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도 과연 기적은 있는가? 우리도 기적을 체험할 수는 없는가?
오래 된 신문을 뒤적이다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사와 사진에 눈길이 갔다.
방 한쪽에 쳐박혀 있던 신문더미 속에 들어있었는데 마치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곱 개 장기를 한꺼번에 이식 받은 일곱 살 은서가 엄마 품에 안겨 미소 짓는 모습이었다.[1]
일곱 살 은서는 날 때부터 모유조차 소화시키지를 못했다. 위장·소장·대장 등 소화기가 정상적으로 붙어는 있지만 연동 운동[2]을 하지 않는 '만성 가성 장폐색증'이라는 희귀 질환을 앓았기 때문이다. 밥을 조금만 먹어도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다 토해내는 바람에 입으로는 아주 적은 양의 식사만 할 수 있었다.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은 80% 이상을 영양제와 수액 주사를 맞으며 근근이 버텨왔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석 달 전 넷플릭스로 보았던 영화가 오버랩되었다.
<천국에서 온 기적(Miracles from Heaven)>(2015)이라는 미국 영화였다.
실화를 토대로 만들었다기에 무슨 기적이 복수형으로 일어나는지 관심있게 지켜본 영화였다.
텍사스에서 동물병원과 농장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행복하게 자라는 세 자매가 있었다. 어느날 10살 짜리 둘째 애너벨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먹은 것을 토하고 음식을 전혀 소화시키질 못했다. 병원에 가니 소화기 내장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희귀병 진단이 내려졌다. 이 분야의 최고 명의로 소문난 의사를 수소문해서 보스턴까지 찾아가지만 그의 진료를 받으려면 아홉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엄마가 비상수단을 강구한다. 보스턴 소아병원의 누카 박사는 아주 친절하게 진료에 임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별 차도가 없어 애너벨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보험처리가 안되는 항목도 많아서 병원비가 크게 늘어나 가정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른 탓이었다.[3]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한 후 천명(天命)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은서의 부모는 일단 장기이식관리센터에 이름을 올려놓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서 장기를 이식 받을 수 있는 어린 천사를 기다렸다. 이를 위해서는 장기 크기가 비슷한 또래 뇌사자의 장기 기증이 있어야 하며, 기증자의 소화기 상태가 이식하기에 적당해야 하고, 혈액형 또한 은서의 혈액형(AB형)과 같아야 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소아·청소년 뇌사자 발생 자체가 1년에 한두 명일 정도로 몹시 드물기에 기적이 아니면 바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도우셨다. 2011년 10월 서울아산병원에서 뇌암에 걸린 9살 뇌사 어린이의 부모가 이런 조건을 다 갖춘 장기를 은서에게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한편 독실한 침례교 신자인 애너벨의 부모는 교회에 나가서 간절히 기도하고 목사와 교우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했다. 그런데 어느날 큰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농장 한켠에 큰 고목나무가 서 있었다. 애너벨이 언니와 함께 나무 위에 올라가서 놀다가 그만 발을 헛딛어 나뭇속이 뻥 뚫려 있는 나무기둥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깊이가 9m나 되어 애너벨의 생사마저 알 길이 없었다. 911에 신고하여 소방차가 달려왔지만 안에 사람이 있으니 나무를 전기톱으로 절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애너벨이 안에 갇혀 있는 동안 나머지 식구들은 교우들과 함께 나무기둥을 붙잡고 하나님에게 살려주시라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몇 시간만에 몸이 호리호리한 소방대원이 크레인의 줄을 타고 내려가 밑바닥에 떨어져 있는 소녀를 구해서 안고 나왔다.[3]
우리가 바라는 기적(奇蹟, miracle)이란 무엇인가?
확률적으로 발생 가능성이 아주 적은, 신이 행한 일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현상이 일어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똑 같은 조건을 맞춰 놓고 같은 방법으로 실시하더라도 같은 결과가 나올지 여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면 이미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실험을 통해 입증되었으므로 더 이상 기적이 될 수 없다.
은서의 경우 뇌사자의 장기 7개를 기증받아 한꺼번에 이식하는 고난도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한꺼번에 장기 7개가 일시에 몸 밖으로 빠져나가면 그 안의 혈액과 조직액도 함께 빠져나가면서 몸 전체 혈액순환에 장애가 올 수 있다. 기증자의 장기를 모두 가져와 붙이는 시간도 최대한 줄여야 했다. 수술진은 이식 장기가 도착하기 전에 은서의 복부 장기를 한 번에 떼기 좋게 미리 박리(剝離)해 놓고, 대동맥과 연결된 혈관만 남겨놓았다. 수술팀은 뇌사자의 장기가 수술실에 도착하자마자 대동맥과 연결된 혈관들을 끊어서 7개 장기를 일시에 떼낸 뒤, 현미경을 보면서 이식 장기를 최대한 빨리 붙였다. 그래도 9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다.[4]
애너벨은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다. 응급조치만 하고 급히 병원으로 데려갔으나 별 다른 처치를 받지 않고도 골절이나 큰 상처 없이 회복이 되었다. 그런데 애너벨이 아주 뜻밖의 말을 했다. 바닥으로 추락했을 때 그녀의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와서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는 하늘나라로 갔는데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다. "네가 나았다"고 하셔서 너무나 행복한 느낌 속에 머물러 있다가 깨어났다는 것이다. 애너벨이 고목나무 속으로 떨어질 때 충격을 받아서 중추신경계가 다시 활성화되었는지, 아니면 애너벨이 말한 대로 예수님의 치유의 손길이 닿아서 그랬는지 기적처럼 애너벨의 소화기 장기는 모두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서는 수술경과가 양호하여 이제 태어나서 처음으로 밥도 배불리 먹고 꿈에만 그리던 배우 승기 오빠도 만날 수 있었다. 갈비도 먹고 과자도 먹으면서 남들처럼 방귀도 뿡뿡 뀔 수 있게 되었다. 복강수술을 마친 사람은 방귀가 나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던가!
