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 입추가 지났어도 비도 많이 오고 아직 덥네요. 오늘 들려주실 책 이야기는 피서용인가요, 아니면 가을맞이용인가요?
P : 며칠 후면 광복절이므로 오늘은 아주 특이한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잡지책에서 읽은 기사입니다.
G : 지난번 파리 특파원 이야기도 흥미로웠습니다. 신문기사도 뒷이야기를 보태고 출처를 밝히면 저술이 될 수 있는거죠. 누구에 관한 이야기인지 궁금합니다.
P :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Tōgō Shigenori, 1882-1950)라고 태평양전쟁 때 일본 외상을 지낸 사람입니다. 독일대사, 소련대사를 거쳐 태평양전쟁 개전(진주만 공격)과 패전 당시 두 차례 외상을 역임하였고, A급 전범(戰犯)으로 20년 금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병사했어요. 일본에 원폭이 투하되고 나라가 존망 위기에 처했을 때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조건 항복을 주장했지요. 한국일보 도쿄 특파원을 역임한 문창재 기자가 그의 배경을 알게 된 후 그에 관한 문헌을 조사하고 그의 기념관이 있는 고향의 생가까지 여러 차례 찾아간 내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출처: 문창재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 "일본을 구한 조선 도공의 후예 박무덕", [정유재란 격전지를 찾아서] BRAVO My Life, 2018.1.25.
도고 시게노리가 조선 도공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0년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외상으로서, 전쟁 회피와 종전 교섭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이 조선인 후예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름은 박무덕(朴茂德). 조선인 피를 받은 그가 어떻게 그런 높은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걸까?
의문을 풀기 위해 애썼지만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철저한 일본인으로 살았던 우수한 관료였다. 그러나 그가 외무성 관료로 활동한 시기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극심했던 시절이어서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찰로 악명 높았던 일제 경찰이 까다로운 외교관 임용 신원조사를 왜 그토록 허술하게 했을까. 이것이 제일 큰 의문이었다. 그의 출신지와 가계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조선 도공의 후예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일본 제국의 마지막 각료로 패전을 맞을 때까지 그에게는 ‘조선인 후예’라는 천형 같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조선인 피를 가진 사람이 대신이 되어 폐하를 모시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가 두 번째로 외상이 되었을 때 이 같은 괴문서가 정부와 시가지에 뿌려진 일이 있었다. 극우세력이 저지른 일이었다. 군 내부에 동조 세력이 나타나 술렁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옥에 갇히게 되자 사람들은 더 흥분했다. 그의 고향 가고시마(鹿兒島) 현 미야마(美山) 옛집에 돌팔매까지 했다.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이 떨어졌을 때 ‘전범이므로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을 민족 절멸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사람’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의 옛집에 세운 공덕비 비문에는 “종전(終戰)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국민을 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일본 관방장관 사코미즈 히사쓰네(迫水久常)가 썼다. 그 뒤 그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들어섰고, 그를 연구하는 모임까지 생겨났다. 이러한 현실은 시대 조류의 급격한 역류를 의미하고 있다.
G :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미주리 호 함상에 지팡이를 짚고 간 일본 대표(시게미쓰 마모루 외상, 밑에 조인식 사진)는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다리를 크게 다쳤다는 말은 들었어요.
P : 기사든 논문이든 어떤 주제에 꽂혀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단서를 찾게 됩니다. 문 특파원 역시 도고 시게노리에 관한 이야기를 도예가 ‘14대 심수관’(심혜길/沈惠吉)으로부터 들었다고 해요. 1990년 7월 미야마에 있는 그의 가마를 찾아갔을 때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옛 이름으로 유명한 ‘사쓰마 야키(薩摩燒)’ 발상지에 관한 인터뷰를 하였답니다.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 심수관의 14대 후손이 특파원에게 자기 고향 자랑을 하면서 ‘도고 센빠이(선배)’가 또 있다고 말했답니다.
외무성 관료가 되어 금의환향한 도고 시게노리가 사쓰마에 있는 모교를 찾았을 때 “심수관이 누구냐?”고 물었다. 심수관이 손을 들고 나가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도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을 입구에 “거짓말하지 말라, 지지 말라, 약한 자를 괴롭히지 말라, 도고 선배를 본받자”는 내용이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었던 때라 그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가 평생을 고향 선배 시게노리 현창(顯彰) 사업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은 그가 발의해 사업 추진까지 도맡았다.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의 도자기 작품을 수집해 미술관에 기증한 사람도 그였다. 시게노리의 아버지가 뛰어난 도공이자 유능한 사업가였다는 사실도 세상에 알렸다.
