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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Day]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 강영훈 회고록

Onepark 2022. 12. 13. 07:30

G : 2022년의 마지막 13일 Book's Day에는 무슨 책을 소개해 주실 건가요?

P : 요즘 MZ세대와의 사고방식의 차이가 거론이 되면서 사표(師表)가 될 만한 큰어른이 없다고 하잖아요? 지난번 대선 때도 국가발전의 비전이나 지도력보다 비호감도 적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데 유리하다는 말도 있었지요. 특히 금년에 이어령 교수, 김동길 교수가 우리 곁을 떠나셔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의 격변기에 파란만장하면서도 어찌 보면 수호천사가 보살펴 어느 곳에서든지 탁월한 성과를 올린 인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88 서울 올림픽 직후 노태우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청농(靑儂) 강영훈(姜英勳, 1921~2016) 박사 이야기입니다(아래 사진, 2008. 5. 동아일보사 펴냄).

 

G : 그런데 왜 회고록의 제목을 '벽창우(碧昌牛)'라고 하셨을까요? 고집이 세고 무뚝뚝하며 융통성 없는 사람을 벽창호라고 하잖습니까!

P : 강영훈 총리(이하 '청농선생'이라 함)는 평안북도 창성군(昌城郡) 출신인데 이웃 벽동군(碧潼郡)까지 아우른 이 지역의 명물인 벽창우가 몸집이 크고 힘이 아주 센 반면 쇠고집이 대단했다지요? 청농선생은 이 책에서 애국심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에 뒤지지 않는다며 일제하에서 일본과 만주에 가서 공부한 것, 해방 후 월남하여 군에 입대(육사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 입교)한 것, 무엇보다도 5.16이 났을 때 군사혁명에 반대하여 반혁명 장성 1호로 수감되었던 것, 노태우 정부의 총리 시절 남북 고위급회담을 성사시키고 대한적십자사 총재 시절에는 북한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한 것 등을 자기 고향 소의 성질에 빗대서 말한 것입니다.

 

G : 나이 많은 사람들은 강영훈 총리를 억세게 운이 좋았던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어요.  왜 그렇지요?

P : MZ세대 관점에서 생각해보죠. 그들의 할아버지 세대는 일제강점기에 청소년 시절을 보냈고 곧 이어 청년기에는 해방과 6.25 동란, 전후에는 보릿고개(춘궁기)를 겪어야 했으며 장년기에는 경제개발의 역군으로 월남과 중동에서 피땀을 흘려가며 돈을 벌어야 했지요. MZ세대는 상상도 할 수 없으리만치 어느 누구도 몸과 마음이 편안한 시절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청농선생은 생사(生死)의 고비를 넘나드는 인생의 결정적인 시기마다 올바른 판단을 하여 바른 길을 걸었고 국가 사회의 지도자로서 귀감이 되는 삶을 사셨다는 점입니다. 회고록을 동아일보사에서 펴낸 탓인지 회고록의 편제가 마치 신문연재 기사를 보는 것 같아요.

MZ세대가 좋아하는 게임으로 풀이해 본다면 청농선생은 끊임없이 위기가 닥치지만 그때마다 꼼수를 쓰지 않고 정도(正道)를 걷습니다. 그리함으로써 알지 못하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고 때로는 득템을 해가며 결국 최종 목표를 달성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농선생의 약력은 책의 앞날개에 잘 요약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소개하도록 하지요.

 

1921년 평안북도 창성군 청산면 청룡에서 부친 강병헌(姜炳憲)과 모친 이병희(李炳姫)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로부터 직접 한학 수업을 받고 서당에 다니다가 열 살 때 청산보통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웠다. 이어 영변농업학교에 다니다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다카다 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고, 이후 만주 건국대에 진학해 경제학을 전공했다. 본과 2년 재학 중 학병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1945년 광복 후 귀국했다.

