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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의 선견지명

Onepark 2020. 2. 25. 23:00

2월 25일 여당 대변인이 코로나19 방역 대책을 기자들에게 브리핑하면서 '봉쇄'(containment) 이야기를 꺼냈다가 같은 날 대통령까지 나서서 TK 지역봉쇄를 부인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중국이 우한 지역봉쇄를 한 영향도 있지만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스탈린그라드, 레인그라드 봉쇄(siege) 작전이 말해주듯이 전쟁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로마 군대의 예루살렘 포위공격과 같은 참상에 비할 바 아니다. 그럼에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남아 민족의 살길을 찾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탈무드에도 나오는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다.[1]

 

유대-로마 전쟁의 발단

 

요하난 벤 자카이는 서기 66년부터 70년까지의 ‘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예루살렘 성안에 살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유대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聖殿)이 불태워지고, 결국 국가를 잃어버리고, 민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디아스포라"(Diaspora)에 내몰리고 말았다. 혹자는 로마 총독의 재판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것의 죄과라고도 하지만 당초 사소해 보이는 지역의 소요사태가 발단이 되었다.

로마제국은 '카이사르 이래 주변국을 정복하면서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를 포용하는 관용 정책을 폈다. 처음 유대 나라를 로마제국으로 편입할 때 유대인 최고 제사장에게 종교적 통치권을 인정하고, 예루살렘 성벽 재건과 군사적 방어권도 허락했다. 주요 항구 야파와 해상무역권을 돌려주고, 해상교역에 있어서도 유대인에게 그리스인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덕분에 유대인은 경제적 번영을 누렸고 당시 유대인 인구는 바빌론의 1백만을 포함해서 대략 8백만 명 정도로 늘어났다.

 

서기 66년의 유대인 반란은 지금의 트리폴리인 카이사리아에서 그리스인과 유대인 사이에 벌어진 큰 소송에서 그리스인이 이긴 직후에 일어났다. 승소한 그리스인들이 유대인을 죽이고 승리를 축하하는 동안 로마군 수비대가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민심이 흉흉해졌다.바로 이 무렵 로마총독 플로루스가 유대인들이 '속주세'를 체납하자 예루살렘 성전에서 17 달란트의 금화를 강제집행하였다. 이에 이방인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분개한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성난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로마 수비대를 급습해 병사들을 주살했다. 그 뒤 급파된 시리아 주재 로마군대마저 성난 폭도들에게 패하고 퇴각해야 했다. 이에 로마황제 네로는 로마제국의 명장인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에게 최정예 3개 군단을 이끌고 가서 유대를 정복하라고 명령했다.

 

요하난 벤 자카이의 예루살렘 탈출

 

베스파시아누스는 부대를 이끌고 유대 지방 정벌에 나섰다. 3년째 되던 해인 68년 그는 유대 지방 대부분을 점령했으나 유대 열심당원들이 농성하고 있는 예루살렘은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예루살렘 도성을 포위하고 주민들이 굶주려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그때 성안에는 열심당의 무장투쟁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예견한 유대인 평화주의자가 있었다. 유명한 바리세파인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Yohanan ben Zakkai)였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는 민족의 독립보다는 유대교 보존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항복을 주장했으나 강경파인 열심당에 의해 묵살 당하고 말았다. 그는 유대 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직접 로마군 사령관과 협상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자신의 확신을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탈출계획을 짰다. 제자들은 길거리로 나가 옷을 찢으며 슬픈 목소리로 위대한 랍비 요하난이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그들은 열심당원들에게 존경하는 랍비의 시체를 도성 밖에 매장하여 전염병이 퍼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제자들은 랍비가 누워있는 관을 메고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로마군대 진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만나 머지않아 그가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여 환심을 샀다. 랍비에게 신통력이 있었다기보다 국제정세에 밝은 그로서는 네로 다음의 지도자는 조야의 신망을 얻은 군사실력자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던 터였다.

그래서 장군에게 간청했다. 그가 황제가 되면 자신들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유대 경전을 공부할 수 있게 조그만 학교를 세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에 대한 예언에도 놀랐지만 거창하지 않은 요청이라서 그에게 호의를 베풀겠다고 약속했다.

 

예루살렘 성의 함락과 랍비학교의 개교

 

그 해 얼마 되지 않아 네로 황제가 자결했다. 68년 세 명의 정치군인들이 왕위에 올랐으나 모두 몇 달 만에 암살 당했다. 그러자 유대 원정군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가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고 그 이듬해 로마 원로원이 그의 즉위를 인준했다.

