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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Onepark 2022. 8. 30. 09:50

정봉렬 시인으로부터 SNS를 통해 우크라이나 전황과 함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의 시를 전달받았다.[1]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은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白러시아(벨라루스 비테프스크) 출신의 유태인이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부와 장수를 누리면서 같은 마을에 살았던 벨라(Bella Rosenfeld, 1895~1944)와의 중력을 무시한 몽환적인 사랑을 다룬 수많은 그림과 판화를 남겼다.

 

전쟁 이야기는 차치하고서라도 여름의 끝자락에 왜 샤갈의 마을이지?

샤갈은 추억 속의 러시아 마을을 즐겨 화폭에 담았지만, 언제 샤갈이 눈 내리는 마을 풍경을 그렸던가?

춘삼월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사나이 - 시인/화가 - 는 관자노리의 정맥이 솟을 정도로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던 것일까?

 

* 마르크 샤갈, "나와 마을"(1911), 뉴욕현대미술관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Snow Falling on Chagall’s Village  by Kim Chun-su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2]

아궁이에 지핀다.

 

At Chagall’s village it snows in March.[3]
As for a young man, who stands hoping for spring,
the newly risen vein on the temple
shivers Bar-r-r.

Caressing the shivering Bar-r-r, newly risen vein
on the temple of the young man
the snow, with thousands and tens of thousands of wings,
comes down from the sky and covers
the chimneys and roofs of Chagall’s village.

When it snows in March at Chagall’s village,
those winter fruits of the size of mouse droppings
once again turn the color of olives
and at night, the women at work
start the most beautiful fire of the year
in the fire pit.

 

나보다 훨씬 먼저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찾아본 이가 있었다.[4]

그는 우선 샤갈의 그림 중에 '눈 내리는 마을 풍경'을 그린 그림이 있는지 찾아보았다고 한다. 결론은 샤갈이 고향 마을을 그린, 눈이 없는 '풍경화 같은 상상화' 한 점이 있을 뿐이었다(위의 그림). 이 때문에 김춘수의 시를 '일생일대의 사기극 같은 무의미시"라고 타기한 이도 있었다.

 

모자를 쓰고 십자가 목걸이를 한 남자가 정감어린 눈으로 말을 바라본다. 말의 입김 속에는 큰 나무에 꽃이 피어 있고 열매도 여럿 달려 있다. 농부와 말의 노력을 바친 결과이리라. 그 위에는 저녁이 되어 어둠이 깃들어 가는 마을에 큰 낫을 메고 가는 농부를 그의 아내가 달려와 맞아준다. 러시아 정교회 건물 안에서는 누군가 간절히 기원하는 모습도 보인다. 농부의 마굿간에서는 그의 아내가 젖소에서 우유를 한 통 가득 짜 놓았으며 그 아래로는 핑크 빛 사랑이 넘쳐흐른다.

 

그렇다면 시인은 위와 같이 샤갈의 마을 그림을 연상하면서 북유럽의 3월에는 눈이 내리는 모습도 흔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샤갈의 마을이란 위의 그림처럼 하나의 모티브가 되었을 뿐이고 시인은 추억 속의 고향집을 떠올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샤갈의 마을 인가(人家)에서는 꽃샘눈이 내리는 가운데 저녁식사를 준비하려고, 난방을 하려고 불을 지필 것이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꽃송이같은 눈발과 어우러져 춤을 추는 것 같을 거야.

이제 봄이 와서 새싹이 돋겠지만 겨우내 조그만 나무열매들은 잘 익은 올리브처럼 배고픈 새들의 좋은 먹이감이지.

 

* 경기도 양주군 백석읍 호숫가에 위치한 커피숍 '샤갈의 눈내리는 마을'의 바깥 설경

 

시인의 상상력이 가미된 시를 한 줄 한 줄 읽기 시작하자 그 느낌과 분위기가 확연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고향 마을에서 저녁에 눈이 내리던 풍경하고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새봄을 맞는 나무에 매달린 올리브 같은 열매는 새들의 먹이가 될 거야.

