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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 바리톤 흐보로스톱스키를 기리며

Onepark 2021. 11. 25. 10:20

※ 2022년 2월 중순 Tistory에 Law in Show & Movie 블로그를 새로 개설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 Travel & People 블로그의 기사 중에서 영화와 공연, 전시에 해당하는 것은 대부분 Tistory로 옮겼다. 일부 Travel & People 주제에 부합하는 기사와 사진은 하이퍼링크가 남아 있는 관계로 여기 그대로 남겨 두었다.

 

성악가 중에는 어느 배역을 위해 태어났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여럿 있다.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Nessun Dorma" 하면 파바로티가 떠오른다. 로마 월드컵 전야제 때 쓰리 테너의 합동공연에서 손가락에 흰 손수건을 감고 그가 길게 뽑는 하이톤의 미성(美聲)에 관객들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 나오는 "밤의 여왕 아리아" 하면 단연코 우리나라 소프라노 조수미라 할 수 있다.

조수미와 동갑인 러시아의 바리톤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Dmitri Hvorostovsky, 1962-2017)는 러시아 로망스를 부르기 위해 태어난 성악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1]

 

* 준수한 외모와 부드러운 미성, 은발의 흐보로스톱스키는 '시베리아 백작'이라고 불렸다. 출처: NYT.

 

지난 11월 22일은 디마(흐보로스톱스키의 애칭)가 커리어의 절정기인 55세에 세상을 떠난지 4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2017년 뇌종양으로 오페라 공연을 중단했다가 재개한지 얼마 안 된 뒤라서 전 세계 팬들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9년까지 세 차례 공연을 가졌기에 한국 팬들도 많았다. FM 방송에서는 그를 애도하며 내한 공연 때 불렀던 "백학(Cranes)"을 신청한 애청자도 있었다.

 

2019년 여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르쿠츠크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3시간 가까이 바이칼 호반을 열차로 달리면서 절로 러시아 로망스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푸시킨의 원작 <눈보라>는 우연과 필연 같은 사랑의 마력을 감동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특히 우리 세대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유정(有情)>에서 주인공이 석양이 붉게 빛나는 호수 풍경에 도취되어 그곳에 머물렀던 스토리가 연상되기에 더 쓸쓸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  BGM: Vladimir Fedoseyev, Snowstorm - Romance

 

최근에도 그 때와 비슷한 감정의 파도를 경험한 적이 있다. 

"모스크바의 밤(Moscow Nights)"이라는 곡을 들을 때였는데 본래 소련(USSR) 정부의 체육대회 선전을 위한 다큐 영화의 삽입곡이었다고 한다. 2013년 7월 크레믈린 붉은 광장에서는 KBS의 열린 음악회 같은 공연이 열렸다. 그때 달빛이 비치는 가운데 흐보로스톱스키가 러시아의 유명 소프라노 안나 네트레브코, 아카데미 합창단, 청중들과 함께  모스크바의 밤 노래를 불렀다.[2] 사랑하는 두 연인이 작별을 아쉬워 하며 "은빛 강물이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듯",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들리지 않는 듯"하다는 노랫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흐보로스톱스키는 1962년 시베리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크라스노야스크(Krasnoyarsk)에서 태어났다. 엔지니어인 아버지, 산부인과 의사인 어머니가 너무 바빠서 조부모 밑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그는 노래부르기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현지 예술종합학교에서 수학한 후 현지 오페라단에 들어갔다.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얻은 것은 1989년 영국 웨일스 카디프에서 열린 BBC 카디프 성악 콩쿠르(BBC Cardiff Singer of the World competition)[3] 최종 라운드에서 웨일스 출신의 성악가 브린 터펠을 제치고 우승했을 때였다. 그 후로 그는 세계 각지의 유명 오페라에서 주요 배역을 맡으며 인기가도를 달렸다.

 

* YouTube에서 캡쳐

Moscow Nights[4]

모스크바의 밤

Not even rustles are heard in the garden,
Everything here froze until morning.
If only you knew how the Moscow Nights
Are dear to me,
If only you knew how the Moscow Nights
Are dear to me.