시게노리는 1882년 나에시로가와 심수관의 이웃집에서 박수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수승은 세상을 읽는 눈이 뛰어난 사업가였다. 메이지 정부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로 사족(士族) 신분을 박탈당하고 관요(官窯)가 폐지되어 나에시로가와 도공 마을에 찬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각자도생의 길을 헤쳐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역경이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도쿄와 요코하마를 무대로 외국인들에게 도자기를 팔고 수출하는 사업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재력을 바탕으로 가고시마 시내로 이주하여, 명문 도고(東鄕) 가문의 족보를 사들여 도고 성(姓)을 취득한 그는 당당한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1] 이때부터 박수승은 ‘도고 주카쓰(東鄕壽勝)가 되었고, 네 살배기 무덕은 ‘시게노리(茂德)’가 되었다. 시게노리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였다. 사족(士族) 가문 성을 가진 데다 뛰어난 두뇌와 아버지의 재력 덕에 사족 출신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교 가고시마 제일중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족 출신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폐번치현 이후 나에시로가와는 ‘옹기마을’로 불리며 급속히 ‘천민부락’으로 전락했다. 그가 옹기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급우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사족 대접을 받았겠는가.
대접은커녕 ‘가짜 사족’ 놀림까지 받았다. 도고 시게노리 기념사업회가 펴낸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그는 입학 후 점점 말없는 소년이 되어갔다. 사정을 알아주는 친구 하나를 제외하고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그는 무섭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영어사전의 단어를 다 외우고 그 페이지를 찢어 씹어 삼켰다는 일화는 가고시마의 전설이 되었다.
손자 도고 시게히코(東鄕茂彦)가 쓴 ‘할아버지 도고 시게노리의 생애’에 나오는 일화는 그의 치밀하고 느긋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소학교 시절 하굣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친구들은 다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비를 피하는데 시게노리만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게노리, 뭐하는 거야? 빨리 뛰어와!” 하고 소리쳤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쪽에도 비가 오는걸요.” 그렇게 말하고는 집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1901년 제일중학을 졸업한 뒤 그는 가고시마 7고에 입학한다. 문부성 직할 구제(舊制) 고등학교였다. 학교 이름에 번호가 붙었다 해서 ‘넘버 스쿨’로 불리던 일본의 명문고교였다(1고는 도쿄, 2고는 센다이, 3고는 교토, 4고는 가나자와, 5고는 구마모토, 6고는 오카야마, 8고는 나고야에 있었다). 그해 개교한 7고에는 각 넘버 스쿨 입시에 낙방한 학생들이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재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투리가 심해 학교 측은 고심 끝에 가고시마 방언과 표준어로 된 두 가지 안내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시게노리는 7고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 문학부 독문학과에 진학한다. 아버지는 법대를 나와 내무성 관리가 되기를 원했지만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던 시게노리는 아버지 염원을 배반했다. 그러나 끝까지 아버지의 소원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졸업 후 외교관 시험에 도전, 3수 끝에 합격의 영광을 얻는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외교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를 의식한 탓도 있지만, 고향 선배 외교관의 영향이 컸다. 독일 문학에 몰입했던 대학교 시절의 이상이었던 ‘동서양 문화의 조화’를 실현할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첫 부임지는 만주였다. ‘펑톈(奉天) 일본국 영사관 영사관보’가 공식 직함이었다. 펑톈은 지금의 선양(瀋陽)이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그는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열차로 만주에 부임했다. 뒷날 발견된 당시의 메모에는 열차로 한반도를 종주하면서 느낀 감회는 한 구절도 없었다. ‘경복궁’과 ‘한강’. 아무 감상 없이 언급한 고유명사만이 조선과 관련한 메모의 전부였다.
아마도 그의 의식을 지배하던 ‘조선 트라우마’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고 부임을 준비하던 무렵,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수모를 겪는다. 결혼을 약속한 도쿄의 명문가 규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해온 것이다. 이유는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출신성분 조사에서 조선 도공의 후예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게 일본 외교가의 정설이다.
