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일 낙성대 호암교수회관 컨벤션센터에서 대학 졸업 50주년 기념 만찬 행사를 가졌다.
졸업 30주년, 40주년 행사를 했던 곳에서 은사님도 모시고 대학 동기들이 부부동반으로 자리를 함께 했다.
71학번 동기들은 대부분 1975년 동숭동 캠퍼스를 다니다 졸업했다. 그런데 2025년은 서울대학교가 관악산 아래로 캠퍼스를 옮긴지 50년이 되는 해여서 서울대에서도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 졸업 50주년 기념 행사에 아내를 동반하고 나간 이유는:
첫째, 30주년, 40주년 행사 때도 그리했던 것처럼 졸업 후 반백 년이 되기까지 내 삶을 되돌아보기 위함이었고,
둘째, 은사님과 대학동기들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졸업 앨범의 순서(가나다 순의 학번)대로 학사모를 쓴 우리의 모습을 스크린에 띄워줄 터였다.
그리고 못 나오는 동기들은 무슨 사정 때문인지 같은 테이블의 동기들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이날 행사를 준비한 동기회장 김종인 변호사가 인사말 및 경과보고를 통해 서울법대 71학변 29회 졸업생 총원 176명 중에서 56명이 참석(그 중 부부동반은 24명)했고 작고한 동기가 20명인데 지방 거주, 다른 일정 등 여러 사정으로 불참한 동기가 62명, 해외거주 6명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니 연락할 수 없었던 동기가 34명이나 된다 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는 각종 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타이트한 개인정보보호법 상 본인의 동의가 없는 한 주소나 전화번호 등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그런즉 이날 졸업기념 만찬에 참석한다는 것만 해도 종심소욕(從心所欲의 나이가 되어서도 사회활동을 한다는 증거가 되었다.
이날 참석하신 은사님들은 양승규 교수(1934년생 법대 14회), 최대권 교수(1937년생 법대 15회), 이수성 교수(1939년생 법대 15회) 세 분이시고, 사정이 있어서 못나오신 분은 이태로 교수(1932년생 법대 8회), 박병호 교수(1931년생 법대 9회), 송상현 교수(1941년생 법대 17회), 김유성 교수(1940년생 법대18회)이셨다.
모교 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하신 이수성 교수님은 아직도 제자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셔서 놀라웠다.
이미 타계하셨지만 우리에게 민법을 가르쳐주신 김증한, 곽윤직 교수는 KoreanLII에도 간단히 두 분의 학문적 업적을 소개한 바 있다.
이날 제1부 기념식 순서에서는 참석하신 은사님들이 덕담을 해주셨고, 40주년 행사 때 쓰고 남은 돈을 종자돈으로 하여 이를 크게 불려준 동기 박준현 전 삼성생명 사장의 공로에 대한 감사패 증정이 있었다. 이 기금을 가지고 서울대에는 발전기금을, 또 법학전문대학원에는 장학금을 내놓고 동기 강용현 변호사가 회장 직을 맡고 있는 서울법대 총동창회에도 적지 않은 금액을 기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도 이 기금의 일부 지원을 받아 6월 초 럭셔리한 남도 수학여행을 떠난다는 것을 전임 동기회장 윤재윤 변호사가 안내하고 아직 몇 자리가 남아있음을 알렸다.
이윽고 만찬시간이 되었다.
테이블마다 2병씩 놓인 이른바 SNU 와인으로 건배를 한 후 만찬이 시작되었다.
전복구이와 등심 스테이크 등 코스 요리로 이루어진 만찬은 국내 제일의 편의점 CV를 운영하는 홍석조 회장이 비용을 전액을 쾌척했다고 하여 우리 모두 감사를 표하고 식사를 하였다.
제2부 여흥 시간에는 진로하이트 CEO를 역임한 이남수 동기가 사회를 보았다.
작년 말부터 김종인 동기회장이 재능기부 형태로 여흥 시간을 진행해 달라고 공지한 바 있었다.
그리고 동기들 모임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와서 사진을 찍어준 김시영 변호사가 50주년 행사는 동영상을 포함한 기념화집을 만들어준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만찬장에 도착하자 포토존에서 독사진 또는 부부사진을 찍고 입장해야 했다.
김시영 동기는 요즘은 세계 명산 순례와 TuniDobi라는 YouTube 영상제작과 편집으로 소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악기 연주와 노래의 장기를 가진 동기들이 차례대로 나와서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뽐냈다.
청운(靑雲)의 꿈을 품고
졸업한 지도 어언 반백 년
Half a century has passed
since we left SNU College of Law
with a great dream.
서리 앉은 머리에 회한 없이 살았다면
That’s enough!
Now our hair has turned gray.
But if we've lived with little regrets,
That's enough!
졸업 50주년 기념만찬에 참석한 후 그 단상(斷想)을 17음절의 짧은 시 하이쿠로 표현해본 것이다. 고심 끝에 음절 수를 맞추기 위해 '그걸로 족해'는 영어 'That's enough'라고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윤석열 대통령이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일치의 의견으로 대통령 직에서 파면되었다. 윤 대통령이 8년 후배였으니 "회한(悔恨) 없이 살았다"는 것과 "That's enough"라는 말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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