1946년에 월남하여 국군에 입대한 뒤 국방 인사 · 행정 전문 가로 활약했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받아 미국으로 가서 공산세력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한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1년 육사 교장 재직 중 육사생도들의 군사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반혁명분자'가 되어 수감되었다가 중장으로 예편했다. 이듬해 미국 유학을 떠나 남가주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워싱턴에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계간지 <저널 오브 코리안 어페어스(Journal of Korean Affairs)>를 발간하기도 했다.

1976년 귀국하여 한국외국어대학 대학원장, 외교안보연구원장, 주영 대사, 주교황청 대사 등을 거쳐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민정당 전국구)을 하고, 1988년부터 1990년까지 2년 간 국무총리로 재임하며 3차례 남북 고위급(총리)회담을 이끌었다. 이후 대한적십자사 총재, 세종재단 이사장직을 역임하다 2000년 말 모든 현직에서 물러나 50년 넘게 살아온 서대문구 충정로의 우거(寓居)에서 가족과 함께 단란한 은거 생활을 하다가
[2016년 5월 10일 95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책 앞날개)

 

G :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네요. 그렇다면 첫 번째 위기는 무엇이었나요?

P : 영변 농업학교에 다니던 청농선생은 대학진학에 뜻을 두고 일반학교로의 전학을 결심합니다.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일본에 유학 가 있는 친구에게 기별하여 히로시마에 있는 사립중학교로 아버지 몰래 유학을 떠납니다. 아버지한테서 한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미리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청농선생은 2학년으로 전학한 인문계 학교에서 수학과 영어 과목을 따라갈 수 없자 1학년 교과서부터 몽땅 구해서 전쟁을 치르듯이 공부를 했다고 해요. 3학년 2학기 때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모의시험 치는 셈 치고 만주 건국대학 입학시험을 보았는데 합격 통지를 받고선 그 학교에 육당 최남선 선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만주로 갑니다. 그러나 만몽문화론을 강의하기로 한 최남선 강좌는 폐지되고 일제의 만주 지배를 위해 설립된 건국대학에 환멸을 느낄 즈음 학병으로 입대하게 돼요.

 

* 청농선생은 부인의 내조 덕분에 장군 시절에는 대가족을 부양하고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는 박사과정도 마치고 자녀 교육을 할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유가족은 부친이 대학원장을 하고 모친이 공부했던 한국외국어대학 학생들에게 매년 부모님의 이름을 딴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G : 갓 스물을 넘긴 나이였는데도 스케일이 큰 행동파셨네요. 이미 만주와 중국 일대는 전시 상태였는데 두렵진 않으셨을까요?

P : 네, 강제집집령이 내린 상태였고 간부후보생이 되어 훈련을 받을 때 조선인으로서 사상검증을 받아야 했어요. 이미 백두산 등정과 대종교 본부를 찾은 행적이 알려져 의심을 받고 있던 차에 내심 불안하셨답니다. 예비사관학교 구대장의 면접을 보는데 불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더랍니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는 장교는커녕 하사관이나 졸병으로 끌려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 청농선생으로서는 잠시 뜸을 들이고나서 생각을 가다듬고 이렇게 답하셨다고 해요. 그 요지는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왜냐? 만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정벌에 성공하고 중국을 정벌하고 인도까지 정벌했다면 오늘 이런 전쟁은 없었지 않았겠느냐?"였는데, 면접심사관은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통과시켜주었다지요. 그런데 일본군 견습사관이 되어 도쿄 부근의 센다이 부대로 배속된 지 얼마 안돼 미국의 원폭 투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조선인 학병들을 이끌고 귀국선에 오를 수 있었어요. 청농선생은 1년 8개월 동안 일본군 초급 지휘관으로서  훈련을 받는 가운데 전시 생사관두(生死關頭)에 서서 조직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자신의 인생과 민족의 장래를 심각하게 성찰할 수 있었다고 해요.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갔던 나는, 1945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북한의 공산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고향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46년 3월 하순 5명의 고향 동지들과 함께 평양, 원산, 속초를 거쳐 주문진으로 월남했다. 그 동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중학교와 대학교 시절에 형성된 사상적 배경이요, 다른 하나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해방 후 북한 공산치하에서 겪은 경험 때문이었다.   80, 81쪽