그 뒤로 그는 결혼을 포기하고 살다가 37세 노총각 시절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독일인 이혼녀 에디타 라론드와 결혼, 뒤늦게 가정을 이룬다.[2] 그가 트라우마를 가졌다 해서 조선인의 피를 부끄럽게 여긴 흔적은 없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금의환향했을 때 옥산궁(玉山宮)을 참배한 일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옥산궁이란 나에시로가와에 있는 단군 사당이다. 비록 일본 관복 차림이었지만, 마을 수호신을 찾아 고마움을 표하며 합장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단군의 후예라는 뿌리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외교관 시절의 일화도 있다. 외무성 본부 국장 시절, 퇴근길에 조선인 과장 장철수를 허름한 술집으로 데리고 가 “사실은 내게도 조선인 피가 흐른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게, 인내라는 말을 소중히 하고!” 하면서 동족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G : 일제 시대에 재일 한국인이 국제외교무대에서 일본을 대표했다니 놀랍군요. 마치 고구려 패망 후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인 후손인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당군(唐軍)을 이끌고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서역정벌에 나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방불케 합니다.
P : 그가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해 무슨 견해를 밝혔다거나 그런 기록은 없는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것은 재일 한국인(요즘은 "자이니치(在日)"라고 불림)으로서 그의 신분이 핸디캡으로 작용했음에도 자기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지요. 도공의 후예답게 진귀한 '명품 도자기'같은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독일대사, 소련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거치며 ‘외교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들어온 그는 마침내 외무대신 자리에 오른다. 미국과의 사이에 전운이 감돌던 1941년 대미 교섭 임무를 짊어졌던 첫 외상, 종전 교섭의 사명을 띤 두 번째 외상 직무의 하이라이트는 1945년 8·15 광복 직전의 무조건 항복 결정이었다. 연합국 수뇌들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지만, 전쟁광 집단인 일본 군부는 결사항전 태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덩달아 언론도 연일 군부의 ‘1억 옥쇄론’을 부채질하는 사설을 내보내던 때였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까지 참전한 상황에서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수상을 필두로 한 군부는 미치광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원자폭탄 피해의 심각성을 파악한 시게노리는 천황을 찾아가 전쟁 종결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각료들에게도 같은 주장을 거듭했지만 군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또 하나의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그날부터 일본 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무조건 항복이냐, 결사항전이냐를 앞에 둔 운명의 갈림길에서 시게노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쿠데타설과 암살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종전 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득해나갔다. 군부의 위세에 눌려 입을 닫고 있던 각료들은 13일 각료회의에서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라”는 수상의 요구에 12명은 ‘포츠담선언 수락’ 또는 ‘수상 결정에 위임’, 3명은 반대 의견을 냈다.
14일 어전회의에서 히로히토 천황은 외무대신의 전쟁 종결 의견에 각료 다수가 찬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나는 연합국의 포츠담회담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만주 침략으로 시작된 길고 긴 15년 전쟁의 종결 선언이었다.
전후 시게노리는 연합국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금고형을 선고받고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0년 7월 23일 담당염으로 사망했다.[3] 향년 68세. 도쿄재판 도중 그에게 조선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아사히신문은 “도고는 꼭 외국인이 일본어를 말하는 것 같은 억양으로 진술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보도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에둘러 강조한 것이다. 한 신문은 ‘과거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지역 출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인 출신이라는 낙인이 천형처럼 그의 이마에 찍혀 있었던 셈이다.
G : 참으로 드라마틱한 생애였네요. 변두리 밑바닥에서 일본 주류의 상류사회로 점프했다가 정상에서 추락했다고 할까요.
P : 그렇습니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생애였어요. 변두리 밑바닥에서 일본 주류의 상류사회로 점프했다가 정상에서 추락했다고 할까요. 개인적으로는 일본 사회에서 천대받던 도공의 후손에서 오직 실력 만으로 대외적으로 국가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외무대신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분명히 성공한 케이스였습니다. 이러한 신분이 밝혀져 일본 명문가의 규수에게 파혼을 당했고, 또한 전쟁을 피하려 했음에도 A급 전범으로 처벌 받았으니 억울했을 것입니다.
G : 시게노리에게 자기 조상의 나라는 안중에 없었을지라도 "What if ~?"라 할까요, 만일 그가 군부의 '1억 옥쇄론'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한반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P : 아마도 미군이 일본에 상륙하기 전에 그 병참기지로 쓰였던 한반도의 주요 공업도시와 항구 역시 전화(戰禍)를 면치 못했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틀림없이 일본 군부와 식민지배 당국은 한국인들을 그들의 방패막이 총알받이로 동원했겠지요. 더욱이 소련과 중국에서는 공산세력이 비약적으로 확장되고 있었으므로 한반도는 미국이 신경을 쓰기도 전에 공산화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본다면 시게노리의 역할과 공로는 우리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시게노리가 전쟁포로의 후손으로서 천대받던 고장에서 주류사회의 정상까지 오른 것은 오늘날에도 의미가 큽니다. 요즘 들어 한국인들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Korean diaspora) 미국, 프랑스 등 현지사회에 동화되어 정치인으로 관료로 예술가로 성공한 사례가 종종 보도되고 있지 않나요? 시게노리의 경우에도 사후(死後)에 몇 차례 극적인 반전(反轉)이 있었습니다.
