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DG Forum에서는 박찬경 교수가 조선시대의 그림을 같이 보면서 해설해주는 시간을 가졌다.[1]
고등학교 동창들이 매달 한 번씩 모여 인문학적 지식을 서로 공유하는 자리였다. 대부분 은퇴를 하였고 평소 자기의 관심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터라 연 1회 이상 발표를 해야 하는 회원을 10명 모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박찬경 교수로서는 조선시대의 산수화부터 시작해 초상화와 "풍속화의 감상 및 해설" 등 벌써 3회째였다. 평생을 포스텍에서 금속 및 재료공학을 연구하고 강의했던 과학자로서는 놀라운 변신(變身)이었다.
미술품 감상에 관한 한 '덕후'라기보다 '프로'라 할 수 있는 박 교수는 직접 국내외의 미술관을 찾아 다니면서 감상도 하고 기회가 되면 사진을 촬영하여 수만 점의 도판을 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중에서 아주 일부를 우리들에게 소개해준 것이었다.
나는 조선시대의 풍속화 중에서도 혜원 신윤복 (蕙園 申潤福, 1758~1813?)의 연소답청(年少踏靑, '청춘의 봄놀이'라는 뜻)에 호기심이 발동했다.[2]
혜원이 아주 사실적이면서도 해학적으로 그린 위의 그림을 보자.
박 교수는 조선시대에는 왕실 그림제작소인 도화서의 화원들이 왕족과 고관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그러다가 영정조 시대에는 경제가 크게 발전하면서 도화서 출신들이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나와서 고객들이 요구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혜원 뿐만 아니라 단원 김홍도, 김득신 등 풍속화가(風俗畵家)가 다수 등장하여 그 시대의 풍물과 습속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달래꽃 피는 봄이 되자 대갓집 자제들이 청루(靑樓: 기생집)를 벗어나 간화답청(看花踏靑: 꽃을 보고 풀을 밞음)에 나셨다. 구종 딸린 말도 몇 필 빌려 아리따운 기생을 태우고 산수 경치 좋은 야외를 찾아갔다. 마침 암벽 바위 틈에 핀 진달래꽃을 보자 한 친구가 꽃을 꺾어 기생의 트레머리(가채)에 꽂아주고 아예 말고삐를 잡았다.
기녀(妓女)들의 옷차림은 온갖 멋을 다 부리고 있으니, 보라색과 옥색 천으로 발 굵게 누빈 저고리에 향낭(香囊: 향주머니)을 달아 차고 홍록(紅綠)의 주머니를 긴 띠로 매어 걸음마다 나풀거리게 하고 있다. 말 탄 기생이 불을 달라고 하자 장죽에 담배불을 붙여 대령하는데 뒤따라 가는 구종(驅從: 마부)은 자기가 썼던 벙거지를 내주고 양반 갓을 든 채 오만 상을 쓰고 있어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낸다.
또 한 친구는 약속 시간에 늦었는지 갓을 벗은 채 동자구종을 시켜 말을 달려오는데, 말 탄 기생의 초록 장옷이 깃발처럼 뒤로 나부끼고 있다.
어찌나 실감나게 그려놓았던지 나 자신도 청춘[3]으로 돌아가 저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우연찮게도 신경림의 시 <그림>을 읽으면서 시인도 나와 똑 같은 생각을 했구나 고소(苦笑)를 금치 못했다.
그 림 - 신경림
Picture by Shin Kyeong-nim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멘 채 시적시적
걸어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There are times when you want to step
Into the pictures of the past.
With a backpack on my back, relaxed and slowly,
I want to step into it.
주막집도 들어가보고
색시들 수놓는 골방문도 열어보고
대장간에서 풀무질도 해보고
그러다가 아예 나오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떨까
옛사람의 그림 속에
갇혀버리면 어떨까
Once entering a tavern, or
Opening a room where girls are embroidering, or
Hard working at a forge,
And what if
I've lost my way out?
What if I’m trapped in
An old man’s picture?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오늘의 그림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나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두드려도 발버둥쳐도
문도 길도
찾을 수 없다는 것
오늘의 그림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There are times when I suddenly realize
That I'm trapped in
Today's picture,
That I've lost my way out.
Even if I knock and struggle,
I can't find
A door nor path.
Sometimes I want to get out of
Today’s picture.
배낭을 메고 밤차에 앉아
지구 밖으로 훌쩍
떨어져 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Sitting in the night train with a backpack on,
I once experienced a wish to slip away from the Earth.
나로서는 우선 James Last 악단의 연주곡 'Paintings'가 먼저 떠올랐다.
청춘 시절 심야 프로에서 종종 이 곡을 들으면서 '고시공부의 감옥'에서 벗어나 그림 속으로 빠져드는 상상을 한 적이 많았었다.
그러나 시인이 말한 것처럼 '오늘의 그림'은 어떠한가 생각에 잠겼다.
인생의 황혼기에 처하여 오래 전 John Grisham의 법정소설 〈The Firm〉(우리나라에서는 소설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 영화 '야망의 함정'으로 소개)을 읽었던 나로서는 'Caribbean Sunset'을 보러가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시인이 말한 것처럼 한국을 떠나거나 지구 밖으로 떠나기보다는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좋은 음악을 듣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생각을 고쳐 먹었다.
Note
1] 전에 이 블로그에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코로나 거리두기가 풀리면서 몇몇 고교 동창들과 매달 모임(DG23 Forum)을 갖고 있다. 교수 출신 회원들이 많아서인지 마치 대학원 세미나처럼 진행되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회원들이 순번을 정해 두어 달 전에 자진하여 예고하는 주제는 매우 다채롭다. 그 동안 발표한 것만 해도 스토아 철학사상, 가장 작은 무한(Minimum Infinity), 보르헤스의 단편소설집, 포도주 제대로 알고 마시기, 생성형 AI 활용법 등 동서고금을 넘나들고 있다. 다음 달에는 한국의 민화(民畵)에 대해 해설을 곁들인 감상회를 가질 예정이다.
2] 우리가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말고도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같은 조상을 둔 것은 큰 복(福)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혜원은 아주 재치있는 해학을 담은 그림을 아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에 나오는 3경(三更: 새벽 12~1시 경)에 보이는 달은 상하가 바뀐 하현달이 아니라 부분월식 상태의 보름달이라는 것이 일성록을 조사한 전문가들에 의해 밝혀졌다. 바꿔 말해서그의 그림에는 무진장한 멀티모덜(multi-modal)한 정보가 들어 있는 만큼 그것을 현대적으로 풀어내 세상에 알리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라 할 수 있다.
3] 타임머신을 타고 '청춘'으로 돌아간다면 정확히 몇 살 때가 좋을까?
KoreanLII에 'Youth' 항목을 만들어 올리면서 그 청춘의 시기가 나라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법령은 '청소년'을 보호 차원에서 19세 미만 중고등학생으로 보는 데 반해 UN에서는 대체로 '12~24세'로 잡고 통계를 작성한다고 했다. 사회통념상으로 청년이란 '젊은 성인'(young adult)을 말하며, 19세 이상 20대 젊은 남녀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박정대의 시에 나오는 '청춘의 격렬비열도'의 몸부림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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