자유로운 남한에 가면 무엇이든지 어떻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던 낙천적인 마음은 비정한 현실에 부닥치기 시작했다. . . 우선은 호구지책이 급선무였다. 우리는 각자 자기 자질과 희망에 따라 직장 구하기에 나섰다. . . . 마침 군정하 군사영어학교에서 군 경력이 있는 청년을 모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 남북통일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내가 남한 군대에 참여하는 것은 고향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 . [우여곡절 끝에]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자마자 1946년 5월 1일자로 일본군 장교 경력과 미 군정 장교와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근거로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되어 국방부 감찰총감 보좌관 보직을 받았다.   84, 85, 87, 88쪽

 

1950년 육군본부 인사국장으로서 육군 장병들의 교육 훈련에 여념이 없던 나는 미국 참모대학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 직후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나는 미국으로 떠나지 못하고 국(局) 실정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신임 국장과 동시에 근무하여야 했다. . . 공산군이 남침하던 날로부터 3일간은 그야말로 3년 세월에 버금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충격과 비탄, 불안과 혼란이 지배했다. 유비무환이란 말을 얼마나 뼈저리게 느꼈는지 모른다.

그러나 국군은 그 자리에서 와해되지 않고, 비관은 했을망정 절망은 하지 않았다. 부서지는 조각들을 다시 주워 모으면서 남은 힘을 모르는 데 전력을 다했고, 내일이야 어찌 되든 오늘 당면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 적과의 혼전 속에 소대장, 중대장을 잃은 병사들은 공산군에 투항하지 않고 무너진 몸을 이끌면서 한강을 건너 남하하고 있었다.  131, 142, 143쪽

 

G : 해방 후의 상황이나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발발한 한국전쟁 직후의 상황은 한반도 평화 시대에 태어나 IMF 금융위기와 디지털 전환 시대를 몸소 겪었던 2030세대에게는 "무슨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냐"고 하지 않겠어요?

P :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지요. 해방 직후와 한국 동란 당시에는 나라를 세우고 지키는 게 중요했다면 지금은 사이버공간이나 온라인 게임, 메타버스에서 새로운 영토를 찾아 개척하는 일이 그 못지않게 중요해졌습니다. 한류 관련 아이템을 들고 세계를 누비는 사람도 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미리 준비하고 때를 기다리는 사람만이 성공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G : 그러한 시대적 격변기에 1960년 4.19 직후에는 무탈하셨던 분이 5.16 직후 반혁명분자라고 구속 수감이 되셨다고 했는데 무슨 위기가 닥치신 거였죠? 

P : 청농선생은 육군참모대학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59년 봄 6군단장이 되어 기동훈련과 군기확립에 힘을 쏟았습니다. 1960년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 이기붕 부통령 당선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상부의 압력을 받고 군이 정치도구로 추락하는 것을 보고 크게 우려했습니다. 급기야 4.19가 터졌고 청농선생의 6군단은 전과 다름없이 교육 훈련에 전념했으나 군 내부에는 불안한 공기가 감돌았습니다. 장면 내각이 들어선 후 육군참모차장 제의도 받았으나 이를 사양하고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군의 고급 지휘관을 양성하는 육사 전통을 확립하고  기계적인 교육과정을 인격도야와 자율정신 함양으로 개편하는 일을 추진했어요.  사관생도들에게는 스스로 선택하여 결단하게 하는 자유시간을 많이 허용하도록 했습니다. 육사 교과내용의 하나로 골프 과목을 신설하고 학교 부지 안에 골프 연습장을 만드는가 하면 졸업반 생도에게는 칵테일 파티를 열게 하여 장차 국제사회 진출에 대비한 사교에 관한 소양도 습득하게 했습니다.

