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한 줄 한 줄 지우는 재미로 여행을 떠난다.
이것도 영화나 TV 예능프로의 영향이긴 하지만 번지 점프, 행글라이딩, 짚라인 타기는 버킷리스트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짚라인의 경우 전에 남이섬 갈 적에 단숨에 강을 건너가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을 아들 내외가 기억했다가 이번 칠순 기념여행에 포함시킨 것 같았다.
이번 가족여행은 부산 해운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지만, 첫 행선지는 경남 사천에서 멀지 않은 하동이었다. 대전-통영 고속도로의 사천 휴게소에는 곳곳에 이 지역이 항공우주산업의 중심지가 될 것임을 알려주는 표지가 많았다.
마지막 행선지는 자부가 나의 블로그 소재로 안성맞춤이라며 포함시킨 하동군 평사리의 최참판댁이었다.
마침 경남 하동의 금오산[1]에 아시아 최장 3,420m의 짚와이어가 설치되었다며 짚라인을 타보시면 젊어질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번 여행은 아들 내외가 이끄는 대로 따르기로 약속했기에 예약시간에 맞춰 짚와이어 매표소로 갔다.
시간이 되자 우선 안전교육을 받고 체급에 맞는 헬멧과 트롤리를 지급받았다. 비행기 역시 아무리 많이 타보았어도 탑승 후 이륙전 비상시에 대비한 안전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같은 시간대에 예약한 젊은이들도 짚라인 경력이 상당해 보였지만 아는 척하지 않고 열심히 경청했다.
그리고 각자 헬멧은 쓰고 자기의 트롤리는 들고 셔틀버스에 올랐다. 금오산 정상부근의 출발지까지 20여분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가는 동안 가을 단풍철에는 경치가 더 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어 출발점에 섰다.
저 멀리 환승지점까지 까마득한 거리를 외줄을 타고 가야 한다니 순간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 특히 여성들은 번지 점프할 때마냥 비명을 질러댔다.
다음 순간 덜컹하고 트롤리가 미끄러지듯 와이어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와이어 위에 트롤리를 얹고 탑승자의 체중에 따른 중력 가속도가 작용하여 바퀴가 굴러가는 방식이다.
한참을 가다가 경사가 완만해지면 브레이크가 작동하므로 도착지점에서는 거의 관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되어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다.
이중삼중의 안전장치가 되어 있는 만큼 크게 위험할 것도 없었다. 2021년 11월 강원도 모처에서 추락 사고가 난 것은 무슨 까닭인지 와이어가 끊어졌기 때문이라 했다.
생긴지 얼마 안된 이곳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으로 믿고 진행요원이 시키는 대로 타고 내려갔다.
한 번에 내려가지 않고 금오산 지형에 맞게 길고 짧은 4개의 코스를 순차적으로 이용했다.
코스에 따라서는 계곡 위를 비행하는 기분이 들었고, 남해의 한려수도를 바라보며 내려갈 때에는 마치 새처럼 날아가는 것 같았다.
마지막 코스는 짧기도 하려니와 강하속도가 빨라 꼬리에 파라슈트를 매달고 내려갔다.
활강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간직하고 싶은 사람은 원하는 컷을 골라 인화할 수 있다고 했다. 아니면 같은 값으로 통째로 사진필름을 전송받을 수도 있다고 하여 나는 후자를 택했다.
며칠 후 화개장터와 평사리 최참판댁을 보러 갈 때에는 금오산 플라이웨이 케이블카를 타보기로 했다.
짚라인을 타고 남해 한려수도를 보는 것과는 달리 시간 여유를 갖고 주변 경치를 돌아보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짚와이어와 같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이날은 평일이어서 탑승객은 많지 않았다.
바닥이 투명 유리판으로 되어 있는 캐빈을 타면 더 익사이팅할 듯하여 띄엄띄엄 운행되는 크리스탈 캐빈을 타고 올라갔다.
금오산 정상에는 레이다 기지가 있지만 그 둘레에 평탄한 산책로를 만들어 놓아 360도 사방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게 해놓았다.
둘레길은 꽃나무와 바윗돌을 배치해 놓아 어느 공원의 산책로와 다름없었다. 거기에 맑은 공기를 쐬며 북으로는 지리산 연봉과 동쪽의 사천, 남쪽의 다도해, 서쪽의 섬진강을 조망할 수 있게 해놓았으니 이렇게 완벽한 조건을 갖춘 경승지(景勝地)도 드물 것 같았다.
문제는 이곳을 널리 알리고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라 하겠다. 지자체 재정 말고 프로젝트 파이낸싱 방법으로 재원을 조달했다면 안정적인 현금흐름(cash flow)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경남도청이나 하동군청으로부터 문의 받은 적도 없지만 왕년의 프로젝트 파이넌스 전문가로서 직업의식이 발동했다.
