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 오늘 Book's Day에 소개할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여행기로 유명 화가들의 본거지를 답사한 김영주 작가의 《생애 한 번쯤은, 아트 로드》(The Coup, 2022.9)란 책입니다. 부제가 "서양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흔적을 따라가다"로 되어 있어 책 내용을 대강 짐작하실 겁니다.
G : 이번에는 주제가 무겁지 않은 신간서적을 고르셨네요. 화가의 그림을 보려면 보통 미술관을 찾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활동했던 곳을 방문했다면 화가의 인생과 화풍을 낳은 환경을 주로 살펴보았겠군요.
P : 그렇습니다. 작가는 독자들이 직접 찾아가볼 수 있도록 교통편과 숙박편까지 알뜰히 소개하였고 술술 읽기 쉽게 그림과 사진을 곁들여 수필식으로 써놓았어요. 해당 페이지에 실려 있는 화가의 관련 그림을 보면서 독자는 이 그림이 이런 배경에서 탄생하였구나 쉬 짐작할 수 있습니다.
G : 화가는 누구누구를 소개하였습니까?
P : 아주 참신한 기획인데,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나라 별로 여러 지명을 열거하고 그곳에서 활동했던 화가를 여러 명 등장시키고 있어요. 저는 이 책을 집어들자마자 액상프로방스의 세잔과 생폴드방스의 샤갈 편을 읽었습니다. 나머지는 관심있는 독자들이 이 책을 구해서 읽어보시면 되고 오늘은 그중에서 폴 세잔(Paul Cézanne, 1939~1906)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로 하죠.
G : 전에 세잔이 즐겨 그린 생트-빅투아르 산을 직접 보기 위해 프로방스 지방을 찾아 갔다가 고속도로에서 오토바이를 탄 2인조 강도를 만났다는 섬찟한 일화를 소개해 주셨잖아요?
P : 1996년도 일이죠. 그 당시 액상프로방스에 도착하자마자 처리한 일은 경찰서를 찾아가 미니텔을 앞에 놓고 사건신고를 하고 경찰조서를 받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동행한 아내가 여권과 신용카드가 들어 있는 백을 탈취 당했으므로 당초 계획을 대폭 줄이고 속히 파리로 가서 임시여권을 만들고 항공권을 재발급 받고 신용카드 지불을 정지시키는 게 급선무였어요. 그때 외환은행 파리지점 직원이 프랑스에서 오래 산 사람들도 북아프리카인들이 많이 사는 마르세이유는 무서워서 못가는데 어떻게 그 사람들 보는 앞(생샤를르 驛前)에서 렌트카할 생각을 했느냐 핀잔을 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G : 회상하기도 고역이시죠? 그런데 당초 예정했던 세잔의 아틀리에와 생트-빅투아르 산은 보고 오셨나요?
P : 말 그대로 주마간산이었기에 이번에 김영주 씨의 책을 읽고 세잔 편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폴 세잔 길(Avenue Paul Cézanne)은 폴 세잔이 실제로 걸었던 길이다. 지금처럼 매끄러운 포장도로가 아닌 거칫한 흙길이었겠지만. 액상프로방스(이하 "엑스")의 중심인 로통드 분수에서 2킬로미터 더 북쪽, 숨 가쁘게 올라야 하는 언덕 위에 있다. 주변은 인기척 없이 한적하다. 세잔 시대를 연상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다. 저 오래된 나무와 벽돌담들은, 어쩌면 백여 년 전에도 그대로였을지 모른다.
1839년, 엑스의 부유한 은행가 아들로 태어나 평생 돈 걱정 없이 살았던 세잔은 대신 사교성 없고 수줍은 성향을 지녔다. 아버지 기대에 부응하려고 엑스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지만 고집 센 아들은 기필코 그림을 배우겠다며 파리로 떠났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버지는 마지못해 매달 적절한 생활비를 보내줬다.
