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한 편을 가지고 명상(meditation via a poem)을 할 수 있을까?
좋은 시란 시인이 시상(詩想)을 다듬고 일정한 형식과 운율을 갖추거나 자유로운 스타일로 시를 썼을 때 그것을 독자가 읽고 가슴 뛰는 감흥을 느끼거나 깊은 사색에 빠져들게 한다. 시인의 시상-시(詩)-독자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 편의 시가 출현하는 것이다.
필자가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우리의 아름다운 시를 영어로 옮기는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영어로 번역된 시를 통해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들도 시인의 시상을 뚜렷이 전달받을 수 있어야 한다. 욕심 같아서는 가급적 쉬운 영어로 운율을 살려 옮겨야, 앞서 소개한 "지란지교를 꿈꾸며"나 "불놀이"를 찾아서 읽는 독자들에게 한 것처럼, 한글이든 영어든 똑같은 감동이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시는 설악산의 큰스님(무산, 1932~2018)이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아 시인을 만나고 싶어 했다고 전한다. 가톨릭신자인 신달자 시인은 불교도 모르고 무산 스님이 누군지도 모른다며 사양했으나 어느 동안거(冬安居)[1] 해제 날 설악산 신흥사에서 스님을 뵈었다. 그날 무산 스님은 200명 선승을 앉혀놓고 이 시를 낭송한 후 "여기서 석 달 앉아 수행한 것보다 이 시 한 편에 담긴 수행의 무게가 무겁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2]
큰스님 말씀대로 포장마차에서 도를 깨칠(명상/瞑想) 수도 있겠지만 간만에 만난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답답한 이야기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근심걱정을 덜 수 있을 것이다. 참된 방법은 아닐지라도 이것이 수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느 시인은 이런 식으로 곱창전골집에서 소식이 뜸했던 친구를 만나 송년회(送年會)를 했다고 한다.
저 거리의 암자 - 신달자
Hermitage on That Street by Shin Dal-ja
어둠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3]에는
트럭 한 대 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In the vicinity of the Suseo Station at darkening hours,
there appear several workers getting on the cart bar
to take off one-truck-load of works.
주인과 손님이 함께
출렁출렁 야간 여행을 떠납니다
A host and guests are together
setting sails at night to the unknown world.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된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From night till night, the orange covered carts
load and unload a variety of agonies
filling glasses with sad songs, or sometimes
distributing missed jokes to glasses.
속풀이 국물이 자글자글 냄비에 끓고 있습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The hangover solving soup in a pot is boiling over a fire.
As the street is getting darker and darker,
Guys become full of angers to the utmost, and
swallow their lay-off workplaces and drink their thirsty small rooms.
젓가락으로 집던 산낙지가 꿈틀 상 위에 떨어져
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내지 못합니다
답답한 것이 산 낙지 뿐입니까
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냅니다
A living small octopus gripped with chopsticks fall mistakenly on the table.
It writes some letters by its whole body only to fail to be recognized.
The living octopus is not the last to feel stifling situations.
A woman who unwittingly sold half of her life to fraud is
vomiting cuss words when disgusted while swallowing the whole city.
비워진 소주병이 놓인 프라스틱 작은 상이 휘청거립니다
마음도 다리도 휘청거리는 밤거리에서 조금씩 비워지는
잘 익은 감빛 포장마차는 한 채의 묵묵한 암자입니다
새벽이 오면 포장마차 주인은
밤새 지은 암자를 걷어냅니다
The small plastic table on which empty soju bottles are placed is staggering.
On the night street where minds and legs are staggering, the gradually emptied
ripe-persimmon-colored cart bar must be a speechless hermitage.
When a day breaks, the owner of a cart bar
will dismantle the virtual hermitage built all through the night.
손님이나 주인 모두 하룻밤의 수행이 끝났습니다
잠을 설치며 속을 졸이던 대모산의 조바심도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거리의 암자를 가슴으로 옮기는데
속을 후려치는 하룻밤이 걸렸습니다
Then guests and host finish one night cultivation of mind.
The nearby mountain which was sleeplessly anxious about happenings on streets
begins to sink.
It takes one night with one's mind trembling
for the street hermitage to be transferred to mind.
금강경 한 페이지가 넘어갑니다
They've read through one page of Buddhist scriptures.
좋다! 하룻밤 거리의 암자인 포장마차 안에서 금강경의 '반야바라밀다(金剛般若波羅密多: "올바르고 완전히 깨달은 여래가 될 것입니다"라는 뜻)'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래서 마음을 비웠다면 새로 시작하는 날에는 전과 다른 무엇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도 귀신을 쫓아낸 후에는 거룩한 영으로 빈 곳을 채우지 않으면 더 악한 영이 들어와 괴롭힐 것[4]이라 하셨다.
수행(修行)을 하기로 작정하였다면 무슨 시로 빈 마음을 채우는 게 좋을까?