이미 새싹이 움트고 있는 나뭇잎 위를 꽃샘눈이 무심히 내려앉을 때, 시인은 새싹이 움트는 나뭇가지를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과 비슷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눈이 내릴 때 그 핏줄이 바르르 떠는 것처럼 느꼈다. 샤갈의 그림과는 무관한, 얼마나 놀라운 표현인가! [4]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면서 그의 집에서는 저녁 준비와 난방을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여인(그의 어머니 또는 누님)의 모습이 아름답고도 정답게 다가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샤갈의 마을' 또는 '눈 내리는 샤갈의 마을'은 경치가 좋은 커피숍, 레스토랑, 모텔, 주거단지의 이름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나에게는 같은 시인의 다른 시 "꽃"처럼 도전적인 과제가 되었다. 유명 화가의 그림이라는 시각적 이미지에 '바르르 떠는 남자의 관자노리'를 어떻게 묘사한단 말인가!

기존 영역본을 참고하여 문맥상으로 관자노리의 정맥이 솟을 정도로 추억에 잠긴 모습을 강조하는 한편 '바르르' 떠는 의태어(onomatopoeic word)를 과감히 "Bar-r-r"라고 써 넣기로 했다.[3] 

 

Note

1] 정봉렬(鄭奉烈) 시인은 1950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은행에서 오래 근무한 경제학박사이며 개발금융 및 북한 전문가이다. 1970년대 초부터 시를 써 왔으며, 1985년 <시인>지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잔류자의 노래』(1987), 『기다림 속에는』(2011), 『반연식물』(2018), 『겨울 나그네』(2020)와 시조시집으로 『다 부르지 못한 노래』(2019), 『난세기(亂世記)』(2021), 그리고 산문집 『우수리스크의 민들레』(2011)가 있다.

정봉렬 시인은 8월 29일 오전의 SNS에서 도스토옙스키, 푸시킨, 차이콥스키, 샤갈 등 러시아 문화를 지우려고 하는 서구 사회의 유치한 반달리즘을 지적하고, '新분서갱유'라고 해야 할 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개탄한다. "다양성과 개성을 말살하려는 풍토에서 예술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래 러시아 국적의 음악가, 연주자, 체육인들은 對러시아 제재의 일환으로 서구 각국으로부터 입국을 거절 당해 국제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2] 위에 소개한 김춘수의 시에서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이란 현실적으로 조명, 난방, 취사의 용도를 떠나 가치론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추억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시인이 경험했던 그 순간이야말로 고향인 벨라루스 비테프스크 마을을 평생 그리워하고 그림으로 표현했던 샤갈 못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샤갈의 마을'은 샤갈의 작품이나 전기물에 등장하는 白러시아의 '그곳'이 아니라 김춘수 시인이 떠올린 그 장면에서 연상되는 '추억'의 한 단면이라고 하겠다.   

 

3]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그 이국적인 제목으로 인해 오래 전부터 영어로 번역돼 해외에서 소개되었다.

고려대 영문과 김종길 명예교수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이 시를 대표작으로 하여 김춘수 시인의 다른 작품 "꽃을 위한 서시", "꽃소묘", "나목과 시" 등 80여편과 함께 영어로 번역해 미국 코넬대 출판국에서 1998년에 펴낸 바 있다. 부산일보, "김춘수시집 '샤갈의...' 첫 영역 출판", 1998. 8. 4.

여기서는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 Cardiac Slaves of the Stars에 실려 있는 Geul의 영역본(2017.12.28)을 토대로 필자가 일부 시구를 의태어(擬態語)를 포함한 일부 직접적인 표현으로 수정하여 옮겨 놓았다.

 

4] <아시아경제>의 이상국 편집에디터・스토리연구소장은 [낱말의 습격]이라는 그의 연재 컬럼에서 샤갈은 눈 내리는 그의 고향 마을 풍경을 그린 적이 없고 다만 시계탑이 있는 건물에 눈이 쌓인 풍경을 그렸을 뿐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전국적으로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라는 간판은 묘한 매력을 담고 있었다. 샤갈이라는 화가의 환상적인 분위기와 동심같은 순정함, 그리고 눈이 내린 마을 풍경이 주는 낭만과 순백, 예술과 지적 취향에다 이국 취미도 슬쩍 분위기를 거들었으리라. 또 모호함의 맛도 괜찮다. 샤갈의 마을에 눈이 내리는 건지, 샤갈이 그린 ‘마을에 내리는 눈’인지 알쏭달쏭하다. 둘 다 넘나들면서 의미를 넓혀놓았다."

이상국,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의 비밀"(251), 아시아경제, 2015.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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