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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젊은 왕자의 상사병 = Panic disorder

Onepark 2020. 2. 4. 22:00

은퇴한 학자의 삶은 매일이 휴일이고 한 주간, 아니 열두 달이 전부 휴가다.

그래서 특별한 약속이나 일정이 없으면 일요일 교회 가는 것도 중요한 행사가 된다.

하지만 KoreanLII라는 영문 백과사전을 만들면서 하루일과는 현역으로 있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 특히 1, 2월 중에는 더욱 그렇다. 관심사가 강의나 논문 쓸거리에서 백과사전의 기존 항목의 수정(update) 또는 새로운 포스팅을 위해 이것저것 찾아보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 이후 법전을 뒤적이며 컴퓨터 앞에 앉아 글 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이런 점에서 2월 3일은 아주 특기할 만하다.

조간신문을 펼쳤을 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우한 폐렴) 뉴스가 톱을 장식했다. KoreanLII 초화면의 뉴스 란에 확진자가 15명으로 늘고 정부가 후베이성에서 온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기로 결정한 소식을 올렸다. 그리고 작금의 상황을 영어 하이쿠로 정리해 보았다.

 

Standing against Coronavirus,
Everyone wears face mask.
Silence rules the world.
신종 폐렴에 맞서
모두 입에 마스크
온 세상이 함구 모드

 

이날 오전 KBS 제1 FM 에서 김미숙 진행자가 절절한 시 구절을 낭송하는 것을 들었다.

 

< 전 략 >
나의 혀는 얼어붙고
살갗에서 타오르는 불꽃
놀라움에 눈도 멀고
귀에서는 우레같은 소리
식은땀을 흘리고
온몸이 떨리면서
말라버린 풀잎처럼 창백해지고
죽음이 곧 닥칠 것만 같네

 

고대 그리스의 여류 시인 사포(Sappho)가 쓴 “사랑” 시였다.
진행자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증상이 ‘공황장애’의 증상과 비슷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원지인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전세계 사람들을 패닉 비슷한 분위기에 몰아넣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KoreanLII에 “Panic disorder”에 관한 체계적 설명을 추가할 필요성을 느꼈다.

 

* 리라를 들고 있는 사포 from Wikipedia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사포의 사랑 시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는데, 함께 찾은 자료에서 이런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기원전 300년 어느 왕국에서 젊은 왕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고 안색이 창백해지곤 하여 의사를 불렀다고 한다. 왕자를 진찰한 의사는 그가 읽었던 사포의 시를 상기하고서 왕에 이렇게 간언했다.

 

“왕자님은 지금 상사병(相思病)을 앓고 계십니다.”

 

다른 병명은 알 수 없고 유독 그를 문병 온 왕비를 볼 때면 그런 증상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이 이웃 나라의 젊은 공주(당시 17세)를 후비(後妃)로 맞았는데 젊은 왕자가 계모인 왕비를 볼 때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온몸을 떨었기 때문이다.

왕은 그가 피땀 흘려 이룩한 왕국과 젊은 왕자의 장래를 생각해서 이혼을 결심하고 두 젊은 남녀가 부부의 연을 맺도록 허락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시(詩)를 쓰는 펜의 힘은 이처럼 강력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딸까지 낳은 젊은 왕비 스트라토니케(Stratonice of Syria)를 왕자에게 내어준 부왕은 셀레우코스 1세(Seleucus I Nicator)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 장군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왕의 사후 바빌로니아를 기반으로 지금의 시리아, 이란, 터키 남부지역을 다스리는 제국(Seleucid Empire)을 건설했다. 문제의 왕자는 안티오코스 1세(Antiochus I Soter)이며 BC294년에 제위를 물려받았다.

이 이야기를 다룬 그림도 있다. 병석에 누운 왕자를 문병 온 흰옷 입은 젊은 여인을 백발이 성성한 의원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장면이다.

 

* Antiochus I and Stratonice by Jacques-Louis David (1774) from Wikipedia

 

로스쿨에서 이 주제를 다룬다면 어떠한 맥락에서 쟁점 – 법규정 – 적용 – 결론 (Issue, Rule, Application, Conclusion: IRAC) 식으로 법적 분석을 하여야 할까?

 

KoreanLII에서는 Panic disorder의 증상과 함께 이것이 문제 또는 화제가 된 사례를 소개하고 법적으로는 어떻게 다룰지 설명하였다. 그리고 사포의 시 영역본과 번역문을 싣고, 사회적 관계에서는 계모를 짝사랑한 왕자의 케이스를 어떻게 취급할지 토론 이슈를 제시하였다. 아마도 흥미로운 찬반양론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공황장애가 상사병과 증상이 비슷하다면 책임능력까지 부정할 정도로 심각한 사유는 아니라는 주장도 나올 것이다.

 

이런 식으로 KoreanLII에 Panic, Panic disorder 기사를 올리고 다듬고 하다 보니 하루해가 짧았다. 덕분에 KoreanLII에 수록된 항목의 수는 드디어 2020개에 이르렀다.

Panic disorder  at KoreanLII

 

Annex

요즘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는 등 국내외적으로 화제가 되자 덩달아 KoreanLII에 올린 기사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아마도 이리저리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들어온 사람들 같다. 하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영화적 은유(cinematic metaphor)를 OST까지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흥미있어 할 것임에 틀림없다

Parasite (2019 film)  at KoreanL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