파리에서는 모네와 르누아르 등 또래 화가들과 친분을 가졌으나 늘 겉돌았다. 마네가 주관한 모임에 나가서도 조용히 구석에 앉아 있곤 했다. 당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인상파전에 두 번 출품해 [어느 비평가로부터는 그가 그린의 빅토르 쇼케의 초상화가] '임산부와 태아에게 악영향을 줄 만큼 음흉하고 구역질 나는 그림'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세잔은 사람들의 몰이해에 분노했다. 이후 다시는 인상파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166쪽)
P : 위의 짧은 글 속에서 우리는 폴 세잔의 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어요. 대부분 피상적으로 세잔은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풍경화를 많이 그린 프랑스의 화가,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평생 돈 걱정 할 필요 없이 유족했고 생전에 그림을 그리는 족족 팔렸던 화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경을 보면 아버지의 바램과는 달리 그림 그리는 화가가 되겠다고 고집을 부려 관철시켰고, 주관이 뚜렷하고 비사교적인 성격에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도 별로 교류가 없었으며, 파리를 떠나 고향에 돌아와 주로 생트-빅투아르 산을 많이 그렸음을 알 수 있어요.
G : 법조인이 되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화가가 되었으니 생활비 지원이 끊겼을 텐데 어떻게 아버지를 설득했을까요? 아버지 사후에 상당한 유산을 상속받았다면서요?
P : 네, 파리에 가서는 나이 어린 여자와 동거를 하고 아들까지 낳았음에도 명망가 아버지에게는 말도 못 꺼내고 생활비를 타 쓰는 형편이었대요. 오죽하면 자기 그림 실력을 보여드리고자 아버지가 신문을 읽는 모습을 초상화로 그릴 때 자기의 절친 에밀 졸라의 연재 기사가 실린 신문 제호(LEVENEMENT)를 대문짝만하게 넣었겠습니까!
그것이 세잔의 성공비결이 아니었나 싶네요. 든든한 경제적 배경이 있으니 전통이나 대중의 기호를 추종하지 않는 주관(主觀)을 내세울 수 있었고, 고향 땅에 돌아온 뒤에는 자연과 교감(交感)을 하면서 자기만의 화풍을 수립했으며, 末年이 되어서야 이루어졌지만 후배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어요.
서양미술사에서는 세잔을 반 고흐, 고갱과 함께 후기 인상파로 분류한다.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느리고 길었던 탓에 본격적인 화풍이 정립된 것은 40세 이후, (세잔 입장에서는) 환멸의 도시인 파리를 떠나 고향에 정착한 후였다.
세잔의 40대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평온했다. 아내와 아들이 생겼고,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아졌으며, 무엇보다 자연과 가까이할 수 있었다. 한갓진 어촌과 목가적인 농촌, 지중해의 햇빛과 엑스의 산간지역은 곧 다가올 세잔의 '엄청나고도 파격적인' 후반부를 장식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게만 지속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부모의 죽음, 아내와의 별거, 당뇨병 진단, 거기에 불안정한 인간관계가 정점을 찍으면서 50대의 세잔은 은둔자가 되었다. 생트-빅투아르 산을 등반하고, 채석장 옆 오두막에 칩거하며 그림에만 몰두했다.
1901년 60대에 접어든 세잔은 결단을 내린다. 북쪽 교외 구릉 지역의 땅을 매입한 후 직접 도면을 만들어 공사를 시작했다. 1년 후 스튜디오가 완성되면서 세잔은 매일매일, 누구의 방해도 없이, 혼자 마음껏 일했다. 걸어서 30분 거리에는 파노라마로 펼쳐진 망대가 있었다. 저 멀리 생트빅투아르 산이 사시사철 보이는 [그곳]. (169쪽)
P : 이 대목은 액스에 있는 세잔의 스튜디오에 가서 생트-빅투아르 산을 바라보며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만일 세잔이 유족하면서도 평온한 삶을 누렸다면 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남기지 못했을 거예요. 반 고흐와는 양상이 다르지만 세잔도 오랜 고뇌와 번민의 시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혹시 '세계의 역사를 바꾼 사과'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버전이 여러 개 있지만 오늘의 주인공과도 관계가 있어서입니다.