내 자신이 방문객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니 솔루션은 딱 세 가지였다.
첫째, 단기적으로 셀렙 마케팅을 구사해 예능 프로나 영화의 로케이션 장소로 노출시키는 것이다. 가까이에 부산, 창원, 여수, 광주 같은 도시가 있으므로 당일치기 관광객도 많이 끌어들일 수 있다고 본다.[2]
둘째, 글로벌하게 홍보[3]를 하여 외국인 관광객을 적극 유치하도록 한다. 다만, 중국에는 이보다 더 웅장한 산세와 경치를 구경할 수 있는 케이블카 있는 명승지가 많으므로 중국 관광객들에게는 부차적인 구경거리로 그쳐야 할 것 같다.
셋째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장기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스토리텔링 마케팅에 힘써 가까이는 「토지」의 최 참판댁, 섬진강 벚꽃길과 화개장터, 멀리는 쌍계사의 마애석불, 야생 차밭, 한산도의 이순신 장군의 숨은 일화를 엮어본다면 재미있고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금오산 일대에는 틀림없이 황금빛 자라와 얽힌 전설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불현듯 하동 여행기를 영어로 옮겨 짚라인이나 토지에 관한 대하소설(epic novel on the land of generations)에 관심 있는 외국인의 눈에 띄게 만들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해리 포터 마법사 이야기를 지어낸 조앤 롤링 같은 작가가 우리를 손짓해 부르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신경림 시인의 시 "돌 하나, 꽃 한 송이" 한 구절이 머리를 스쳤다.
이래서 이 세상에 돌로 버려지면 어쩌나 두려워 하면서
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 꿈도 꾸면서
그렇다! 금오산 정상에서 나의 칠십평생을 돌아보니 이 세상에 돌처럼 버려질까 아니면 꽃으로 피어날까 조바심치며 살아온 인생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곳에 와서 깨달았다. 아름답게 가꿔진 곳이라면 돌이든 꽃송이든 서로 조화를 이루고 각자 자기 몫을 다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Note
1] 금오산(金鰲山: 황금자라뫼)은 해발 849m로 경상남도의 남부지역과 남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산이다. 정상에는 레이다 기지가 있으며, 그 덕분에 산정까지 포장도로가 나 있다.
알프스레포츠(주)에서 케이블카(ropeway)와 짚라인(zip-line) 시설을 관리 운영하고 있다. 홈페이지: www.hdalps.or.kr, 고객센터: 055-884-7715.
나는 학자 시절에 관광객들이 몰리는 명산에 케이블카 또는 등산철도를 놓자고 주장한 바 있었다. 주로 환경보호론자, 무속신앙 신봉자들이 산속에 철탑을 세우거나 철길을 놓으면 서식동물의 생장을 저해하고 산신령의 기운을 훼손한다며 반대가 극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스위스나 중국에서는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것이 등산로나 하이킹 트랙을 만드는 것보다 환경파괴를 막고 높은 산까지 올라갈 수 없는 노약자들에게도 등산의 즐거움을 주고 지역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다.
2]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속담처럼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케이블카가 개통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산정 휴게소의 카페는 입점 준비 중이었다. 이 곳 섬진강은 재첩국과 은어, 참게, 또 벚꽃 필 때 나는 벚굴이 유명하거니와 관광객이 몰려들면 음식 맛으로도 승부를 겨룰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짚라인 타기 전에 밥을 먹으면 체할지 모른다 싶어 점심식사를 미뤘다. 1시간 반 걸리는 짚라인을 마쳤을 때에는 마땅한 음식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마침 인근 진교 공설시장 옆에 할머니 만두집이 있어서 늦은 시간에 열무(비빔)국수와 손만두, 찐빵을 맛있게 먹었다.
3] 귀경하자마자 블로그를 작성하는 것이므로 케이블카를 운영하는 알프스레포츠(주)에 대해서는 알아보지 못했다. 짐작컨대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하동군 및 경상남도에서 출자지원한 레저 기업이라 생각된다.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인터넷 상에서 잠재적인 외국의 관광객을 한 사람이라도 더 유치할 수 있게끔 여기 올린 글을 영어로 번역해서 따로 포스팅하기로 했다. 그들이 한국의 관광지 또는 짚라인을 탈 수 있는 곳을 검색해보다가 하동을 찾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밖에도 하동군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관광자원을 많이 보유하고 있음을 알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중단되었다가 2022년 5월 13~22일에 개장한, 북천역 주변 들판에 조성된 1억 송이의 꽃양귀비 단지, 여름철 메밀꽃 단지와 가을철의 코스모스 단지, 북천역 레일 바이크 시설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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