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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방가르드 가야금 명인 황병기

Onepark 2020. 3. 6. 21:30

황병기(黃秉冀 1936~2018.1.31) 선생은 아방가르드적 음악가의 삶을 살았다.
정해진 삶의 코스가 아니라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고 계획을 세워 공부를 하고 전통음악의 경계를 넘어 다른 세계로까지 확장하였다.간단한 그의 이력이 이를 입증한다.

 

경기고 재학시절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수상하면서 가야금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후 새로 신설된 서울대 음악대학 국악학과에서 강의, 명동극장의 지배인, 태흥화학공업주식회사의 기획관리실장, 카뮈 전집을 출간한 문조사 사장 등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면서 매일 가야금을 연주했다.

가야금은 그에게 평생의 반려자였다. 정악과 산조를 함께 공부한 그는 옛것만 굳어지는 것은 전통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1962년 현대 가야금 곡인 “숲”을 발표했다. 1974년부터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에 전념했다. 황병기 선생은 현대 국악을 개척하면서 민족적 경계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1]

 

 

법과 음악 – 생활인과 예술가

황병기는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누나와 나이 차이가 16년이나 되는 귀한 종손이었다. 경기중학교에 다닐 때 6.25 전쟁이 일어났다. 가야금 소리를 처음 듣고 매혹된 그는 피난지 부산에서 가야금을 배우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처음엔 반대하시던 부모도 “정 하고 싶으면 해라. 네 인생은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라며 승낙하고, 어머니는 전주에 가서 가야금을 구해다 주셨다. 삼국시대의 악기가 전쟁 통에 언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가야금을 공부했다. 방과 후에는 국립국악원에 가서 정식으로 정악 가야금과 산조 가야금을 배웠다.

 

경기고 재학 중 덕성여대에서 주최한 제1회 전국국악 경연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이던 1956년에는 KBS가 주최한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입상했다. 법대로 진학한 것은 공부도 잘했거니와 가야금은 그냥 좋아서 하는 것이지 생업으로 삼을 수 없으므로 생활인으로서 법학을 전공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만든 커리큘럼을 통해 전통음악을 이것저것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59년 서울대 음대에 국악과가 개설되자 강의를 맡게 되었다. 1961년 한국교향악단 창단공연(지휘 임원식)에서 그는 정회갑의 “가야고와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협주곡”(1961)을 가지고 서양식 관현악단과 협연을 했다.

 

1974년 그가 38세 때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이 한국음악과를 신설했다며 그에게 과 운영과 학생지도를 제안했다. 그는 프로답게 가야금 연주와 교육에만 전념하겠다고 말하고 이화여대에서 후진양성과 가야금 연주・작곡에 몰두할 수 있었다.[2]

 

 

가야금 창작 활동

황병기는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누나와 나이 차이가 16년이나 되는 귀한 종손이었다. 경기중학교에 다닐 때 6.25 전쟁이 일어났다. 가야금 소리를 처음 듣고 매혹된 그는 피난지 부산에서 가야금을 배우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처음엔 반대하시던 부모도 “정 하고 싶으면 해라. 네 인생은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라며 승낙하고, 어머니는 전주에 가서 가야금을 구해다 주셨다. 삼국시대의 악기가 전쟁 통에 언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가야금을 공부했다. 방과 후에는 국립국악원에 가서 정식으로 정악 가야금과 산조 가야금을 배웠다.

 

1974년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침향무”(1974), “미궁”., “비단길”(1977), “아이보개”(1978), “전설”(1979), “영목”(1979) 등을 속속 발표했다. “침향무”와 “미궁”은 당시 통용되던 가야금 문법에서 벗어난 작품이다. 전자는 당시의 관점으로 보면 향처럼 ‘은은한 아방가르드’였다. 이 작품은 가야금과 장구 연주자에게 다양한 기술을 요구한다. 양손을 사용해 현을 뜯고, 다섯 번째 손가락부터 퉁기고, 두 개의 줄을 동시에 울린다. 현을 비벼 소리 내고, 장구 연주자는 채로 북통을 치거나 손가락으로 두드리기도 한다.