 

* 6.25 직후 마련한 서울 충정로 자택에서 말년에는 장남인 강성룡 변호사 내외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사진출처: 조선일보

G : 아, 그때부터 육사생도하면 멋진 제복과 함께 미국 웨스트포인트 생도 못지 않은 국제적 신사 이미지가 생긴 거군요. 태릉의 육사 골프장도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이 문제가 된 겁니까?

P : 사실 청농선생은 장면 총리가 주미 대사로 있을 때 대사관 무관으로 모셨고, 또 같은 가톨릭 신자로서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고 해요. 그게 빌미가 되어 당시 군 내부의 하극상 풍조와 중견 간부들이 고급 간부를 불신하는 분위기 속에 강영훈, 김웅수 등 몇몇 장군이 장면 정권에 반기를 드는 족청계(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 계열) 쿠데타 음모설이 떠돌았어요. 게다가 국방비를 절감하여 민생문제를 해결하자는 국군 10만 감군안이 나와 군 내부의 동요가 심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5.16 쿠데타가 일어난 거지요. 

 

1961년 5월 16일 새벽 김형일 육군참모차장의 연락을 받고 쿠데타가 일어난 것을 알았다. 혁명군의 교통통제를 피해 의정부를 거쳐 태릉에 있는 사관학교로 달려가 8시경 사관학교 참모들을 교장실로 소집 했다. 태반의 장교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올 것이 오고야 말았습니 다"라고 하면서 사태를 긍정적으로 보는 듯했다. 평소에 성실하고 양심적이라고 믿고 있던 사관학교 간부들의 그 같은 태도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육사 간부들은 교장도 당연히 자신들과 동감일 것이라고 단정한 듯, 나의 생각은 물어보거나 알려고도 하지 않고 모두가 정치인들의 부패, 월권, 무능을 규탄하며 이제 군인들이 합심해서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물론 내 생각은 그들과 달랐다. 민주 헌정 체제가 무너진다는 것 은 공산 체제와 싸우는 우리의 대의명분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군이 정치에 관여한다는 것은, 그것도 혁명적인 방법으로 군의 위계질서를 깨뜨린다는 것은 그대로 우리 사회의 기존 질서를 깨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질서가 자유민주적으로 생성 발전되지 못한 곳에는 새로운 질서를 건립한다는 명분 아래 혼란과 무질서가 되풀이되기 쉽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다. 하물며 장면 민주당 정권이 출범한 지 1년도 못 되어 그 실정(失政)을 규탄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가혹한 일이며, 합법적으로 군 수뇌부가 정치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사관학교 장교들의 태도를 보고 군 내부의 대세를 직감했다. 나는 그 속에서 혼자 버티고 서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면서 도대체 나 같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는 자신을 통탄하면서 육사 교장으로서 육사 생도만은 정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민주 호헌(民主護憲) 군인의 씨앗이 사관학교에 보존될 수 있기를 진솔한 마음에서 희망했던 것이다.

 

오전 10시경이었다. 육사 생도 대표가 교장 면담을 요청했다. 생도 대표는, 교장의 직접 지시가 없으면 평상 수업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즉시 모든 생도들을 강당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훈시를 했다.
"지금 이 순간 국군 장교 일부가 흐트러진 국정을 바로잡는다는 구호로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 교장도 자세한 것은 모른다. 오늘의 비상사태는 선배들에게 맡기고 제군들은 내일의 국방 중임을 위해 계속 수학수도(修學修道)에 힘쓰는 것이 사관생도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일이다."
교장의 태도를 알게 된 사관생도들은 교실로 돌아갔다. 후일, 군사혁명을 발기한 사람들이 혁명의 성패가 사관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가행진에 달렸다고 생각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5월 17일 육군참모총장실로 달려가서 장도영, 박정희 두 장군에게 사관생도 시가행진 계획이 현명치 못하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였다. 그때 제6군단 포병사령관으로 혁명 주체의 한 사람인 문재준 대령이 들어왔다. 그가 "지금 상황이 유동적이고 아직도 불안전하니 교장님께서는 아무 말씀 마시고 육사로 빨리 돌아가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내 팔을 잡고 총장실 밖으로 나와 계단을 막 내려가는데, 대위 3명이 권총을 빼어 들고 "거기 서" 하고 소리를 쳤다. 순식간에 문재준 대령은 권총을 빼앗기고 발길로 차이는 소란이 일어났다. 그 때 육사를 찾아와서 사관생도들의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요구했던 박창암 대령이 나타나 나를 육본 일반참모 회의실로 안내하더니 "사적으로는 존경합니다만 공무를 위해 하는 수 없습니다." 하고는 대위 한 명을 감시원으로 남기고 나가버렸다.