황제에 즉위한 베스파시아누스는 후임사령관인 아들 '티투스'에게 약속을 지키도록 했다. 하지만 유대 독립전쟁은 마사다 항전까지 몇년을 더 끌었다. 예루살렘 성안에서도 여호와가 지켜주시는 거룩한 도성이 이교도에 함락될 리 없다며 '결사항전'을 외친 열심당원들이 득세하였다. 이들은 화평을 주장하거나 도망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처단했다. 심지어는 죽을 각오를 다지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식량마저 불태우기까지 했다.

 

티투스 장군[2] 휘하의 로마 군대는 착실히 공성전을 준비했다. 사방 높은 언덕위에 자리잡은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기 위해 성벽 높이의 인공산을 쌓고 성벽 밑으로 참호를 팠다. 마침내 로마군대의 강철 추가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리자 마침내 70년 8월 10일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성전은 불태워졌다. 여러 날에 걸친 살륙과 파괴, 약탈은 유대인들이 저항했던 기간만큼 배가되었다. 그 참상은 예수가 예언한 대로 헤롯의 화려한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았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 역시 군인으로 독립전쟁에 참전했다가 로마군의 포로가 되어 전쟁의 전말을 목격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예루살렘 공방전 당시 성 안에는 어림잡아 27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있었는데, 포로로 잡힌 유대인은 9만 7천 명이었고, 공방전 과정에서 사망한 유대인은 무려 110만 명이었다. 로마-유대 전쟁으로 인해 유대 민족이 거의 전멸하고 만 것이다.

 

독립전쟁이 처절한 실패로 끝나자 전쟁을 주도한 열심당과 자객당, 상급제사장· 대지주· 귀족 중심의 사두개파, 쿰란 수도원 중심의 에세네파가 모두 사라졌다. 이제 유대교는 사두개파의 소멸로 예배를 이끌 제사장 그룹이 사라지고 오직 바리새파만 살아남았다. 그 결과 유대교는 사제 없이 평신도들이 지키는 종교가 되어 평신도 모두가 성경을 읽고 돌아가면서 강론을 하기 위해 글을 익혀야 했다. 이후 유대 공동체는 공부를 많이 한 랍비가 이끄는 전통이 수립되었다.

 

유대인 교육의 전통

 

요하난 벤 자카이가 지도하는 소수의 바리새인들은 73년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얌니아(Yavneh)에 유대학교 ‘예시바’를 세울 수 있었다. 이로써 유대 교육과 문화유산은 가까스로 소멸의 위기에서 살아남게 되었다. 거기서 율법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하고 율법학교를 개설했다. 모세 5경(토라)을 가르쳐 매년 소수의 랍비를 길러내고 유럽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 마을에 보냈다. 그들은 거기서 시나고그를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쳤다. 이것이 디아스포라로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들의 생존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유대인에게 교육은 곧 신앙이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나라는 비록 망해서 없어졌지만 예시바를 통해 유대교 전통이 전승되기만 한다면 유대 민족은 역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유대 랍비를 길러내는 율법학교 예시바에서는 1학년을 ‘현자’, 2학년을 '철학자'라 하고 3학년이 되어야 비로소 ‘학생’이라고 불렀다. 겸허한 자세로 배우는 자가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으며, 학생이 되려면 수년 동안 수업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전통 속에 율법학교를 졸업한 랍비들은 스스로 ‘평생학생’이라는 자각을 품고 공부를 한다. 랍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유대인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학습공동체’이다. 그리고 랍비들은 교육을 통해 율법의 기본정신 곧 ‘정의와 평등’ 개념을 유대인들에게 철저히 각인시켰다. 그들에게 정의란 공동체 내의 약자를 돌보는 것이었다. 또한 평등이란 이 세상 통치자는 여호와 한 분이시며 피조물인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이다. 유대인들은 나이 고하, 직위 유무에 불구하고 서로 평등하게 소통할 수 있으며 도전적으로 질문하고 치열하게 논쟁할 수 있는 ‘후츠파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비록 뿔뿔이 흩어져 생활하면서도 교육을 통해 그들의 언어와 전통과 정체성 곧 민족혼을 2천년 동안 잃어버리지 않고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교육의 힘이 단절과 소멸의 위험에 처한 민족혼을 구해내고 동질성을 지켜 더욱 융성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했다. 철저한 교육으로 다져진 유대 공동체의 전통과 정체성은 공동체의 미래를 보장해주었다.

