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침 일찍 서둘러야 했다. 체크아웃하는 데만 10분 이상 걸렸다. 룸서비스가 미니바를 썼는지 여부를 일일이 체크한 다음 결제를 마치고 호텔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일행 중 한 분은 이 과정에서 잃어버릴 뻔 했던 선글래스를 찾기도 했다.
어젯밤 네온사인으로 휘황찬란하던 호텔은 화장을 지운 여자처럼 수수해 보였다.
우리가 탄 리무진 버스는 고속도로를 거쳐 웨양(岳陽)으로 향했다. 수 많은 시인이 노래한 동정호와 악양루를 가보기 위함이다.
사통팔달로 뻗어 있는 중국의 고속도로가 주유소등 인프라는 잘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용방법은 서툰 듯 "카드를 넣고 종이를 뽑으시오. 뒤에 생긴 문제는 자기책임"이라는 경고문구가 톨게이트에 서 있었다.
단조로운 고속도로를 달리는 도중에 아침 시간이라서 눈을 붙이기도 뭣하니 이번 여행 일정에 관해 몇 가지 보충설명을 하겠다 하고 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전에 이란, 그리스를 여행할 때 내가 기독교나 교회에 관해서 가이드 해설사 역할을 한 적도 있었음을 먼저 밝혔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사항은 조선 선비들에게 무이산, 여산이 많이 알려져 있었다는 점, 그래서 송도 삼절의 하나인 황진이가 박연폭포를 노래(漢詩) 힐 때 이백이 읊은 여산폭포 못지 않다고 강조했다는 사실, 실사구시의 학자 정약용이 매사 인접한 중국과 견주어 보는 우리의 삶은 참 모순되어 혼자 웃을(獨笑) 수 밖에 없었다(漢詩)는 점, 중국은 역사가 유구함에도 변란과 재난이 빈번했던 탓에 문화재가 제대로 보존되기 어려웠고 최근에 복원된 것들은 외양만 문화재처럼 보일 뿐이라는 점을 이야기했다.
다들 연세가 있으심에도 무탈하게 여행을 잘 하셨는데 진짜 멋있는 여행은 앞으로 하시게 될 거라는 점을 말씀 드리고 터키의 시인 나크 하지메트의 시(英詩) --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았고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가지 않았다 -- 를 낭송하였다.
주말임에도 고속도로나 웨양 시내에 차량이 많지 않아 10시 15분 악양루 잎에 도착했다.
그러나 조금은 실망했다. 동정호를 내려다 보는, 중국식 스케일의 높은 누각을 예상했는데 동정호 호반의 길다란 부지(strip)에 정원을 꾸며 놓고 역대 악양루를 축소한 모형을 여러 채 세워놓았다.
정작 악양루는 엊그제 보았던 심양루 비슷한 규모였다. 그 대신 악양루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나 물품을 전시해 놓은 미니 박물관이 정원 산책로를 따라 죽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12시 32분 발 무한 행 고속열차를 타야 했으므로 악양루 경내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40여분에 불과했다.
과연 그러했다.
양쯔강과 통하는, 바다나 다름 없는 동정호(洞庭湖)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웨양이 군사적 요충지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을 다스리는 권력자로서는 경치를 완상하거나 연회를 베푸는 것보다 작전회의나 전략을 구상하기에 적합한 실용적인 2~3층의 누각이면 족했을 것이다.
삼국시대에 동정호는 오 나라에 속했지만 한쪽은 촉 나라와 닿아 있었으므로 오 나라의 도독 노숙(魯肅)은 이곳에 주둔하면서 수군을 훈련시키고 이를 살펴보기 위한 열군루(閱軍樓)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노숙은 오 나라의 대도독 주유를 이어 촉 나라의 군사 제갈공명과 지모를 겨루다가 46세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중에 평화가 찾아 왔을 때 그 소문을 듣고 문인재사(文人才士)들이 찾아와 이 지역에서 명멸하였던 인물들을 기리고 자신의 글솜씨를 뽐내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악양루는 지배자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건물을 짓고 문인재사들의 글을 새로 걸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연을 가진 악양루를 실감나게 노래한 시인은 두보(杜甫, 위의 사진)가 단연 으뜸이다.
그는 57세 때 악양루에 올라 동정호를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탄복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시를 읊었다.
登岳陽樓 - 악양루에올라, 杜甫
昔聞洞庭水 - 오래 전에 동정호가 아름답다고 들었는데
今上岳陽樓 - 오늘에야 악양루에 오르게 되었네.
吳楚東南坼 - 오 나라, 초 나라는 동쪽과 남쪽으로 갈라서 있고
乾坤日夜浮 -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물 위에 떠 있네.
