 함께 떠나자가 말했으나 그들은 콧방귀를 뀌고 롯을 비웃었다. 롯도 미적거리고 있었는데 천사들이 유황불이 내리기 직전에 그들을 성밖으로 옮겼다. 구원의 말씀을 새겨 듣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넷째, 도망칠 때 들에 머물지 말고 뒤돌아보지도 말고 산으로 피해야 함에도 이를 어기면 멸망 당하게 된다.
종말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에도 똑 같은 일이 벌어졌다. 뒤돌아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출애굽 도상에서 히브리 백성들은 식량이 떨어지자 처음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감사히 여기고 먹었으나 나중에는 만나를 지겨워하며 애굽 노예시절에 먹었던 음식을 그리워했다. 예수를 믿기로 한 초보 기독교인이 답답한 현실에 처하여 "예수 안 믿을 때만도 못해" 불평불만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가복음 17:28 이하에도 똑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롯의 때와 같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고 살다가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멸망 당하고 만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7:33의 말씀대로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고 하신 것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잃는다는 것은 죄의 본성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어 영생을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서 즐겼던 삶을 동경하는 것은 롯의 처와 같이 뒤돌아보는 것이다.
같은 17:34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을 때 한 사람은 데려가시고 또 한 사람은 내버려두실 터인데 이 구절을 예수 재림 시의 '휴거'라 여기면 안된다. 말 그대로 깨달음을 얻고 영생을 얻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롯을 닮은 사람이 되어 하늘의 재앙을 피할 수 있는가?
우선 소알 같은 작은 성으로 도피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롯이 소돔성 성문 앞에 앉아 있다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 두 천사에게 자기 집에서 묵고 갈 것을 간청했다. 그리고 저녁식사로 대접한 것은 누룩없이 구운 무교병이었다. 무교병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쓴나물과 함께 급히 먹었던 음식이다. 롯이 천사들과 함께 무교병을 먹고 밤에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져 성밖으로 탈출하는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방불케 한다.
그 전에 두 천사가 아브라함을 방문했을 때 먹은 것은 맛있는 빵과 송아지 고기, 엉긴 우유(yogurt) 같은 잔치음식이었다. 아브라함은 척박한 땅을 일구어 복토로 만들었다. 반면 롯은 번성한 소돔성을 찾아 갔으나 그곳은 재앙이 임할 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누룩(효모, yeast)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빵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단맛을 내는 것처럼 복음이 좋은 결실을 맺는 것의 비유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16:6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기보다 사람의 생각을 덧붙이고 장로들의 유전으로 왜곡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철학, 인문학,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로 복음을 해석하면 번드르르 해보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배격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창세기 19:16에서 롯이 지체하자 두 천사가 롯의 가족을 성밖으로 이끌어 냈다고 했다.
여기서 재앙을 피하는 것은 여호와가 은혜와 자비를 베푸셔서 그리된 것이지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성밖으로 나가기만 해선 안되고 산으로 도망쳐야 한다.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에서 성도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곳은 산이다. 높은 곳에 자리잡은 새 예루살렘 성이다.
그런데 그 성은 크고 번창한 곳이 아니라 얼핏 보기에 실망스럽게 작은 소알이란 곳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민수기 35:14에서는 여섯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했는데 비록 살인한 자도 그곳으로 도피하면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도피성을 떠나면 죽임을 당한다. 도피성의 레위 사람에게 몸을 의탁하면 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를 지은 사람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와 연합하면 죄사함을 받는다. 그런즉 예수를 떠나면 심판을 받게 됨을 알아야 한다.
또 도피성에 들어간 사람도 대제사장이 죽으면 성을 나가서도 살 수 있었다. 여기서 대제사장은 예수이고 대제사장이 죽은 것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대속이다. 이것을 믿으면 우리도 죽음의 위협에서 자유로워지고 생명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흠없는 어린양을 성전에 바치고 죄사함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소망인 것이다.
도피성에 들어간다는 것은 행동의 제약을 감수하는 것이기에 신체의 장애를 입고 불구가 되는 것과 같다. 창세기에서 불구가 됨으로써 죽음의 위협을 피한 사람이 있었다. 형을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이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사병을 거느리고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에서의 보복을 두려워 했다. 그런데 얍복강을 건너갈 때 밤새 천사와 씨름을 하다가 야곱은 환도뼈를 다치고 말았다. 절뚝거리며 형 에서 앞으로 나아간 야곱은 형으로부터 복수가 아닌 환대를 받았다.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으며 야곱은 살아있음을 만끽할 수 있었다.
말라기 4:2에서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할 때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여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놀 것이라 했다. 흔히들 병자를 안찰하며 "치료의 광선이 나와서 병고침을 받으라" 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데 본래의 의미는 공의로운 해가 솟아서 어둡던 세상이 환해지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라는 말씀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니 정죄함에서 벗어나 죄의 종노릇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정죄함을 받지 않고 중생(重生)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 세상과 과거의 영화를 뒤돌아보거나 지체하지 말고 복음을 농담처럼 여겨서도 안된다.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 그 빛을 받았으니 성도들은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거듭난 자로서 살아야 한다.
첫번째 죽음으로 육신이 세상을 떠날 때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의 영혼이 두번째 사망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천세균 목사의 설교를 몰입해서 듣는 동안 창세기의 소돔성 이야기 중에도 신ㆍ구약의 모든 메시지가 집약되어 있다는 분석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창세기를 쓴 이가 누구이던가? 학살 위기에 처한 히브리 남자아이였지만 갈대상자에 담겨 나일강을 둥둥 떠내려 가다가 애굽 공주의 눈에 띄어 그의 양자가 되어 애굽 왕의 왕자와 함께 최고의 제왕학(帝王學) 교육을 받은 모세였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하나님을 직접 뵈올 수 있었고 입법과 행정, 사법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는 데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마치 수수께끼처럼 그가 전하는 기록 속에 남겨 두었던 것이다.
소돔 성문 앞에 앉아 있던 롯은 무슨 의도에서 두 천사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고 무교병을 대접하였을까? 출애굽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었음에도 그 땅에 임할 여호와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주고 있다.
남자들이 서로 상관하는 것, 피난을 지체하는 것은 절대로 해선 안될 일이다. 도피할 때는 뒤돌아보지 말고 작은 곳 산으로 도망쳐야 하며 만일 장애를 입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중생을 얻을 수 있다는 귀한 말씀을 배울 수 있었다.
이날 개인적으로 얼마나 감동을 느꼈는지 김포를 떠날 때 고가도로 교량의 케이블 기둥이 마치 천국으로 가는 배의 돛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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