1990년 처음으로 미야마에 갔을 때 시게노리의 생가는 폐가처럼 버려져 있었다. ‘A급 전범’이라는 멍에 탓이었다. 마당에는 잡초가 키 높이로 자라 있었고, 대문에는 각목을 X자로 못 박아놓아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가 일전되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제번영의 격양가 속에 자연스레 ‘민족 절멸의 위기에서 일본을 구출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2010년 남규슈 여행길에 들렀을 때 가 보니 생가 터에 아담한 기념관이 들어서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사코미즈 히사쓰네의 비문이 선명하게 보이는 송덕비, 그 오른편으로는 시게노리의 동상이 서 있다. 기념관 안에는 도쿄대학교 시절 시게노리의 모습과 외상으로 지냈을 때의 초상화, 복역 중일 때 가족과 면회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글과 일본어로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조선 도공을 설명하는 안내서도 걸려 있다. “나에시로가와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끝날 무렵까지 조선의 풍속과 언어가 남겨져 있었다. 조선 도공의 수호신이 된 옥산궁 신사에서는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제사가 행해졌다.” 안내문의 한 줄 내용에 이 마을의 400년 역사가 함축되어 있었다.
도공 박문(朴門)의 업적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는 “박정관이 제작한 백 사쓰마(白薩摩) 도자기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사쓰마 도자기 이름을 유럽까지 알렸다”고 씌어 있다. 안내문에 나오는 박정관(朴正官)은 근세 사쓰마 야키를 일으켜 세운 사람으로 추앙되는 인물로 정유재란 당시 사쓰마에 끌려온 도공들의 리더 박평의(朴平意)의 후손이다. 시게노리의 손자는 할아버지 일대기에 “할아버지 가문이 박평의의 후손이라는 근거는 없지만, 그때 끌려온 도공 가운데 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고, 같은 도공이었다는 점에서 할아버지와 피가 통하는 관계로 본다”고 썼다.
시게노리와 에디트 사이에는 이세(いせ)라는 이름의 딸이 유일한 혈육이다. 시게노리는 외동딸을 자신의 비서관 출신 외교관과 결혼시킨 뒤 사위를 양자로 삼았다. 그는 훗날 주미대사를 역임한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다. 사위 겸 양아들 후미히코와 딸 이세 사이에는 아들 쌍둥이가 있다. 1945년생인 손자 시게히코(東鄕茂彦)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나와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아사히신문 기자를 거쳐 워싱턴포스트로 옮겨 오랜 기간 도쿄 특파원으로 지냈다.
쌍동이 동생 가즈히코(東鄕和彦)는 도쿄대학교를 나와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 외교관이 되었다. 북미국장, 주미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두루 거쳤고 퇴직 후에는 미국, 대만 등지의 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2007년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강의한 적도 있다. 그는 역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외교관으로 유명하다. 현역 시절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등 한일 현안 문제에 관여한 경력이 있으며, 2006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중단을 요구하는 회견으로 일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Note
1] 도고 시게노리, 즉 박무덕의 조상은 사쓰마번 (現 가고시마현)의 나에시로가와(苗代川)에 정착하여 대대로 도자기업에 종사했으며, 조선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에도 막부 말기까지 조선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도자기 천민의 후예로서 모진 삶을 이어왔으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은 도자기를 외국에 수출하는 등 사업가로 성공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신분질서가 어지러워지자 사무라이 집안의 호적을 구입하여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영특한 맏아들 시게노리가 봉건제가 무너진 일본 땅에서 출세할 수 있도록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시게노리는 소학교에 다닐 때 별도로 사숙(私塾) 선생님에게서 논어 등 독서와 개인 지도를 받았다.
시게노리는 그가 법학부를 나와 내무성 관리를 하고 지사(知事)라도 지냈으면 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가 도쿄제국대학의 독문과에 다니는 것을 한동안 집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원래 독문학 교수, 문예평론가,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하숙집에 불이 나 책이 모조리 불 타버리는 바람에 고등문관 시험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가 대학 재학 중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자 아버지 수승은 매우 기뻐하고 마을에서 일주일간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그 후 도자기 천민들이 사는 나에시로가와 마을을 떠나 본적지를 가고시마로 옮겼다. 아들의 출세를 위해 300년 가까이 지켜온 조선 혈통과 완전히 결별한 것이다.
