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 People

People

[세계화] 알리셰르 나보이 흉상이 서초구에 세워진 까닭

Onepark 2025. 4. 18. 20:20

서울 도심에서 거리를 걷다 보면 건물 모퉁이에서 뜻하지 않게 조각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테헤란를 걷다가 수의를 두른 듯한 비너스 상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하고, 주변 환경에 비해 다소 왜소해 보이는 조각 작품을 만나 안쓰러운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문화예술진흥법에 의해 연면적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을 신축하거나 증축할 때 건축비용의 1% 범위내에서 건축주가 미술작품을 직접 설치하거나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납부하게 한 결과이다.[1]

 

* 문화예술진흥법에 의해 설치된 조각 작품. 양재 환승주차장 앞(왼쪽), 테헤란로 선릉역 부근

 

며칠 전 대법원 앞길을 걷다가 서리풀 터널과 서울고 방향 교차로의  코너에 낯선 외국인의 흉상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문화예술진흥법에 의해 설치한 공공미술 조각 작품이 아니라 서초구청에서 계획적으로 설치한 외국 유명인물의 조각상이었다.

Alisher Navoi (1441-1501): 15세기 우즈베키스탄의 민족 영웅이자 투르크어 문학의 아버지라는 설명이 쓰여 있었다.

 

 

하지만 대강 짐작이 갔다.

2014년 실크로드의 거점도시였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를 방문한 적이 있다.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박물관에서는 조우관(새의 깃털로 장식한 모자)을 쓴 고구려 사신이 벽화 속에 들어 있어 옛날에도 이 나라가 한반도와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여행을 하면서 우리 정부가 그 나라의 국가정보화・IT 사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스탈린 정권이 연해주에서 강제로 이주시킨 고려인들이 정착했던 곳(예: 김병화 박물관)이며,  우즈베크 인들이 한국에 이주노동자와 결혼이민자로 많이 와서 살고 있는 것도 알았다.

현지에 가서 보니 "김태희가 밭일을 하고 있더라"는 말이 곧이 들릴 정도로 미인이 많았다. 그러나 농업이 主산업이어서 우즈베크 인들이 카자흐스탄 등 공업이 발달한 이웃 나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고들 했다. 

 

* 타슈켄트 전통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우즈베크 여인, 조성렬 박사(맨 오른쪽)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Copilot을 통해 알아본 알리셰르 나보이는 아주 대단한 인물이었다.

알리셰르 나보이(Alisher Navoi, 1441~1501)는 우즈베키스탄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정치가로, 중앙아시아 문학과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우즈베크어 문학의 창시자이며, 페르시아어가 주류였던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우즈베크어를 문학 언어로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테면 우즈베키스탄에서 그 나라말을 정착시킨,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비슷한 역할을 한 티무르 제국의 시인이자 정치가였고 신비주의 철학자, 화가였다고 한다.

 

알리셰르 나보이의 주요 업적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문학과 예술] 우즈베크어로 된 최초의 문학 작품을 다수 집필하고 중앙아시아 차가타이 문학(Chagatai literature)의 기틀을 마련했다.

- [정치 및 행정] 티무르 왕조에서 고위 관료로 활동하며 문화와 예술을 지원했다.

- [철학 및 사상] 그의 작품은 신비주의적 요소(Mysticism)를 포함하며, 인간의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알리셰르 나보이를 국가적 영웅으로 존숭하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거리, 극장, 박물관 등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알리셰르 나보이 국립문학박물관(State Museum of Literature), 알리셰르 나보이 예술대학 등이 유명하다.

특히 타슈켄트 지하철역 중 하나가 그의 이름을 따서 ‘알리셰르 나보이 역’으로 명명되었는데 전통적인 돔이 늘어선 형태의 아름다운 지하건축물이다.

그의 생일인 2월 9일은 국가적인 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 타슈켄트의 중심가에 있는 알리셰르 나보이 지하철역(1984 개통)은 꽃무늬가 새겨진 돔이 3렬로 늘어서 있다.

