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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Day] 로마 제국과 유대인

Onepark 2021. 11. 13. 07:00

G: 매달 13일(∵Book의 B가 13과 비슷)은 Book's Day이므로 그동안 읽었던 책을 소개해 주신다고 했죠?

P: 네, 역시 LA에서 안식년을 보낼 때 OMC(동양선교교회) 도서실에서 빌려본 책 중의 하나입니다. 기독교는 로마 제국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우리와 같은 동양인의 시각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7: 악명 높은 황제들》(pp.272~285)을 통해 유대인이 로마 제국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예리하게 분석했지요. 이것은 유대교에서 유래한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어떻게 전파되었고 공인을 받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G: 유대인들은 열심당원을 중심으로 로마 군대에 항거했지만 마침내 AD70년 디도(Titus Caesar Vespasianus, 39-81AD r.79-81AD)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지 않았나요?

P: 네, 그때 예루살렘 성전도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모조리 무너져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로마 총독의 지휘하에 로마 군대가 주둔해 있지만 내정은 헤롯왕에게 맡기는 식으로 제정 로마시대의 통치방식은 피정복민도 로마에 동화(同化)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유독 유대인만이 동화되기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유대교의 첫 번째 계명이 "너희는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였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황제까지도 숭배하는 여러 신을 믿는 나라였거든요.

 

G: 유대 민족의 유일신 신앙은 그들이 바빌로니아에서 포로 생활을 할 때에도 구세주(Messiah)를 기다리며 비참한 현실을 살아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잖습니까!

P: 유대인들은 바빌론 노수(虜囚)가 끝났어도 또 로마 지배하에서도 이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세계 여러 곳으로 퍼져나가 살았지만 현지인들과 동화하지 않았어요. 다른 민족한테는 다른 신이 있었고, 유대인의 일신교와는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G: 다신교 세계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별종(別種)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겠군요.

P: 규범의 관점에서 보면, 로마인과 유대인은 법률에 대한 사고방식도 달랐지요. 유대인에게 '법'이란 모세의 십계명처럼 신이 내려준 것을 인간이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로마인의 법은 인간이 만드는 것으로 원로원이나 민회에서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현실에 맞지 않게 되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었지요.

로마인의 법은 로마 제국 전역에서 통용되었고, 그 후에도 법에 대한 사고방식으로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가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리고 시대가 달라져도 적용할 수 있는 기본사상(로마법 정신)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G: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지만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는데 예외적인 사례였나요?

P: 로마 당국은 제국 안에 사는 이민족을 동화시키기 위해 시민권을 부여하였는데 유대인만은 속주세 면제라는 현실적 이익이 있음에도 로마 시민이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같은 이유로 로마 군단에 지원하는 유대인도 극소수였다고 해요. 로마 병사가 되면 최고사령관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하므로 유대교도가 여호와 아닌 황제에게 충성을 하면 이 계율을 어기게 되어 벌을 받는다고 믿었거든요. 그 결과 유대인들은 대부분 로마 세계의 이방인이 되는 쪽을 택했습니다.

 

G: 이집트와 중동 지방을 제패했던 알렉산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유대민족에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궁금해요.

P: 지정학적으로 팔레스타인 지방은 유럽과 소아시아에서 이집트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강대국의 침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유대민족이 페르시아 동방원정을 축복해준다고 믿고 예루살렘을 친선방문했지 공격하진 않았습니다. 로마가 유대인과 직접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BC63년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였어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멸망시켜 헬레니즘 시대의 막을 내린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패권 밑에 들어온 유대가 독립국으로 존속하는 조건으로 정교일치의 통치방식을 바꾸라고 요구했습니다. 유대 지도층이 그것을 거부하자,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진격시켰습니다.

석 달 후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폼페이우스는 혼자 신전으로 들어갔다고 해요. 승리를 과시한다기보다는 유대교 신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는데 유대인들이 보기에 그는 신성을 모독한 자였습니다. 폼페이우스와 헤게모니를 다투던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 왕권을 확실히 굳혀준 후 BC47년 소아시아(터키)의 파르나케스와 싸우러 가는 길에 팔레스타인에 들러 유대 민족과의 관계를 명확히 했습니다.