2]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는 30세인 1912년에 비교적 늦게 외교관이 되었다. 그의 진중하고 과묵한 성실성과 독일어 라틴어 영어 중국어에 능통한 어학실력을 인정 받아 심양 총영사관, 스위스 대사관을 거쳐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베를린 주재 일본대사관에서 근무했다. 이때 대사관에서 일하던 독일여인 에디타 데 랄란데(Editha de Lalande, 1887-1967)를 만나 귀국 후 1922년 일본에서 결혼하였다. 그녀는 이혼녀가 아니라 일본과 한국에서 활동했던 독일 건축가와 사별한 미망인이었다. 그녀는 외국은행의 도쿄지점에서 일하는 양부를 따라 15세에 일본에 왔으며 2년 후 조선총독부 기본설계에도 참여했던 16세 연상의 독일인 건축가와 결혼하여 5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9년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베를린으로 돌아와 일본 대사관에서 워킹맘으로 일할 때 시게노리를 만났던 것이다. 사진은 시게노리가 그의 부인 에디트의 첫 결혼에서 얻은 장녀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다.
3] 도고 시게노리(Shigenori Tōgō)는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조건 항복을 주창하여 일본 본토에서의 전쟁참화는 막았음에도 초기에 전쟁을 지원했다는 죄목으로 A급 전범으로 분류되었다. 그는 심혈관 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옥중에서 《시대의 일면》(時代の一面 - 大戦外交の手記) 이라는 회고록을 거의 완성할 즈음 병세가 악화되어 육군병원에 이송됐다가 1950년 7월 23일 담낭염으로 사망했다. 그의 회고록 The Cause of Japan은 서양자 후미히코와 그의 변론을 맡았던 Ben Bruce Blakeney의 공동번역을 거쳐 1952년에 출간되었다. 그는 사후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도조 히데키 등 다른 A급 전범들과 함께 사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Annex
도쿠가와 막부(幕府) 시기 일본 규슈의 사쓰마번(오늘날 가고시마현)의 번주(藩主)로 임진왜란에 참가한 시마즈 요시히로는 명과 조선의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명나라에선 의술을 직접 배웠고 조선에선 도공을 데려갔다. 정유재란 때 전북 남원에서 포로로 잡은 심당길 등 도공 수백명을 사쓰마로 데려가 사무라이로 후하게 대접했다. 조선 옷을 입도록 배려하며 도자기를 만들게 했다.
당시만 해도 1000도 넘는 고열로 도자기를 굽는 기술은 중국과 조선만 보유했다. 그 첨단 기술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야키모노센소(燒物戰爭 · 도자기전쟁)라 부르는 이유다. 그 후엔 스스로 혁신을 거듭했다. 조선 도공의 기술력에 명나라의 세련된 디자인, 일본의 전통 회화를 접목했다. 그 중심에 심당길 가문이 있었다. 심당길의 12대손 심수관(1835~1906)은 도자기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굽는 투조(透彫)기법을 창안했다. 그 기술로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190㎝ 넘는 커다란 화병 한 쌍을 출품해 도자기 사랑에 빠져 있던 유럽인들을 매료시켰다.
심수관은 이렇게 일본 도자기를 완성했다.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13대 자손부터 그의 이름을 계승해 15대에 이르고 있다. 심당길의 아버지 묘가 경기도 김포에 있다는 사실을 최근 알게 된 15대 심수관 심일휘씨가 엊그제 김포의 묘를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 묘의 흙을 일본에 가져가 심당길 묘에도 뿌린다고 한다.
사쓰마는 도자기를 팔아 부유해졌다. 도쿄 앞바다에 나타난 미국 군함의 위용에 감명받아 이번에는 도자기가 아닌 군함 확보에 나섰다. 결국 메이지 유신의 주력이 돼 일본을 근대국가로 탈바꿈시켰다. 그 사이 조선은 일본 식민지가 되고 이른바 ‘왜(倭)자기’가 역수입되며 도자기 종주국 위상마저 잃었다. 기술자에 대한 대우가 만든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15대까지 이어진 심수관 가문의 역사다. 출처: 김태훈, "15대까지 이어진 심수관", [만물상] 조선일보, 202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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