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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Day] 대하소설 「토지」와 하동 최참판댁

Onepark 2022. 5. 13. 07:30

G : 매달 13일 책의 날('Book's Day)'이 금방 돌아오면서도 이 날 들려주시는 얘기가 기대가 됩니다.

P : 저 역시 그렇습니다만, 무슨 책이든 소재가 될 수 있기에 '마르지 않는 샘'이라 할 수 있어요. 오늘은 5월 초에 다녀온 하동군 평사리의 최참판댁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곳이죠.  

 

* 소설속 평사리의 '토지'는 최참판댁이 대대로 소유했으나 일제의 침탈로 빼앗겼다가 서희가 이를 되찾는다는 내용이다.

G : 「토지」와 같은 대하소설이라면 비슷한 소재를 다룬 펄벅의 「대지(The Good Earth)」가 생각납니다.

P : 역량이 있는 작가라면 그처럼 스케일이 큰 소설에 한번 도전해 볼 만하지 않겠어요? 우리나라에는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이 있지요. 홍명희의 「임꺽정」도 시대정신과 역사, 민초를 다룬 일제 강점기 당시의 주목할 만한 대하소설이었습니다.

 

* 소설속의 최참판댁은 하동군이 드라마 촬영 및 체험학습을 위한 관광자원으로 만들어 2001년 개장하였다.
* 고증을 거쳐 만든 양반가의 솟을대문

G : 「토지」는 소설도 유명하지만 TV드라마, 영화로도 제작되어 한국 사람치고 모르는 이가 없을 거예요. 지리산 아래 섬진강 앞에 펼쳐진 비옥한 악양평야의 논과 밭, 5대에 걸친 만석지기 양반가의 땅을 둘러싼 대하 드라마 아닌가요?

P : 현지에 가보니까 더욱 실감이 나더라고요. 평사리 주민 치고 소작인이든 머슴이든 최참판댁과 관련된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는 게 이해가 되었어요. 통영 출신 작가의 상상력 속에 나온 이야기임에도 최참판댁의 기와집 솟을대문과 안채, 사랑채, 별당, 그리고 입구의 하인들이 살던 초가집들이 오래된 한옥 자재를 가져다 지었기 때문인지 세트장이라는 느낌이 전혀 안 들었어요.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하면 들르게 되는,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저택이었던 마운트 버논(Mount Vernon)을 찾아간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요.

 

* 안채의 대청에 자리잡은 큰 뒤주는 안방마님의 권한이자 책임에 속하는 물건이었다.
* 안채 뒤 양지바르고 바람 잘 통하는 곳에 마련된 장독대와 굴뚝
* 별당 앞 연못에는 잉어 떼가 노닐고, 방문객들은 재미로 동전던지기를 할 수 있었다.
* 사랑채는 전망 좋은 곳에 누각을 만들어 놓고 손님을 맞고 풍류를 즐기는 장소였다.
* 온갖 사건과 사연을 알고 있음직한 최참판댁 집안의 큰마당

G : 저는 소설, TV드라마를 전부 다 본 건 아니지만 동학혁명과 갑오개혁(신분제 폐지), 일제의 강점, 간도이주, 지식층 이념갈등 같은 장중한 서사(抒事, epic)가 있어서 그런지 실존했던 인물들이 실제로 벌였던 사건ㆍ사연이라고 생각됩니다. 

P : 그 점이 박경리 씨의 스케일이고 위대한 면이지요. 작가의 상상력과 문헌의 탐구ㆍ조사능력, 무엇보다도 민족 유산을 지키고 보전해야겠다는 의지력이 26년에 걸친 연재와 집필을 통해 방대한 대하소설을 남긴 것이라 여겨집니다.

 

G : 한 인물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소설이라는 점에서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펄벅의 「대지」, 호주의 콜린 맥컬로가 쓴 「가시나무새(The Thorn Birds)」에 필적할 만하고, 우리도 이런 대하소설을 갖고 있다고 누구에게나 자랑할 수 있지요.

P : 그렇습니다. 얼마 전 Netflix 영화를 보다가 덴마크에도 야심 많은 시골 청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린 소설 「Fortunate Man」이 노벨 문학상을 받고 영화화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토지」의 집필동기는 제임스 클라벨이 딸아이가 읽고 있던 역사책에서 "태풍으로 난파된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선의 항해사가 일본에 표착하여 에도 막부의 쇼군이 되었다"는 한 줄에 착안하여 대하소설 「쇼군」(將軍, Shogun. 실제인물은 도쿠가와 이에야쓰로부터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란 이름을 하사받은 William Adams)을 쓰게 된 것과 비슷합니다. 「쇼군」은 1980년 리처드 체임벌린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지요.

