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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새삼 그리운 대광고 시절 (1)

Onepark 2011. 4. 17. 14:36

대광고 동창인 경기대 사학과 조병로 교수가 회갑을 맞아 기념문집을 낸다는 소식을 듣고 불현듯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느 것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또 어느 것은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혹시 본인에게 결례가 될지 몰라 실명이 아닌 이니셜로 처리하여 고교 동기동창의 문집에 기고하기로 했다.

 

조병로 교수는 키가 커서 늘 뒷자리 차지였다. 그는 말할 때마다 매우 거창한 ‘우주적 담론’을 늘어놓곤 했는데, 자연스럽게도 수천 년의 역사를 종횡무진하는 역사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뒷자리의 친구로는 J가 생각난다. 그는 말투나 행동거지에, 영화로 소개된 ‘소령 강재구’ 같이 절도가 있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갈 줄 알았다. 동기 중에 J를 뺀 4명이 육사에 들어갔는데 세 사람이 별을 달았고 또 한 사람은 독일 정치학박사가 되었다.

 

흔히 뒷자리는 강단의 선생님으로부터 떨어진 거리에 비례하여 ‘무법지대’가 되곤 하였다. 수업시간에 다른 책을 보거나 딴전을 부리다가 선생님한테 혼나기 일쑤였다. 대광고는 미션 스쿨임에도 당시 교사들의 학생들에 대한 폭력은 ‘사랑의 매’라는 미명하에 종종 자행되었다. 보통 출석부를 가지고 머리를 내리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매 학기 초에 기강을 바로 세운다고 아무 잘못도 없는 반장을 불러다 따귀를 올리는 L 선생님도 있었다. 어느 영어 선생님은 X가 나올 정도로 때린다 하여 아예 별명이 “손나게 선생”으로 불렸다.

 

* 대광고 채플 시간에 예배를 보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강당

그러다 보니 2학년 때 중간고사를 앞둔 어느 날 폭력교사에 대한 스트라이크를 벌였던 기억이 난다. 그 무렵 대학을 갓 졸업하고 새로 부임한 K 선생님은 명륜동 캠퍼스에서 비원 돌담길을 따라 덕수궁까지 데이트를 하며 걸었다는 솔깃한 낭만적인 이야기는 잠깐뿐이었다. 대입시 출제가능성이 높은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1시간 만에 끝내는 등 성의 없는 강의로 학생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러던 차에 뒷자리의 키 큰 학생들에 대해 K 선생님이 감정이 개입된 폭력을 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때는 범생이 그룹에 속한 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K 선생님을 비난하는 격문을 써서 돌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무릇 스승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실력이 뛰어나야 하고, 학생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지도력이 있어야 하며, 학생들이 절로 존경심이 들 만큼 인격이 훌륭해야 합니다. 그런데 K 선생님은 그러한 3요소를 갖추지 못하고, 오히려 학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니 우리는 그 선생님의 수업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취지였다.

 

우리는 중간고사를 거부하기로 하고 장충공원에 모여 대책을 협의했다. 나는 그때 뒷자리의 키 큰 친구들이 조금도 불량기가 없고, 조숙해서 그렇지, 생각이 매우 건전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때 가까워진 친구 L은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대광고는 매주 채플 시간과 성경 시간이 편성되어 있어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절임에도 학생들의 심성이 온건한 편이었다. 그런 탓으로 생활지도주임과 교감선생님이 우리를 설득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함으로써 시험 보이콧 사태는 별 탈 없이 진정되었다.

 

정신여고까지 나가기로 한 삼선개헌 반대 데모

 

보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9년 가을 박정희 대통령의 삼선개헌에 대한 기습 반대시위를 벌인 일이었다. 우리는 4.19 때에도 대광고 선배들이 고려대생 데모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을 들었기에 운동장에 모여, 적어도 종로5가에 있는 같은 미션스쿨인 ‘정신여고’ 앞까지는 가두진출해야 한다고 전의를 다졌었다. 아침 일찍 기동경찰의 허를 찌르고 동대문 앞까지 달려나갈 수 있었는데, 당시 서울의 주요 교회 학생부는 대광고-정신여고생들이 리드하며 CDCM이라는 모임까지 가질 정도였으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 후 K 선생님은 대광고에 오래오래 근속하셨으며, 영락교회에서 올린 필자의 결혼식 때도 와주셔서 감사하면서도 송구스런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K 선생님과 반대 위치에 서 계신 분으로는 유성덕 선생님이 생각난다. 필자의 1학년 담임이셨던 유성덕 선생님은 6.25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하였을 때 부상을 입어 손과 발이 온전치 않으셨으나 이름(成德)만큼 덕스러우신 분이었다.

 

고1 때 영어 담당이던 유성덕 선생님은 어느 날 교장선생님과 여러 선생님들을 모셔놓고 시범강의를 하셨는데 갑자기 필자를 호명하시곤 "more and more"를 넣어 짧은 글을 지어보라고 하셨다. 사전에 연습을 하지 않은 까닭에 갑자기 일어선 나 역시 당황하여 우물쭈물 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수업이 끝나고 나서 전혀 꾸지람이 없으셨다.

 

바로 뒤 쉬는 시간에 같은 반 친구가 알 마티노의 팝송 가사에 나오는 "I love you more and more everyday"라고 말하지 그랬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 때 만일 내가 “I love Jesus Christ more and more everyday”라고 바꿔 말했다면 유성덕 선생님은 물론 영락교회 장로이셨던 이창로 교장선생님도 흐뭇해 하셨을 터인데 두고두고 후회스러웠다. 그 후로 나는 “사소한 일이라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과 “나중에 후회할 일은 절대로 하지 말자”는 평생의 교훈을 얻었다.

 

팝송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시골에서 올라온 나에게 서울 친구들의 영어 팝송 실력은 놀라웠다. 요즘 중고생들이 아이돌 가수에 끌리는 것처럼 당시 우리는 FM 방송의 리퀘스트 프로를 통해 흘러나오는 톰존스의 “Delilah”(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을 배반한 데릴라'라는 것을 한참 후에 알았다) 같은, 뜻도 모르는 팝송을 열심히 따라 부르곤 하였다. 그 때 어머니가 다방을 경영하신다는 친구 L이 학교 행사 때마다 장기자랑 시간에 팝송을 곧잘 불렀다. 그 친구는 다방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면서 점심시간에 큰 보리차 주전자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곧잘 따랐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필자 역시 지금 교편을 잡고 있지만 교사의 관심사와 역량에 따라 학생들의 사고의 차원이 달라진다는 것을 종종 실감한다. 그러한 견지에서 학생들의 사소한 행동거지를 고쳐주려고 애쓰셨던 잔소리 많은 ‘좁쌀’ K 선생님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K 선생님은 항상 골덴 인민복을 입고 다니셨다. 또 체육담당 S 선생님은 체육을 하면 땀을 많이 흘린다며 아예 웃통을 벗고 운동을 하게 하셨다. 또 다른 체육선생님은 학생 전원이 국민체조의 순서를 외울 때까지 체조만 시키셨다. L 선생님은 우리에게 배드민턴을 가르쳐 주겠다 하셨지만 당시 라켓 값이 너무 비싸 우리는 배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 "경천애인"은 대광고의 교훈이다. 십자가의 정신을 상징하며 위로는 성실, 근면을 옆으로는 협동과 봉사를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