 

유대 정신을 오늘에 계승한 히브리 대학교

 

유대인들이 교육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는 이스라엘 최고 명문인 히브리대를 건국 30년 전인 1918년에 설립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동료 유대인 석학들과 함께 주춧돌을 놓았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지식재산권 등 모든 재산을 기증해 대학 발전을 이끌었다.[3]

히브리대는 이스라엘을 세계적인 창업국가로 키운 원동력이 됐다. 이 대학 출신으로 10년째 총장을 맡고 있는 메나헴 벤사손은 "우리 대학의 힘은 탄탄한 기초과학 연구와 끊임없는 기술 혁신이라는 아인슈타인 유전자에서 나온다"며 기초학문 연구를 위해 캠퍼스를 여러 곳에 운영하고 있는데, 창의성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히브리대는 연구자들의 특허 등 창의적인 성과에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학생들에게 연구에 참여할 기회를 주고 기업에서 경험을 쌓게 한다. 이를 통해 대학과 기업의 긴밀한 협력을 이끌어낸다. 교수의 강의는 15분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사업 시뮬레이션과 토론으로 현장 감각을 키운다.

이런 전통은 전임 총장들로부터 이어져온 히브리대의 교육 방식이다. 1964년에는 대학 안에 '이숨'(히브리어로 '실행')이라는 기술 이전회사를 설립했다. 이 덕분에 1만여 개의 특허와 2800여 건의 발명, 900여 개의 라이선스와 176개 기업이 탄생했다. 2017년 인텔이 150>억달러(약 17조원)에 인수한 자율주행차 핵심부품업체 '모빌아이'도 이솜의 작은 실험실에서 출발한 회사다.

이 대학 전 총장이자 아인슈타인 지식재산권 책임자인 하노흐 구트프로인트는 "캠퍼스의 창의력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기업과 만났을 때"라며 "우리의 교육이 히브리대의 위대한 첫 총장으로 불리는 아인슈타인의 창의력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2019년 벤사손 총장이 방한해 창업진흥원과 협약을 맺고 대학생들의 창업·기업가 정신 함양을 돕기로 했다. 국내 대학들과 스타트업 지원 협약도 체결했다. 이제 한국에서도 세계적인 ‘캠퍼스 창업’이 확산돼야 할 때다. 히브리대를 벤치마킹한 중국 칭화대의 칭화홀딩스는 이미 샤오미, 바이두 등 정보기술(IT) 기업의 산실이 됐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 켄달스퀘어와 스탠퍼드대 혁신파크도 산·학·연 협력으로 첨단기술의 메카가 됐다.

 

Note

1]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교육으로 민족을 지켜낸 유대인 학자 요하난 벤 자카이", 조선뉴스프레스, 2017.10. 

2010년까지 KOTRA에서 근무했던 홍 교수는 글로벌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2017년 <유대인 경제사> 10권을 완간한 데 이어 2021년 1월부터는 조선일보에 '新유대인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2] 예루살렘 공성전을 지휘한 로마 장군 티투스는 역사서와 예술사에 자주 등장한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 (Clemency of Titus)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모차르트가 1791년 레오폴드 2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에 쓰려고 3주 만에 서둘러 완성했다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티투스는 아버지를 따라 유대 원정에 참전했을 때 성경 사도행전 25장에 나오는 이그립바 2세왕의 누이 버니게 공주와 사귀었다. AD70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로마의 장군으로서 로마에 개선했을 때 버니게 공주를 데리고 간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적대적이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첫머리에도 나오지만, 로마 시민들은 제2의 클레오파트라 이방여인을 황후로 맞을 수 없다고 소리높이 외친다.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에 이어 제위에 오르지만 로마 시민들의 반발에 그녀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만다. 그는 콜로세움을 세우고 로마 시민들에게 큰 위안과 즐거움("빵과 서커스")을 안겨준 인기 있는 황제였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악을 행한 것에 대한 진정한 참회가 없었기에 그의 인생은 엉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티투스는 재위 2년 만에 41세를 일기로 열병으로 죽었다.

 

3] 한국경제 고두현 논설위원, "히브리대 총장들", 2019.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