 

카이사르와 유대인의 협정은 2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둘 다 유대인의 요망을 수용한 것이었습니다. 불필요한 마찰을 피한 거죠. 첫째, 유대인에게 그리스인과 경제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다. 둘째, 군대를 포함한 모든 공적 의무에서 유대교도를 면제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죽었을 때 유대인들이 다른 어느 민족보다 슬퍼한 것도 그들의 보호자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해요.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 63BC-14AD, r.27BC-14AD)는 복음서에도 등장하지요. 로마의 속주에 인구조사를 명하여 베들레헴의 첫 크리스마스[1]를 있게 만든 로마 황제로요. 이 대목은 상세한 설명을 요하므로 시오노 나나미의 책으로 갈음하겠습니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는 유대 민족에 대한 대책에서도 카이사르가 깔아놓은 노선을 계승했지만, 제국 통치상 필요할 때는 현실적인 로마인답게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취했다. 한편 순수한 유대인도 아닌데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유대의 통치권을 장악한 헤롯 왕은 대왕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다. 폼페이우스-카이사르-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로 번갈아가며 충성을 맹세했다. 약소국의 주권자로서 상황 변화에 따라 충성의 대상을 바꾼 헤롯은 그야말로 줄타기의 명수였다.

 

헤롯은 전제군주였고, 왕권의 유지를 절대명제로 삼았는데 아우구스투스의 현지인 존중, 유대교 제사장의 견제용으로 헤롯의 존재가치는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BC4년에 헤롯 왕이 죽자, 이를 계기로 팔레스타인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제사장들의 신권통치 부활을 요구하며 봉기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비유대인을 무력으로 축출하면서 유혈폭동이 일어나자 시리아 총독 바루스는 4개 군단을 출동시켜 폭동을 진압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유대교 제사장들에게 통치를 맡기지 않고 예루살렘과 유대 중부를 직할 통치하면서 지역의 행정은 예루살렘의 유력자로 구성된 장로회의에 맡겼다. 내정의 자치권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준 것이다. 이리하여 AD6년부터 예루살렘과 유대 중부는 로마의 속주로 바뀌었다. 장관(프로쿠라토르)으로 파견된 사람은 로마의 기사계급 출신이고, 직속상관도 시리아 속주 총독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시리아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

 

당시 아우구스투스가 기용한 시리아 총독 퀴리누스는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로마의 통치 좌우명을 실천하여 예루살렘에서는 제사장들이 사법(司法)을 맡는 것을 인정해주었다. 이에 따라 로마 시민권을 갖지 않은 유대교도는 유대법을 따르고 죄를 지은 경우에도 유대법에 따라 재판을 받았다. 모세의 십계도 그 절반은 살인, 간음, 절도, 위증, 가택침입을 금지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로마법에서도 금지되어 있으니까 유대법에 맡겨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다만, 사형판결이 난 경우에는 '황제의 대리인'인 유대주재 장관이 허가해야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도록 했다.

 

예수 그리스도도 예루살렘 제사장들로 구성된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당시 유대 장관인 본디오 빌라도가 집행을 허락했기 때문에 처형되었다. 제사장들의 압력에 굴복한 빌라도는 손을 씻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보이면서, 너희(유대측)가 결정한 일이니까 나(로마측)는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말로 예수의 처형을 허락했다. 만약 빌라도가 유대측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기가 구현하고 있는 로마법에 따라 행동했다면,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신의 이름을 간단히 입에 올리는 것은 유대교에서는 극형을 당해 마땅한 죄지만, 많은 신을 섬기는 로마에서는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불안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도, 실제로 사회불안의 원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이라면 로마법에서는 추방으로 끝날 문제다. 하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고 흑해 같은 곳으로 추방되었더라면, 나중에 기독교 확대의 발단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빌라도는 조국 로마에 해를 끼쳤다.[2]

 

 

시오노 나나미가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pp.237~238, 290) 한 권으로 정리한 "로마와 로마인으로부터 배우는 교훈"은 다음과 같이 따로 정리하였습니다.

 

1. 고대 로마 사람들은 국가를 '레스푸블리카(respublica)'라는 말로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현대 이탈리아어의 '레푸블리카(republica)', 영어의 '리퍼블릭(republic)'의 근원이 되는 이 레스푸블리카는 보통 '공화국'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원래의 의미를 거슬러 올라가면 공동체라든가 공공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고대 로마인에게 국가란 주민 공동체이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2. 국가란 일부 특권계급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국가의 목적은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행복감을 높이는 데 있다는 것이 로마인의 일관된 사상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 역시 국가는 레스푸블리카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와 같은 '레스푸블리카'로서 로마를 지키려면 이제는 공화정을 폐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카이사르의 각오이며 우국의 장이었다. (필자 주: 이 점은 서구 문명과 동양 문명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생각한다. 동양 문명에서 개인은 군주의 이익을 위한 구성체 이상 이하의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3. 처음 공화정이 수립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공익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로마를 왕 한 사람의 독점물이 아니라 바로 공공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 공화정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공화정이 지금은 공공의 이익을 해치는 것이 돼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아무리 나쁜 사례가 돼 버렸다 해도 그것이 시작된 원래의 계기는 훌륭한 것이었다"고 말한 사람은 다음 아닌 카이사르였다.

