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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iness

[예배] 성령을 따라 사는 생명의 삶

Onepark 2021. 12. 19. 19:00

P: 장로님, 요즘 서로 사랑한다는 사람들 사이에 끔찍한 일이 하루 걸러 잇따르고 있어요.

B: 그러게 말입니다. 교제하던 여성이 그만 만나자고 하면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오"하고 돌아서면 될 터인데 흉기를 들고 여자 집을 찾아가 칼부림을 하다니요!

 

P: 컴퓨터 게임을 많이 한 젊은이들은 자기가 점 찍은 사람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못 견뎌 하는 것 같아요. 게임 속에서는 재빠른 손놀림과 적절한 시기에 투입하는 아이템으로 무엇이든 쟁취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니까요. 그러니 분노가 치밀고 상대방을 위협해서라도 자기 뜻대로 하려는 것 아니겠어요?!

B: 상대방을 인격적 존재로 인정한다면 그가 무슨 결정을 하든지 존중해줘야 할 텐데요.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시지 않았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을 때에도 내버려 두셨거든요. 낙원에서 추방하신 후 우리 인간이 스스로 죄를 깨닫고 돌아서기를 한없이 기다려주신 분이었습니다.

 

P: 데이트 폭력이나 스토킹, 그루밍, 가스라이팅, 치정살인 사건이 속출하는 것에는 오늘날의 그릇된 성도덕, 바르지 못한 인간관계, 은밀하게 이뤄지는 성매매 같은 사회분위기도 큰 몫을 한다고 봅니다.

B: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사회현상도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 못지 않게 자신의 분출하는 욕구와 분노를 이성이나 규범의식을 가지고 컨트롤하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지난 12월 12일 온누리교회 이재훈 목사님이 하신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설교 말씀은 큰 가르침이 있다고 봅니다.

 

P: 네, 저도 CGNTV를 통해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YouTube를 통해서도 다시 볼 수 있지요. "육신의 욕망을 억누르려고 하는 금욕주의는 실패한다." "마치 귤을 까면 그 안에 새로운 여러 조각의 과육이 있는 것처럼 성령의 열매가 하나의 큰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B: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非신자들도 이해하기 쉽게 말씀하셨지요. "참된 사랑 속에서 기쁨도, 화평도, 오래 참음도, 자비도, 절제도 가능하다"는 말씀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지으신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도 복습하는 의미에서 이 목사님의 메시지를 다시 들어볼까요?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gentleness and self-control. Against such things there is no law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과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지할 율법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22, 23)

 

* 서울 온누리교회 이재훈 담임목사. 출처: CGNTV

하나님이 히브리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신 것은 출애굽이 목적이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 redemption)으로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신 것은 우리가 부활의 생명으로 성령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 출애굽(Exodus from Egypt)이 자유를 주신 십자가라면 가나안은 성령을 따라가는 삶의 모형이다. 십자가는 부활을 위한 과정이다. 부활을 통해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새 생명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목적이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지금의 터키)의 교회에 편지를 보내 강조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믿음 위에 성령님이 임재하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다.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 그러면 결코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욕망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5:16-18)

 

우리는 욕망을 따라 살 것인지 성령을 따라 살 것인지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영적인 삶이란 끊임없는 싸움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이러한 갈등이 있다면 영이 살아 있다는 것이고 그 고민 자체가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여기서 ‘육체’란 우리의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옛사람의 본성을 뜻한다.

 

금욕주의는 우리 몸 안에 있는 어떤 필요와 욕구를 죄악시한다. 이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어느 한 영역의 행실을 죽일 수 있어도 또 다른 육체의 본성이 살아난다. 보지 않고 먹지 않고 만나지 않고 세상과 담을 쌓음으로써 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중세시대의 추악한 범죄는 수도원의 담벼락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 있다. 세상과 단절하여 몸을 가혹하게 하는 것으로 육체의 본성을 제어할 수는 없다. 어떠한 규칙으로 몸의 행실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도 착각이다.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만으로는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없다.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지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사는 일이다.