이렇게 하여 나는 구속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육군사관학교 사관생도의 시가행진 반대의사를 표명할 때 나는 이미 내 신상에 일어날 일에 대해 각오를 한 바 있었다. '사회정의와 겨레의 번영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내가, 이제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며 사회부조리를 숙청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에 의해 구금, 희생이 될 줄이야' 기막힌 상황이었다.   249, 253~256, 264쪽

 

G : 정말 긴박한 순간 순간이었네요. 그러나 소신에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벽창우의 기질을 유감없이 드러내셨어요.

쿠데다 주체세력은 청농선생이 장면 총리와 가깝다고 여기고 쿠데타 가담을 종용하기보다 족청계라 하면서 쿠데타 음모설을 퍼뜨리고, 거사 후에는 육사 생도의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반대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웠군요. 그때 전두환 대위가 육사 졸업생으로서 후배들을 찾아가 시가행진에 나설 것을 독려했다는 말이 1981년 12.12 사태 이후 나돌았습니다. 전두환은 하나회 가입한 것도 그렇고 강영훈 장군하고 비교해보니 전형적인 정치군인이었습니다 그려.

P : 결국 청농선생은 '육사 교장으로 사관생도 시가행진을 반대한 것은 反혁명을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죄 아닌 죄목으로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후 혁명검찰소 지하영창으로 이감되었다가 8월 어느날 군 예비역으로의 편입원서를 쓰고 풀려났어요.

그날 육사 참모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OK 한 마디만 했으면 그 고생을 면하셨을 텐데 청농선생은 벽창우 같이 고집을 부리셨어요. 하지만 감방 안에 몸은 구속되어 있어도 정신은 자유롭게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군인들이 어떻게 군사혁명을 성공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특히 미국의 군사제도를 공부한 군 간부들의 조직관리에 대한 자신감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성찰의 과정은 군사혁명에 반대한 퇴역 장군들이 미 국방부의 지원으로 1년간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을 때 청농선생은 뉴멕시코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새롭게 공부함으로써 학문의 길을 걷게 한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5.16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면에는 군 간부들의 조직관리에 대한 자신감이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사회에서 가장 규모가 큰 조직체는 군대였다. 미국의 군사원조를 합쳐서 정부 연간 예산의 절반에 가까운 재정을 운용하는 수혜 당사자로서 그 같은 조직체를 관리 운영하는 능력은, 국가 예산의 절약이란 차원에서도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 같은 정세 속에서 군은 휴전 이후 전력 증강 유지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국가 예산과 물자 운영관리 면에서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미군으로부터 운영관리제도를 도입했다. 그 제도의 발전에 따라 군의 운영은 체계화되어갔고, 체계화된 제도를 시행하면서 익힌 안목으로 군 자체의 비리를 시정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들어서고 있었다.
급기야 이 같은 안목은 군 자체뿐만 아니라 정부 각 부처의 행정이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가에 대한 비판도 하게 만들었다. 또 군 간부들의 폭넓은 자질 향상을 위해 국방대학원도 설립했다. 그로 인해 군의 국토방위 임무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지만, 반대로 일부 군인들에게는 국가 통치 경영 전반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 결과 정부 일반 행정 능력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과 더불어 군인도 국가 통치를 책임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5.16 군사혁명이 정권을 장악하여 집권에까지 이른 근인(近因)으로 나는 다음의 4가지를 꼽는다. 갑작스런 육군참모총장의 경질, 정부 측 쿠데타 진압 의지의 결여, 군 수뇌부의 관망 태도, 쿠데타 주체의 민첩한 행동 등이다. 이는 5.16 군사혁명의 원인을 심리학적 연구 방법론의 관점에서 본 것인데, 사실과 더 직결되어 보일 뿐 아니라 주로 특정인의 결심과 행동에 관한 것으로 이해되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그렇기에  "만일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났더라면..." 하는 식의 사후 약방문 격으로 실제 원인을 가정 요인과 비교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건에 찬동하지 않은 사람이 많을수록 또는 그 사건이 초래한 결과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만일 ... (What if ...?)' 이란 가정법을 써서 생각할 여지가 커진다.   284~286쪽

