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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 코로나19로 인하여 잃은 것과 얻은 것

Onepark 2020. 3. 31. 22:30

2020년 3월의 마지막 날이다.

화창한 봄날씨에 벚꽃과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었건만 우리의 마음은 밝지 않았다.

마침 라디오 FM 방송의 저녁 프로('세상의 모든 음악')에서 전기현 진행자가 낮은 톤으로 3월에 잃어버린 것의 목록을 열거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래요, 맞아요" 수긍하는 기분이 들었다.

 

 

- 떠들썩한 저녁 모임,
- 웬만하면 다 괜찮다고 생각하던 낙천적인 태도,
- 가까이 다가앉아 목청껏 응원하던 프로 스포츠,
- 퇴근길 길모퉁이 카페에서의 여유로운 시간,
- 어깨를 부딪히며 걸어도 좋았던 벚꽃 산책,
- 반가운 사람과 나누던 악수와 포옹,
- 티켓을 사고 짐을 꾸리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여행,
- 오케스트라가 악기를 조율하는 소리와 멋진 콘서트 현장,
- 그립다고 보고 싶다고 덥썩 찾아갈 수 있었던 방문,
- 통장의 잔고,
- 내년에도 지금처럼 일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

 

* 나 역시 4월 중 프랑스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으나 취소했다.

 

진행자는 이어서 3월에 얻은 것도 죽 나열했다.

경제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주가도 엄청 폭락하였으니 잃은 것을 상쇄하긴 어렵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보람을 찾은 이도 있을 것이다.

 

- 저녁이 있는 삶,
- 고요한 나날,
- 처음 경험하는 서글픈 3월의 봄방학,
- 소중한 사람들의 안부를 예전보다 훨씬 더 자주 확인하는 정서,
- 해 지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볼 시간적 정신적 여유,
- 내 안의 나와 악수하는 일,
- 오래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는 두 번째 독서,
- 애틋한 눈인사,
- 만날 수 있을 때 만나고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는 평범한 진리,
- 인류가 얼마나 촘촘하게 연결돼 있는지에 대한 생생한 확인,
- 정말 소중한 것과 하찮은 것의 최신 업데이트 목록,
- 평범한 일상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감사

 

그밖에 여러 부문에서도 사회경제적인 이득을 찾을 수 있었다.

정부에서 강력 권장하는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로 사람들이 집에 머물고 차량통행이 크게 줄면서 모처럼 대기도 크게 맑아졌다. 외신은 항상 스모그로 뒤덮혀 가스실이라 불리던 인도 뉴델리에서도 스모그가 사라지고 푸른 하늘을 보게 되었다고 전했다.

 

* 국가봉쇄령이 내려 인적이 끊긴 뉴델리 중심가와 오랜만에 푸른빛 도는 하늘의 모습

 

그런데 그만 나에게 변고가 생겼다. C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다가 덜컥 입원을 하게 된 것이다. 

심야에 심한 어지럼증과 구토증이 생겨 응급실에 갔는데 '전정신경염'이라는 진단명이 나왔다.

응급실의 ENT 전공의가 뇌에 병변은 없는지 간단한 MRI 사진을 찍어볼 필요가 있다고 해서 계획에 없던 종합건강검진을 받게 되었다. 

문제는 내가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이 눈 앞에서, 발 밑에서 크게 회전을 하니 눈을 뜨고 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심한 현기증이 찾아왔다. 자연히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던 일, 계획했던 일은 모두 STOP이었다. 전정신경 한 가닥 만으로도 인간을 무력화할 수 있는 셈이었다.

 

 

세상이 요동치는/ 심한 현기증/ 전정신경염
다리 풀리고/ 눈을 감으니/ 사람구실 못하네
하늘이 거신/ 급제동에/ 나도 자숙해야겠네

Vestibular neuritis
As I feel dizzy,
whole world is swaying.
I can do nothing any more.
With two legs powerless
and two eyes shut down,
A brake is put on my life.

 

 

병실에 있는 동안 나 역시 잃은 것과 얻은 것이 적지 않았다.

- 정상적인 생활은 못하고 오직 고통 없는 편한 자세를 취해 누워서 지냄

- 간호사와 간병하는 가족의 집중적인 보살핌

- 주치의와 담당의가 수시로 회진하며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고 위로, 격려

- 자극성 없는 슴슴한 식사로 체중도 조절

- 같은 병실의 환우(은퇴한 공학자)와 나눈 유익한 대화

 

 

며칠 후 어지럼증이 줄어들고 직립보행이 가능해져서 병실 밖을 내다 보았다.

병원 아래의 학교 교정에는 이미 목련화가 만발해 있었다. 개학이 미뤄지는 바람에 교정에서 뛰노는 학생들이 1명도 없었다. 길거리에는 사람 왕래도 뜸했다.

하지만 가끔은 서울에서는 듣기 어려운 제비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꽃 피는 시절에 회색빛 병실에서 이렇게 며칠을 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