 

만일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로마서 8:13)

 

* 동해안 상공에 나타난 먹구름 속에서도 주변을 밝히고자 애쓰는 태양 빛은 마치 선과 악의 대결을 보는 것 같았다.

 

과거 청교도들은 이것을 ‘죄 죽이기’라고 불렀다. 여기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가짐으로써 세울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옛사람도 십자가에 못박혀 장사지낸 것이다. 옛사람이 심판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셨음을 믿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육신의 욕망이 일어날 때마다 나의 옛 사람은 죽었다고 선언할 수 있다. 옛사람이 더 이상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하나님께 산 자로서 자신을 드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 안에 성령의 임재함이 충만해질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는 성령을 따라 성령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다. 그 선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계속하여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영적 생활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다. 이렇게 영적 생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갈라디아서 5:19-21)

 

옛 자아는 죽었지만 그 영향력은 여전히 살아 있다. 육체의 일들, 특히 성적인 욕망이 우리 자신을 파괴하고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을 받은 것조차 방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원수를 맺고 다투고 시기하고 분노하고 분열하는 것은 관계를 깨뜨리는 사회적 죄악을 낳는다. 방탕한 사회적 분위기도 영향이 크다. 반응이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육체의 일들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밖에도 많을 것이다.

반면 점진적으로 결실을 맺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 아홉 가지이다. 이것이 단수인 것은 마치 귤과 같이 한 열매 속에 또 다른 열매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열매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인 사랑이다. 이것이 모든 것을 포괄하여, 예컨대 기쁨 희락의 열매는 행복한 사랑이고, 화평은 하나가 된 사랑이다. 오래 참음이란 인내하는 사랑이고, 비는 친절한 사랑, 양선(良善)은 이기심이 없는 착한 사랑이다.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사랑이다. 충성은 책임감 있는 사랑, 온유는 겸손한 사랑, 절제는 훈련된 사랑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자신을 내어 드릴 수 있는 통제력을 의미한다. 즉 사랑의 열매로 시작해서 그 절정이 절제로 끝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충만한 사랑은 절제된 사랑이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이다. 무분별한 사랑이 아니라 분별력 있는 사랑이기에 때로는 징계하시고 심판하시고 우리를 훈련하는 것이다. 사랑에 절제가 없다면 악의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 사랑의 열매는 절제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열매는 나타난다. 성령의 은사는 평생 단 한 번만 나타날 수도 있다. 성령의 은사는 상황에 따라,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은사는 전적인 성령의 주권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반드시 또 몇 번씩이고 나타난다. 막을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 CGNTV 온누리교회 예배 후에는 명요셉 오르가니스트의 찬송가 연주가 감동을 안겨준다. 출처: CGNTV

 

사랑의 열매는 불법 재판으로 십자가에 못박고 모욕한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예수님에게서 나나난다. 십자가의 고통이 사랑의 열매를 막을 수 없었다.

희락의 열매는 감옥에 갇혀 있는 가운데서도 기뻐하라고 한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화평의 열매는 핍박과 시험에 직면해서 분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던 야고보에게서 나타난다.

인내의 열매는 순교의 시험과 위험 속에서도 인내하며 그 시험과 순교를 이겨낸 성도들에게서 나타난다. 사도 바울이 끊임없이 쓰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절제였다.

 

이 모든 열매는 한 번의 선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천, 순종, 계속 그 길을 걸어갈 때 성령의 능력 가운데 열매가 맺어진다. 열매가 또 다른 열매를 맺고, 사랑이 희락의 열매를, 희락이 오래 참음의 열매를, 오래 참음이 자비와 양선의 열매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해준다.

 

육체의 욕망을 따르는 삶은 분명 또다시 죄의 종이 될 뿐만 아니라 율법의 종이 되고, 자유를 잃어버린 삶이다. 그러나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는 말씀처럼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참으로 자유롭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따라 산다. 이 축복을 누림으로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가 충만하게 맺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 (갈라디아서 5:16~26)

 

잔잔해 보이는 파도가 끊임없이 포말을 일으키며 해변으로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