정원에선 바스락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모든 게 아침까지 쥐죽은 듯 고요한데
오직 그대가 여기 모스크바의 밤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만 준다면
오직 그대가 이곳 모스크바의 밤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만 준다면

The river moves and does not move,
All made of lunar silver.
The song is heard and not heard
On these quiet evenings,
The song is heard and not heard
On these quiet evenings.

강물은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듯
사방이 은색 달빛으로 덮인 듯한데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들리지 않는 듯
이 조용한 [모스크바의] 밤에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들리지 않는 듯
이 조용한 [모스크바의] 밤에

Why are you dear looking asquint,
Bowing your head low?
It's difficult to say and not to say
All that is in my heart,
It's difficult to say and not to say
All that is in my heart.

사랑하는 그대 어찌하여 눈을 내리깔고
고개마저 숙이고 있나요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지 않기도 어렵네요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지 않기도 어렵네요

And the dawn is already more noticeable
So please be kind,
You too, don't forget
These summer Moscow Nights,
You too, don't forget
These summer Moscow Nights.

새벽이 벌써 가까이 다가왔어요
그러니 제발 부탁해요
이 여름날 모스크바의 밤을
그대도 잊지 말아줘요
이 여름날 모스크바의 밤을
그대도 잊지 말아줘요

 

이 곡은 로맨틱한 분위기와 함께, 모스크바에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이라면 느끼는 묘한 정서를 자극하는 것 같다. 달밤에 은빛으로 빛나는 모스크바 강의 "강물이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듯",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들리지 않는 듯" 같은 서정적인 가사와 감미로운 멜로디로 인해 모스크바를 다시 가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88 서울올림픽 때도 코리아나가 "손에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면서 서울올림픽의 주제가[5]가 된 것도 이 노래에서 비롯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Note

1]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가 러시아 로망스 가곡을 불렀던 공연은 2006년 9월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To Russia with Love"라는 타이틀로 이루어진 차이콥스키 러시아 로망스 공연이 대표적이며, 2007년 11월, 12월에는 유럽과 북미 투어를 다녔다.

 

2] "모스크바의 밤" 작곡자(Vasily Solovyov-Sedoi)와 작사자(Mikhail Matusovsky)는 이미 소련(Soviet Union)에서 1955년에 내놓은 "레닌그라드의 밤"이란 곡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얼마 후 소련 문화부의 요구에 따라 제목을 "모스크바의 밤"(키릴 문자를 알파벳으로 바꾼 Podmoskovnye Vechera, 영어로 직역하면 Evenings in the Moscow Oblast)으로 고치고 모스크바 교외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의 선전영화에 삽입곡으로 쓰도록 했다. 이러한 연유로 원제에 Oblast가 들어갔으나 Oblast는 모스크바의 행정구역을 가리키므로 우리말로 번역할 때 굳이 모스크바 교외나 근교라 표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곡이 처음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57년 이 곡이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6회 세계 청소년축제(World Festival of Youth and Students)에서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1958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반 클라이번이 이 곡을 편곡해 피아노로 연주하면서 세계적으로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지금은 러시아 밖에서 제일 많이 불려지는 러시아 노래의 하나가 되었다. 2013년 여름 크레믈린 붉은 광장에서 열린 공연실황은 YouTube에서 볼 수 있으며, 행진곡풍으로 편곡된 것,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이 부른 것도 들어볼 수 있다.

 

3] 2021년에는 우리나라의 바리톤 김기훈이 카디프 성악 콩쿠르 아리아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4] 러시아어 원문 및 영어로 번역된 노래가사는 Very Much Russian 사이트에서 인용했다. 그밖의 다른 영어 버전이나 외국어 번역은 Lyrics Translate 사이트 참조.

 

5]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는 <탑건>, <플래시댄스> 등 3편의 영화음악 주제가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세 차례 수상한 바 있는 조르지오 모로더에게 올림픽 주제가 작곡을 의뢰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활동하던 한국계 혼성 4인조 코리아나 (이승규, 이용규, 이애숙, 홍화자)가 이 노래를 불러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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