 

* 평사리 최참판댁 한쪽에 위치한 박경리 문학관 입구
* 작가는 평사리에서 산 적도 없이 상상 속에서 글을 썼으나 소설과 똑 들어맞았다.

「토지」는 육이오 사변 이전부터 내 마음 언저리에 자리 잡았던 이야기예요. 외할머니가 어린 나에게 들려주던 얘기가 그렇게 선명하게 나를 졸라대고 있었거든요. 그것은 빛깔로 남아 있었어요. 외갓집은 거제도에 있었어요. 거제도 어느 곳에, 끝도 없는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땅으로 떨어져 내릴 때까지 거둘 사람을 기다렸는데, 이미 호열자가 그들을 죽음으로 데리고 갔지요. 외가에 사람들이 다 죽고 딸 하나가 남아 집을 지켰다고 해요. 나중에 어떤 사내가 나타나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객줏집에서 설거지하는 그 아이의 지친 모습을 본 마을 사람이 있었대요. 이 얘기가 후에 어떤 선명한 빛깔로 다가왔지요. 삶과 생명을 나타내는 벼의 노란색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토지」는 원래 1부로 끝낼 요량이었지요. 그런데, 이제 5부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마흔여섯부터 지금까지니까, 스물네 해를 「토지」와 더불어 살아왔던 것 같아요. 삶이 지속되는 한 「토지」는 끝나지 않을 것이에요.
"삶의 연민" <작가세계> 1994 가을.

 

[서울서 내려온 조진구가 말하기를] "그 병(호열자, 즉 콜레라)은 입으로 해서 옮겨지는 병이라 하오. 그러니 먹는 것만 조심하면 괜찮다는 게요. 날것을 먹으면 안된다는 거요. 무엇이든 음식을 끓여서 먹기만 하면 병이 옮을 염려는 없고, 그러니 우리 식구는 이곳에서 꼼짝 안하는 게 가장 안전한 일이요. 죽만 끓여 먹으면 될 거 아니요? 찬바람만 불면 되니까." 「토지」 1부 3권 228~229쪽.

 

최 참판 댁에서는 김 서방이 죽은 뒤 들어와 봉순네는 동시에 발병하여 죽었다. 그 다음의 희생자는 윤씨 부인이었다. 길상은 밤길을 타고 읍내까지 문 의원을 데리러 갔다. 문 의원이 와도 이미 허사인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길상은 앉아서 부인의 죽음을 기다릴 수 없었고 수동이도 동의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읍내에 가서 길상이 들은 소식은 문 의원도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집에서 말고 출타한 곳, 그러니까 우관 스님을 찾아 절에 갔다는 것은 착오였었고. 진주에 갔었다가 그곳에서 변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돌아온 감상이 그 사실을 말했을 때 윤씨 부인은 힘없는 팔을 들어 자기 가슴을 두 번인가 두드렸다. 그리고 숨을 거둘 때는 손목을 잡고 길상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토지」 1부 3권 251~252쪽.

 

* 영화 제작발표회 때처럼 최서희와 김길상 등 「토지」의 주요 등장인물이 한데 모여 포즈를 취했다.

길상은 내가 의도했던 인물이었으나 그다지 성공적인 것 같지 않아 어쩐지 어쭙잖고, 주갑이는 의외로 성공했던 인물이에요.
서희와 인실은 열정적이며 내심에 격류가 흐르는 사람들이고, 명희는 교양을 갖추었으나 세상의 번민에 몸을 맡긴 정적인 인물이에요. 명희는 우아한 외형적 멋은 있으나 가공의 인물이어서 작가로서는 실패의 부담을 안은 채 출발하였지요. 명희는 나하고 먼 인간형이어서 골치가 아파요. 명희는 속죄의식 때문에 사랑을 병적으로 방어하지요. 그러면서 뛰어내릴 용기가 없는, 어정쩡한 이런 면에서 유인실과는 대조되는 섬약한 인물이에요.
이에 비하면 월선과 임이네는 자생하는 민초와 같은 자연적 인격체여서 나의 무의식 속에서 유형은 아니지만 농사를 지어가며 바라보는 내 모습이 그녀에게 스며 있어요. 사실 이들에게는 이러저러한 나의 모습들이 편린처럼 흩어져 있지요.
"삶에의 연민, 한(恨)의 미학" <작가세계>, 1994 가을

 

* 작가의 육필원고와 만년필, 돋보기 안경, 국어사전과 확대경

G : 「토지」의 줄거리를 요약해 주실 수 있나요?