 

서울시 서초구 대법원 청사 앞에 알리셰르 나보이의 흉상이 세워진 이유는 다음과 같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어려운 한자를 대체할 수 있는 한글을 창제하고 보급에 힘썼던 세종대왕이 존숭을 받는 것처럼 우즈베키스탄에서 그 같은 위업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알리셰르 나보이는 페르시아어나 아랍어에 비해 2류 언어로 취급 받던 우즈베크어를 문학작품에 쓸 수 있는 언어로 격상시켰다.

 

그리하여 서초구 차원에서 2021년 7월 타슈켄트市 미라바드區와 우호협력 협정을 맺기로 하고 우즈베크 위인의 흉상을 주한 우즈베키스탄 Vitaley Fen 대사와 유라시아 네크웍스 그룹 김창건 회장이 기증함에 따라 같은 해 11월 9일 제막식을 가졌다.   

그런즉 한국과 우즈베키스탄  간의 문화 교류 및 법적 협력이 활발해지는 이 때 두 나라에서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의 조각상을 공공장소에 설치한 것은 아주 적절해 보였다. 마침 알리셰르 나보이가 우즈베크 어로 된 문학작품을 많이 남겼다는 점에서, 그에 관한 설명이 부족하지만,  동상 뒤에 서초구에서 운영하는 그림책 도서관이 있는 점도 고려한 것 같았다.[3]  

 

또한 우즈베키스탄은 한국과 민사사법공조 협정을 체결하는 등 법률 및 사법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예컨대 우즈베크 인들이 한국에 많이 체류하고 있는 상황에서 혼인, 이혼, 상속 기타 가족관계 서류의 송달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보이의 흉상은 법과 정의를 중시하는 그의 사상을 기리는 의미에서 다른 곳이 아니라 대법원 앞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조각상 주변에는 이국적인 튤립꽃이 심어져 있었다.

 

 

Note

1] 우리나라에서는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을 제정하면서 연면적 1만㎡ (3,025평) 이상의 건축물을 신축하거나 증축하는 경우  건축비용의 1%의 범위 안에서 조각 같은 미술작품을 건축주가 설치하도록 권장하였다. 서울시에서는 1984년 건축조례를 통해 이를 의무화하였는데 1995년 7월부터는 문화예술진흥법으로도 의무 사항으로 규정하였다.

2011년 5월에는 건축주에게 너무 부담을 지우지 않으면서 제도의 취지를 살릴 수 있게끔 건축주가 미술작품을 직접 설치하는 대신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납부할 수 있도록 선택적 기금제를 도입했다. 이를 통해 마련된 기금으로 공공미술 진흥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여 국민들의 문화예술향수 기회를 보다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는 지역 및 건물의 특성, 주변환경을 고려하여 다양한 형태의 공공미술작품을 설치하고 있다.

 

* 공공미술작품으로 인기가 있는 유영호 작 Greetingman. 분당 SK허브 앞.

 

2]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는 문화예술진흥법의 취지에 따라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를 소개하고 공공미술 포털을 통해 건출물 미술작품의 DB를 조회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아울러 전국의 심의위원회와 담당 공무원, 미술가들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구성하여 정보를 교류할 수 있게 하였다.

 

* 부하라에서 본 당나귀를 타고 가는 호자 영감의 조각상

 

3]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할 때 나귀를 타고가는 영감님의 동상을 보았다. 설명을 보니 중동 지방의 민담 설화를 수집하여 이솝 우화같은 우화집으로 만든 호자 영감이라고 했다.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은 부하라의 오아시스 마을에서 나귀를 타고 가는 호자 영감님 앞에 앉아 한 어린이가 재미있는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것에서도 알 수 있었다. 

현지에서 구입한 호자 영감 이야기(Tales of Nasreddin Hodja) 책의 서문에는  여기 수록된 이야기들이 투르크인들의 집단적 상상력을 통해 삶의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해 온 지혜를 보여준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호자 영감의 이야기는 투르크 지방의 속담, 관용구 또는 인구에 회자되는 일화로 발전해 왔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