동서고금에 그 후보가 될 만한 시가 여럿 있거니와, 여기서는 위의 시와 여러 가지로 대조적인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키플링의 "만약에 (If)"[5]를 소개하고자 한다. 적절한 충고를 망라하고 있는 시상도 훌륭하지만 영문으로 읽어보면 기가 막힌 압운(rhyme)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f by Rudyard Kipling
만약에 - 러디어드 키플링
If you can keep your head when all about you
Are losing theirs and blaming it on you,
If you can trust yourself when all men doubt you,
But make allowance for their doubting too;
If you can wait and not be tired by waiting,
Or being lied about, don't deal in lies,
Or being hated, don’t give way to hating,
And yet don't look too good, nor talk too wise:
만약에 주변의 모든 사람이 이성을 잃고
너에게 비난을 떠넘기더라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만약 모든 사람이 너를 의심할 때에도
스스로를 믿고 그들의 의구심을 포용할 수 있다면,
만약 기다리면서도 기다림에 지치지 않고
거짓에 속더라도 거짓말로 속이지 않고,
미움을 받더라도 미움에 무릎 꿇지 않고,
너무 잘 보이려고 하거나, 지나치게 슬기로운 척 말하지 않는다면
If you can dream — and not make dreams your master;
If you can think — and not make thoughts your aim;
If you can meet with Triumph and Disaster
And treat those two impostors just the same;
If you can bear to hear the truth you’ve spoken
Twisted by knaves to make a trap for fools,
Or watch the things you gave your life to, broken,
And stoop and build 'em up with worn-out tools:
만약에 꿈을 꾸면서도 - 그 꿈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면
만약 생각하면서도 - 생각이 너의 목적이 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승리와 좌절을 만난다 해도
두 가지 상대를 똑같이 취급할 수 있다면
네가 말한 진실이 악당들에 의해 왜곡되어
어리석은 자들의 함정이 되는 것을 듣거나,
인생을 걸었던 것이 무너지는 걸 보더라도
일어나서 낡은 연장으로 그것을 다시 세울 수 있다면
If you can make one heap of all your winnings
And risk it on one turn of pitch-and-toss,
And lose, and start again at your beginnings
And never breathe a word about your loss;
If you can force your heart and nerve and sinew
To serve your turn long after they are gone,
And so hold on when there is nothing in you
Except the Will which says to them: 'Hold on!'
만약에 그 동안 얻고 번 모든 것을
단 한 번의 내기에 걸었다가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시작하면서도
잃은 것에 대해 말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있다면
만약 모두들 떠나버린 지 오래여도
온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해 네 일을 완수할 수 있다면,
그래서 "버텨야 해"라고 하는 의지력 외에는
네 안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더라도 버텨낸다면
If you can talk with crowds and keep your virtue,
Or walk with Kings — nor lose the common touch,
If neither foes nor loving friends can hurt you,
If all men count with you, but none too much;
If you can fill the unforgiving minute
With sixty seconds' worth of distance run,
Yours is the Earth and everything thats in it,
And — which is more — you'll be a Man, my son!
만약에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도 너의 덕목을 잃지 않고,
왕과 동행하면서도 상식을 간직할 수 있다면
적도 사랑하는 친구도 너를 해칠 수 없다면
모든 사람들이 너를 존중하지만, 그개 지나치지 않는다면
만약에 지체없이 흘러가는 1분을
60초의 거리를 달려가서 채울 수 있다면
이 세상과 그 속의 모든 것은 너의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너는 참된 사람이 될 것이다. 나의 아들아!
Note
1] 불가에서 동안거(冬安居)란 스님들이 음력 10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 석 달 동안 일정한 도량에 머물며 수도(修道)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하안거(夏安居)는 여름철 즉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진행된다.
2] "저 거리의 암자"라는 시에서 포장마차를 '한 채의 묵묵한 암자'로, 거기서 밤새 술잔 부딪치며 한풀이하는 군상의 풍경을 '하룻밤 수행'이라 표현한 시인의 통찰이, "도(道)는 사는 데 있지 산속에 있지 않다"는 시조시인이기도 한 무산 스님의 철학과 맞닿은 것이었다. 김윤덕, "저 거리의 암자", 아무튼 줌마, 조선일보, 2021. 3. 27.
3] 시인이 왜 하필이면 수서역 부근 길거리의 포장마차를 골랐는지 모른다. 시인이 집에서 가까운 수서역 부근의 포장마차에 들렀다 시상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수서역은 코레일 KTX와 경쟁하는 STX 고속열차가 2016년 말에 운행을 개시한 현대로템 SRT의 서울 출발ㆍ도착 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일대에서는 수많은 인력과 장비가 동원된 대규모 인프라 건설 사업이 진행되었다. 역의 서쪽 방향으로 대모산(293m)이 있고, 역 부근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학승인 탄허(呑虛, 1913~1983)스님 기념박물관이 있다.
4] 예수께서는 그에게 트집을 잡으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몇 사람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자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악한 세대를 꾸짖으셨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가] 쉴 곳을 얻지 못하고 그가 나온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 마음이 완악해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셨던 것이다. 마태복음 28:44-45.
5] 이 시는 1910년에, 인도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정글북」작가로도 유명한, 키플링이 어른이 되는 것에 관하여 12세 된 아들에게 가르쳐주려고 썼다고 한다. 하지만 비록 영화이긴 해도 Mission Impossible - Rogue Nation 에서 영국 수상이 신디케이트 레드북을 여는 암호로서 그의 육성으로 낭송하는 이 시의 첫 세 줄을 설정한 걸 보면 영국인들이 얼마나 애송하는 시인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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