 

G : 청농선생으로서는 군문(軍門)은 떠났지만 미국의 정치학 박사가 되어 인생 후반부에 원대한 경륜을 펼칠 기회가 열린 셈이네요. 

P : 청농선생의 처지가 성경의 요셉(창세기 37~50장)과 너무나 흡사해요.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를 받아 이집트 파라오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으나 보디발의 신임을 받고 가정총무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때 만일 요셉이 보디발 부인의 유혹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정치범 감옥에 갇히지도 않고 여전히 호의호식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다른 정치범을 만나 그의 꿈을 해몽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나중에 파라오의 신임을 받아 국난에 처한 이집트 총리도 될 수 없었을 겁니다.

 

G : 마흔 나이에 군단장을 거쳐 육군 중장까지 지낸 분이 어떻게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을 생각을 했을까요? 

P : 한국의 젊은이들은 너무나 쉽게 "이생망"(이번 生은 망했어) 말하는 것 같아요. 청농선생도 쫒겨가듯 미국 유학을 떠났을 때 그런 심정이 없진 않았겠죠. 그런데 요셉이 보디발의 정치범 감옥에서 간수장 대행 겸 상담역(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 역을 맡은 팀 로빈스를 연상케 한다)을 맡아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것 처럼 미국의 명문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새로운 학문분야에 심취하여 10년간 박사학위 프로그램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의 화두(話頭)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터키와 한국의 민주정부가 군사혁명으로 전복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민주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가 하는 정치발전이론을 한국에 적용해보는 것과 중국 공산당의 발전사를 연구하는 데 집중되었다 해요. 여기에 그와 동년배인 교수들이 마치 친구처럼 논문 쓰는 것을 지도해준 것과 무엇보다도 부인인 김효수 여사 (청농선생과 막역했던 동료군인 김웅수 장군의 여동생)이 미국 도착 이틀만에 일을 시작하여 그가 학위를 받고 한국문제연구소를 운영할 때까지 14년간 내조를 한 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G : 미국 정치학박사가 한둘이 아닌데 어떻게 학자(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장), 외교안보연구원장, 주영대사를 역임하고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지요?

P : 청농선생이 회고록에서 진솔하게 밝힌 비화를 한번 읽어보세요. 젊은이들의 '이생망'을 리셋할 수 있는 비결이 들어 있으니까요. 제가 볼 때  삼박자가 갖춰졌기 때문입니다.  ① 그가 직접 보고들은 선진 제도 · 지식의 적용(예: 외대 대학원의 지역연구 특화), ② 휴먼 네트워크의 활용(군대 및 유학시절의 인맥이 든든한 기반이 된 것은 그 이상으로 베풀었기 때문), ③ 항상 겸허한 자세로 주어진 기회를 선용(가톨릭 신자로서 주 교황청 대사 부임, 민정당 대표직을 고사하자 노태우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제안)이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크고 작은 차이는 있을지라고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기회와 자산임에도 그 활용 여부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거든요.