G : 네, 저도 들은 적 있어요. 에덴 낙원 추방의 빌미가 된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사과(선악과), 만유인력(중력)에 착안하게 된 뉴턴의 사과, 입체파 화가들의 눈을 뜨게 해준 세잔의 사과(정물화), 독재에 항거하게끔 만든 윌리엄 텔의 사과, 애니메이션으로 영화 및 레저 산업을 석권한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 백설공주의 사과, 개인컴퓨터(PC)와 모바일 시대를 개막한 스티브 잡스의 애플(PC와 스마트폰), 간혹 나치 해군의 암호를 해독한 계산기를 고안했음에도 동성애자로 몰려 튜링이 입에 물어야 했던 독약 든 사과를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셋만 꼽는다면 앞의 세 개가 해당되지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세잔은 원한다면 뭐든 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거나 탐나는 작품들을 구매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검소한 그는 소박한 스튜디오 하나면 족했다. 그렇게 언덕 위의 작은 집에서는 조용한 혁명이 일어났다. 세잔의 끈질긴 작업들은 입체, 야수, 추상파 화가들에게 '이 풍진 세상의 희망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출중한 후배들의 추앙을 누려보지 못한 채 이승을 떠났다. 1906년 10월 중순, 야외 스케치 중 들이닥친 폭풍에 호되게 시달린 세잔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쓰러지고 만다. 겨우 몸을 추슬렀지만 다음 날 정원에서 관리인의 초상화를 그리다 말고 다시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며칠 후 폐렴으로 67년의 생을 마감했다.
이듬해 파리, 가을 살롱전에서 세잔의 회고전이 열렸다. 피카소, 마티스, 모딜리아니 등 젊은 아방가르드 기수들은 감격에 휩싸였다. 자신들이 고민하고 주저했던 숙제들을 이미 한 올씩 풀어간 선배가 있었던 것이다. 시각의 혁신, 공간의 혁신, 소재의 혁신, 구도와 형태의 혁신. 피카소와 마티스는 주머니를 톡톡 털어 세잔의 <수욕도>를 하나씩 구입했다. 더 가난했던 모딜리아니는 <빨간 조끼 소년>의 허접한 복제품을 집에 걸어 놨다. (177-178쪽)
P : 초기엔 혹평과 푸대접을 받아야 했던 세잔이 재평가되기 시작하고 그의 그림은 불티나게 팔렸다고 해요. 저도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가봤는데 세잔 그림은 불과 몇 점 밖에 전시되지 않고 있었어요. 파리에서 미술품을 수집하고 거래하던 미국계 화상 볼라르의 눈에 띄어 싹쓸이 하다시피 미국인 콜렉터들에게 팔아넘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잔의 그림은 필라델피아, 보스턴 등 미국의 미술관에 더 많이 소장되어 전시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P : 저는 그 동네까지 갔다가 멀리서 생트-빅투아르 산만 바라보다가 다음에 다시 오자고 발길을 돌렸어요. 김영주 작가가 들려준 세잔의 스튜디오를 묘사한 대목을 여기 인용하겠습니다.
세잔의 스튜디오(Atelier de Cezanne) 로 내려가는 1킬로미터의 길은 화가들의 땅(Terrain Peutres)이라 할까 호젓했다.
벽돌 한 귀퉁이에 'CEZANNE'이라는 글자와 화살표만 달랑 새겨져 있다. 스튜디오 앞으로 가니 입장 시간을 기다리는 방문객들이 정원을 어슬렁거린다. 워낙 장소가 협소해서 30분 간격으로 십여 명씩 예약을 받는다. 2층과 연결된 계단이 분주해졌다. 스튜디오에서 나오는 사람, 들어가는 사람, 기념품 코너를 기웃하는 사람. 나는 떳떳하게 카메라를 꺼내 들고 맨 앞줄에 섰다(공식적으로 사진촬영을 허가).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곳은 제 스튜디오입니다. 저 없이는 아무도 입장할 수 없답니다. 그러나 당신은 친구랍니다. 우리 함께 들어가요. (폴 세잔)" (172~173쪽에서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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