 

반면 "미궁”은 '하드보일드 아방가르드'다. 이 작품은 김수근의 공간사에서 발행하던 잡지 <공간>의 100호를 맞아 위촉 받은 작품이었다. 건축계의 모더니스트 김수근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현대음악제를 개최했다. 당시 뉴욕에서 활동하던 홍신자가 안무를 맡아 “미궁”에서 춤을 추면서 웃고 울고 절규하고 신음했다. 반주를 하던 황병기는 활로 가야금 현을 두드리거나 문질렀다. 장구채로는 공명판의 뒤를 문지르고, 술대를 현 사이에 끼워 앞뒤로 퉁겼다. 가야금의 머리 부분을 목탁처럼 두드리기도 했다. 두 사람은 음악이 한 번도 가지 않은, 전인미답의 길을 걸어갔다. 1979년에는 독일 자르브뤼켄 방송이 주최하는 현대음악제에 황병기와 작곡가 박영희가 함께 초청을 받아 국악을 연주했다.[3]

 

국악의 세계화

황병기는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올릭픽을 계기로 국악의 세계화에도 힘써 “하림성”(1982), “밤의 소리”(1985), “남도환상곡”(1988), “소엽산방”(1990) 등을 발표했다. “하림성”은 대금 독주를, “소엽산방”은 거문고 독주를 위한 작품이었다. 또 “밤의 소리”는 조선조 화가 안중식의 그림 “성재수간도(聲在樹間圖)”에서 악상을 떠올린 작품이었다.

 

 

황병기와 백남준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의 음악전문잡지 <음악예술>을 통해 백남준 씨의 활동을 관심있게 지켜보던 차에 1968년 그에게서 가야금을 배우던 백남준의 누님을 통해 뉴욕에 사는 백남준 집을 방문했다. 경기고 4년 선후배 간이던 그들은 이내 친구가 됐다. 그해 뉴욕 타운홀에서 백남준이 샬럿 무어만과 현대예술 퍼포먼스를 할 때 찬조출연했다. 백남준 사후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에 들어선 백남준 문화재단의 이사장을 맡았다.

 

1988년 월북 예술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발표되자 정남희의 가락을 바탕으로 1989년 정남희제 김윤덕류 산조를 발표했다. 몇 차례 유럽을 방문했을 때 윤이상을 만난 것을 인연으로 1990년 평양에서 열린 통일음악회의 초청장을 받았다. 여창 가곡 김월화, 판소리 오정숙, 서도소리 오복녀 등 인간문화재와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 모두 14명의 음악인들로 ‘서울전통음악연주단’을 구성하고 그해 10월 북녘 땅을 밟고 평양에서 수차례의 공연을 가졌다.

 

그 시기에도 작곡을 게을리하지 않아 1995년 박종원 감독의 영화 <영원한 제국>의 음악을 담당했고, “춘설”(1991 “달하 노피곰”(1996), “시계탑”(1999)[4]을 발표했다. 1997년에는 정남희제 황병기류 산조를 발표했다.

 

* 황병기 선생이 "미궁"을 연주할 때에는 서양 현악기의 활을 쓰기도 한다.

 

전통예술 안목의 아방가르드

황병기는 2006~2011년 기간 중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으로 재직하면서 과감한 선택과 기용의 묘를 택했다. 일탈의 수가 늘어날수록 악단의 분위기는 이상하리만치 안정됐다. 예를들면 재독 작곡가 정일련을 발굴한 일이다. 그로 인해 국립국악관현악단은 현대음악적 문법을 구사하는 작곡가와의 호흡에 걸림돌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를 가야금의 명인으로만 기억할 뿐이지만 그는 여러 장르의 예인들과 교류하면서 과감하고 다양하게 예술활동을 벌였다.

 

그는 법학을 전공했으면서도 평생 가야금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에서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 좋아하고 즐기는 일을 찾으면 틀림없이 잘하게 되고 기필코 성공할 것이다.”

 

Note

1] 임아영, 황병기 - 범아시아적 음악을 꿈꾸는 국악인", 네이버 캐스트 인생스토리

 

2] 황병기는 인생의 절정기에 있는 학생들이 생업으로서 가야금 기량을 배우기보다 강의 듣는 시간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예컨대 매년 학생들의 정기연주회를 열고 학년별로 떡 한 시루씩 쪄오라 했다. 연주회가 끝나면 밤이 이슥하도록 학생들과 관객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떡을 떼고 음료 마시면서 "아, 오늘 참 행복한 날이었다. 축제를 잘 치렀다"는 생각이 들도록 유도했다. Ibid.

 

3] 송현민, “황병기 - 시대의 아방가르드”.국립극장 미르 Vol.343, 2018.8, 59~60쪽.

 

4] 황병기는 1999년 서울대병원에서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이 끝나고 재활치료를 받을 때 밤에 입원실 밖으로 조명을 받아 빛나는 서울대병원의 상징물인 시계탑이 보였다. 평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가 별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당장의 비참한 현실을 잊기 위해 베토벤의 생애 마지막 파아노 소나타 악장을 떠올리고 아름다운 곡을 구상했다. “시계탑”은 수술 후에 아름다운 세계를 동경하는 심경을 묘사한 곡이다. [주1] 네이버 인터뷰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