 

* 1990.10. 평양 주석궁에서 김일성을 만난 강영훈 총리. 가운데는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

G : 아무리 인품이 훌륭해도 3金이 건재한 정국에서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 밑에서  소신 있고 고집도 있는 분이 어떻게 2년 이상 총리직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요?

P : 나중에 3당 합당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참으로 힘들게 3김이 이끄는 야당을 상대해야 했지요. 아무렴 '사표를 품고 살았다'고 했을까요! 그럼에도 대독(代讀)총리, 방패총리에 머물지 않고 총리의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자기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 분으로 평가됩니다. 국무총리 시절 원주를 시작으로 제주도와 마라도까지 전국 18곳을 순회하며 ‘국민과의 대화’ 를 가진 것은 요셉이 총리가 되자  이집트 전국을 순행하며 장차 풍년과 흉년에 대비했던 것을 방불케 했어요. 그 결과 노태우 대통령도 청농선생 같은 신망 높은 인물을 중용해서 북방외교를 트고 변화하는 대외통상환경에 대응해서 경제체질을 강화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되었습니다. 총리 재임 시절 회담의 명칭과 의제를 둘러싸고 1년 반 이상 끌었지만 남북 고위급회담을 성사시켜 남한과 북한의 총리가 남북을 서로 방문한 일은 아주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나라 정당은 정책정당이라기보다는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한 정치조직일 뿐이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결과 국회는 대화와 타협으로 대립, 반대의견의 절충과 조화를 도출하는 곳이 아니라 독선과 폭력이 난무하는 결전장으로 전락했다. 이는 곧 민주정치를 갈망하는 국민에게 고통을 안겨줄 뿐이었다.

국회의원이라면 국리민복을 위한 국가사업에 동참하기를 기약한 사람들이다. 최소한 일반 국민보다 한 걸음 앞에 서서 선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인데, 그런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아 아쉽기만 했다. 독선은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소신으로 비약하여 내 의견에 동조하면 친구요, 반대하면 적이라는 극단논리가 횡행했다. 대권을 장악하지 못한 야당이 대선에서 승리해서 등장한 정권의 정통성을 문제 삼는 것에는 다분히 사상적인 갈등도 들어 있는 듯해 안타까웠다.

오늘날 국사(國事)에 참여하는 인사들의 독선과 흑백논리도 어찌 보면 그 배후와 원천을 조선조에 형성된 전통문화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제군주정치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했던 주자학이 인간성리(人間性理)에 관한 사색과 이론으로 내성적(內省的) 학풍을 발전시켜 유교의 이상정치를 실현시키려 한 공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과 유리되어 실용주의적인 측면을 소홀히 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사색당파 파벌 쟁투의 유산은 아직도 우리 사회 지도층 인사들 의식 속에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주자학적 학풍이 고증적 태도를 가진 反주자학적 학풍에 속하는 학자들을 이단시하고 철저히 억압 배척한 역사적 사실이 유산으로 남아서 정치적인 집단을 비타협의 세계로 이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368~369쪽

 

G : 우리나라가 민주화되었다고는 하나 30년 전이나 지금까지 정치판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우리 기업은 세계 일류제품을 쏟아내고 아이돌 가수와 영화ㆍ드라마, 게임은 세계를 석권 있는데도 말입니다.

P : 청농선생이 여생을 바쳐 대한적십자사 총재로서 사할린 교포의 귀국과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에 힘쓰신 것처럼 사랑과 봉사정신으로 무장하여 누구 탓하지 말고 나 자신과 주변부터 바꿔나가야 할 것입니다. 청농선생은 회고록 말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어요. 

 

우리 민족은 유사 이래 문화 민족으로서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를 지도이념으로 삼아 왔다. 나는 이 정 신이야말로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발전을 가져다줄 것임은 물론, 우리나라가 세계화 시대의 미래에 모범 국가로 떠올라 인류사회의 발전에 공헌할 바탕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5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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