P : 「토지」는 1969년부터 현대문학에 연재가 시작되어 몇 차례 매체를 바꾸기도 했으나 1994년에 전 5부 16권으로 완간되었습니다. 등장인물은 600명이 넘고, 원고매수는 원고지로 4만여 장에 달하는 말 그대로 대하소설이었지요.

 

「토지」의 시간적 배경과 핵심 줄거리를 말씀드리면 제1부는 1897년 한가위 때부터 1908년 5월까지 평사리를 무대로 한 최참판댁의 몰락과 서희의 간도이주를 다루었습니다.

제2부는1911년 5월 간도 용정촌의 대화재부터 1917년 여름까지 1910년대 간도 한인사회의 삶의 모습과 독립운동 양상을 소개하였고,

제3부는 1919년 3·1 운동 이후 1929년 원산 총파업과 광주학생사건까지1920년대의 진주와 서울에서 식민자본주의의 태동과 신지식인의 등장을 그렸습니다.

제4부는 1930년부터 1937년 중일전쟁과 1938년 남경학살에 이르는 시기의 중국과 도쿄, 한반도 각지에서 일어나는 여러 노선의 독립운동을 다루었고,

제5부는 1940년부터 1945년 8·15 광복까지 길상의 독립운동과 투옥, 관음탱화의 완성,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예비검속 등 이야기가 숨가쁘게 전개됩니다.

 

사마천(司馬遷)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G : 박경리의 「토지」는 대하소설로서는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또 같은 스토리텔링에 능한 여류작가인 점에서는 박완서 씨와 자주 비교되는 것 같아요.

P : 네, 그렇습니다.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큰 봉우리[巨峰]들임에 틀림없지요. 평사리 박경리 문학관에 박경리-박완서 두 분이 나란히 산책하면서 찍은 사진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공통점이 아주 많은 것 같아요.

6·25 비극이 주요 소재가 되었다거나, 여자 주인공이 끝까지 살아남아서 가슴에 맺힌 한(恨)을 풀고 '생명 존중'의 사상을 일깨운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두 분 다 남편과 아들을 잃고 여생을 딸에게 의지해서 보낸 것도 아주 닮은꼴(?)이네요.

 

미국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중국엔 “대지”의 메뚜기 떼
한국엔 대갓집을 다시 일으킨 서희

In America, It was Gone with the Wind.
In China, locusts stormed The Good Earth.
In Korea, Seo-hee restored the old Big Family.

 

Annex

하동군에서는 지리산 쌍계사와 화개장터, 섬진강 벚꽃길도 유명하거니와 금오산 짚라인과 케이블카도 타볼 만하므로 평사리 최참판댁과 한데 묶어 여행일정을 짤 필요가 있다.

우리가 묵었던 아주 이색적인 펜션은 너와집 온돌 황토방에서 1박하고 저녁엔 바비큐도 해먹을 수 있는 지리산 흙집세상이었다. 우리는 삼겹살, 항정살을 먹을 줄만 알았지 직화구이는 아주 서툴렀으므로 주인장이 친절하게도 기름기 많은 돼지고기 바비큐 해먹는 것을 도와주셨다. 그 이튿날 아침에는 인근 카페 더좋은날에서 갓 구운 빵과 모닝커피를 먹고나서 아름다운 가로숫길과 야생차밭을 지나 평사리 최참판댁으로 이동했다.

 

* 숙소인 너와집의 내부

숙소인 너와집은 몽골 유목민의 이동식 가옥 게르와 비슷한 형태였다. 벽체와 방구들은 황토여서 오래 묵는다면 그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전기로 가열된 온수가 나오므로 샤워도 할 수 있었다. 밤이 되면 하늘의 별을 세고, 무더운 여름철에는 황토 풀장에서 물놀이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흙집세상에 투숙하는 경우 계곡을 따라 지리산에 올라가 보거나 가야국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성불을 하고 세웠다는 칠불사를 찾아도 좋겠다. 아니면 새 소리를 들으며 명상을 하거나, 방마다 비치되어 있는 책을 읽거나, 녹차를 앞에 놓고 대화를 나누어도 좋을 것이다. 다만, 큰소리로 떠들거나 소음을 내는 투숙객은 환불 받고 나갈 각오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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