애너벨의 엄마는 그동안 너무 마음 졸이며 살아 왔기에 애너벨이 체험한 기적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자기와 애너벨이 겪은 일을 책으로 펴내기로 마음 먹었다.[3] 거의 동시에 소니 픽쳐스에서 영화판권을 사서 패트리샤 리겐 감독이 연출을 맡아 영화로도 만들었다.
은서와 애너벨이 겪었던 만성 가성 장폐색증을 앓고 있는 어린이가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나오는 모양이다.
그러나 장기이식 조건을 모두 갖춘 뇌사자를 어떻게 기다린단 말인가! 또 애너벨네 집 앞에 있는 고목나무는 이미 쓰러졌을 뿐더러 9m 높이에서 일부러 떨어진다 해도 같은 결과가 나오기는커녕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서 우리는 기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천지만물의 대주재자인 하나님이 보시기에 은서나 애너벨이나 똑같이 기적을 베풀어주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도 일단 길모퉁이만 돌아서면 기적을 만날 수 있으리라(A miracle waits for us around the corner.)는 믿음을 갖고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수 밖에 없다.
은서의 경우 조건이 딱 들어맞는 뇌사자를 한 병원에서 만날 수 있었다.
또한 애너벨은 3~4층 높이에서 떨어졌음에도 골절이나 큰 상처 없이 무사했고 더욱이 꿈쩍도 않던 장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확률적으로도 발생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영역에서 자애로운 손길이 임하여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사람들이 해야 할 일도 많이 남아 있다.
은서의 경우 기증자 가족의 결단, 의료진의 기술, 위법 시비를 무릅쓴 의료진의 용기가 함께어우러져서 마침내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기적이 완결되려면 법률상으로 몇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본래 장기 이식이 가능한 장기는 간·신장·심장·폐·소장·췌장·골수·안구·췌도 등 9개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은서의 경우 보건당국으로부터 "수술 불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2011년 11월이 되어서야 위·대장·십이지장·비장 등 4개의 장기도 이식이 가능하도록 하는 장기이식법 시행령 개정안이 뒤늦게나마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소장과 동시에 이식이 필요할 경우로 한정됐지만, 그동안 이식이 허용되지 않았던 데 비하면 엄청난 진전이었다. 2011년 중에 장기를 기증하고 사망한 뇌사자는 368명으로, 생명 나눔의 행렬은 이어지고 있다. 장기이식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는 2만명을 훌쩍 넘는다. 은서의 기적이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될 일이다.[5]
더욱이 애너벨의 경우에는 "이게 다 쇼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애너벨 엄마는 교회 강단에 올라가 의심하는 이들을 반박하지 않고, 대신 보스턴에서 애너벨을 위해 시간을 내서 수족관을 구경시켜 준 레스토랑 여종업원 , 형편이 딱한 것을 알고 새치기 진료를 눈감아준 소아병원의 접수담당자, 공항에서 한도초과 카드가 모두 거부되자 수작업으로 발권해준 항공사 직원 같은 사람 덕분에 자기의 모든 삶이 하루하루 기적 같았다고 간증하였다.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보스턴의 병실에 같이 있었던 소아암 환자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자기 딸에게 하나님을 소개해줘서 애너벨 덕분에 자기 딸이 평온하게 하늘나라로 갔다고 말해 장내가 숙연해졌다. 어찌 보면 이웃 사람과 관계자들의 진정어린 이해와 협조를 얻는 것이 더 큰 기적이었던 셈이다.
기적은
갈급(渴急)한 사람에게
터지는 생명의 샘
A Miracle is
a Gracious Encouragement
for an Ardent Prayer.
(17음절의 단시)
Note
1] 김철중, "뱃속 일곱개 장기 한꺼번에 이식성공… 일곱살 은서의 기적", 조선일보, 2012. 2. 17.
2] 연동 운동(蠕動運動)이란 위나 창자, 요관과 같은 대롱 모양의 기관에서 내용물을 내보내기 위하여 대롱 벽의 민무늬근이 율동적이고 연속적으로 수축하여 일어나는 운동을 말한다. 이 운동작용에 의하여 중력에 반하는 물구나무를 서 있을지라도 음식물이 위장을 통과하면서 소화 흡수되고 그 찌꺼기가 직장까지 가는 것이다.
3] Christy Wilson Beam,Miracles from Heaven : A Little Girl and Her Amazing Story of Healing, 2015.
4] 서울아산병원의 집도의 김대연 교수는 "은서는 현재 주사를 통한 영양제 공급을 모두 끊고 스스로 하나하나 맛을 보는 식사를 통해 전체 영양분을 섭취하고 있다"며 "이번 수술은 소화기 전체 장기이식을 통해 소화기 계열 희귀 난치성 질환 치료 가능성을 연 데에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앞의 조선일보 기사.
5] 서울신문 사설, "'은서의 기적' 이어갈 의료시스템 강화해야", 2012.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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