 

4. 훌륭한 동기로 출발한 공화정이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것으로 변했다. 원로원 위원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전통을 지키는 일에는 열심이었지만 로마 평민들의 '공익'에는 둔감해져 버렸다. 그리고 속주에 사는 사람들의 문제는 아예 관심 밖의 일로 치부해 버리고,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대상으로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카이사르가 생각하는 '레스푸블리카(공동체)'는 단지 로마 시민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5. 카이사르는 패권국 로마의 사명은 광대한 로마 영토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의 공익을 최대한으로 하는 것ㅇ임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더 이상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로마라는 레스푸블리카를 지키기 위해서는 원로원 주도 체제이기도 한 공화정 폐지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아직 '속주민도 포함한 로마'라는 카이사르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너무나도 적었다.

 

6. 그러면 왜 개혁을 재구축해야 할까? 그 대답은 카이사르의 다음 말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는 아무리 나쁜 사례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시작된 원래의 계기는 훌륭한 것이었다."

 

7. 어떠한 정치 시스템이든 처음부터 국민을 불행에 빠뜨리려고 생각하고 만들어진 것은 없다. 당초의 동기는 '훌륭한 것' 즉 선이었을 것이고, 사실 그 시스템으로 잘돼 가던 시기도 있었다. 그래서 오랜 기간에 걸쳐 같은 시스템이 유지돼 온 것이다. 그러나 그 선(Plus)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악(Minus)으로 바뀌어 간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카이사르의 지적이었다.

 

Note

1] 누가복음 (우리말성경)  2:1-7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전 로마 통치 지역은 호적 등록을 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실시된 첫 번째 호적 등록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 각각 자기 고향으로 갔습니다. 요셉도 갈릴리 나사렛 마을을 떠나 다윗의 마을인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올라갔습니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직계 혈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을 등록하러 그곳에 갔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해산할 때가 돼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고는 아기를 천으로 싸서 구유에 눕혔습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빈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창을 가진 자'란 뜻, 유대 총독: c.26-36AD)는 기독교인들이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예수 그리스도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나올 만큼 저주를 받는 유대 주재 로마 제5대 총독(AD26-36년경)이었다. 티베리우스 황제 때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 후임으로 파견되어 유대·사마리아·이두매를 다스렸으며, 수리아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 지휘 아래 있었다. 당시 유대 총독은 유대인의 사형 집행권과 1심법원(산헤드린 공회 등)의 결정을 변경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대제사장의 임면권을 가지는 등 군사·사법·종교를 두루 관장하는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 당시, 빌라도의 로마 군영은 가이사랴에 본부를 두고 있었고, 민란 등을 염려하여 예루살렘 성전 내 안토니아 요새에 분견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빌라도는 주로 가이사랴 본부진영에 머물렀고 유월절 등 특별한 시기에만 예루살렘에 주둔하면서 군 병력을 강화하였다.

 

* 루체른 근교의 필라투스 정상행 산악열차 정거장

 

전승기록에 의하면,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로마의 군대장관이었는데, 로마법상으로는 죄가 없는 예수의 처형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나름 애썼던 것 같다.  예수가 신성모독을 했다는 예루살렘 주민들의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처형 당할 사람은 맞지 않아도 될 채찍형을 가하고, 유대인의 유월절 관행에 따른 사면을 시도해보기도 하지만 실패로 끝났다. 재판정 주변의 군중이 소요를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적은 병력으로는 진압이 어렵겠다 판단하고 "나는 책임이 없다"며 손을 씻는 제스쳐를 취한 후 군중이 요구하는 대로 예수에게 십자가 사형을 언도했던 것이다. 결국 빌라도는 로마로 소환되었는데, 유세비우스는 그가 로마로 가는 도중에 죄책감을 못이겨 자살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네이버] 본디오 빌라도 [Pontius Pilate] (교회용어사전 : 교파 및 역사, 2013. 9. 16., 가스펠서브)

스위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높은 산이 있다. 바로 루체른 근교에 있는 필라투스 산(2132m)이다. 이 산은 골짜기가 깊고 너무 험준하여 17세기까지 사람들이 오르질 못했는데 기독교인들은 이 곳에 본디오 빌라도 같이 성인을 해치는 날개 달린 무서운 용 무리(dragons)이 산다고 믿었다. 지금은 기울기 48도의 인클라인드 산악열차 또는 곤돌라를 타고 편하게 올라갈 수 있으며 정상(Pilatus Kulm)의 전망대에는 본디오 빌라도와 용의 설화를 해설한 안내판이 게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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