親朋無一字 - 친한 친구들로부터는 편지 한 통 없고
老病有孤舟 - 늙고 병들어 가지만 가진 것이라곤 작은 배 한 척뿐이네.
戎馬關山北 - 싸움터의 말들이 관산 북쪽에서 뛰어다니니
憑軒涕泗流 - 악양루 난간에 기대어 눈물만 흘리누나.
Climbing Yueyang Tower – Du Fu
Often I have heard of Lake Dongting,
And now I am climbing this tower.
With Wu to the east, and Chu to the south,
I can see heaven and earth floating.
But no word reaches me of family or friends.
Old and sick, I am alone in my boat.
North of the wall are mountains and war.
So, how with my hands on the rails can I not cry?
(Source: 100 Tang Poems)
기차시간에 쫓겨 40여분 만에 주마간산 격으로 둘아본 악양루의 진면목(眞面目)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전혀 다른 인상(印象)을 안겨줬다. 처음 예상대로 경치를 감상하는 전망대가 아니라 요새의 망루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삼국지에서 제갈공명과 자웅을 결하던 오 나라의 장수요 전략가인 노숙(魯肅)의 안목이 놀라웠다. 악양루 한쪽에는 노숙의 묘가 있고 절세미인으로 소문났던, 그의 전임자였던 주유(周瑜)의 부인 소교(小喬) 기념관도 있었다.
드디어 말로만 들었던 악양루 입성이다.
처마 끝이 하늘로 날아 올라갈 듯이 보였다.
이곳에도 중국의 혁명시인 마오쩌둥이 알아볼 수 없는(나로서는 둘째 줄의 上岳陽樓만 식별가능) 달필로 쓴 두보의 시 登岳陽樓가 걸려 있다.
양쯔강과도 통한다는 동정호는 수평선의 끝이 보이지 않으리만치 바다처럼 넓어 보였다.
날이 꾸무럭하여 시계(視界)가 좋지 않은 것이 너무 아쉬웠다.
떠들썩한 중국 관광객들 틈에서 누각의 사방을 둘러보고 내려왔다.
악양루 경내 한쪽에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노숙의 묘가 있었다. 또한 강남 땅을 노리는 조조에 맞서 오 나라의 손권이 먼저 전쟁을 선포하게 만든 강남의 폐월수화(閉月羞花 = 달이 구름 뒤에 숨고 꽃이 부끄러워 할 정도의) 미녀 대교(大喬, 오 나라 손책의 부인)와 소교(小喬, 오 나라 대도독 주유의 부인) 기념관이 있었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천하삼분지계를 구상한 제갈공명이 오 나라의 손권을 찾아가 조조의 100만 대군이 노리는 것은 오 나라의 소문난 미녀 대교와 소교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일러바쳤다. 그리고 조조가 이를 위해 동작대(銅雀台)라는 별궁을 만들고 그가 지었다는 시(攬二喬於東南兮 樂朝夕之與共, 대교와 소교를 동남에서 데려와 조석으로 즐기리라)를 읊었으니 손권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악양루를 돌아나오는 길에 성벽 아래 호숫가 쪽으로 내려가보고 싶었으나 기차 시간에 쫓겨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뛰다시피 걸어 나와야 했다.
그리고 웨양 동역으로 우리를 데려갈 버스를 기다렸다.
두보는 나라를 걱정하며 악양루 난간에 기대 눈물을 흘렸다는데 나는 그 난간에서 쫓기듯 사진만 찍고 떠난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오래 전 미국 뉴욕에서 살 때 나이아가라 폭포 갈 적마다 코넬 대학교가 있는 이타카의 핑거레이크 호반 공원에서 점심을 먹곤 했다. 그리고 나서 유서 깊은 아이비리그 캠퍼스는 30분 만에 자동차로 휙 둘러본 다음 "코넬대 수료"를 외쳤던 일이 생각났다.
역에는 무사히 도착했으나 문제는 점심을 먹을 시간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인솔자는 두 가지 메뉴, 국수와 KFC 치킨 중에서 고르라 하고 치킨을 먹겠다고 한 9명 분을 골고루 사서 나누라고 부탁한 후 자기는 국수 희망자와 함께 역 구내의 국수집으로 갔다. 이 집 국수 맛이 별미였다며 나보고 나중에 올 기회가 있으면 꼭 사먹으라고 말했다.
남은 사람은 KFC에서 티켓 자판기로 주문을 했다가 현금결제가 안 되는 것을 알고 카운터에서 새로 주문을 해야 했다. 9명 분을 봉지에 싸들고 개찰구를 거쳐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정시에 도착한 무한(武漢) 행 고속열차에 탑승한 후 치킨버거 세트를 배분하고 보니 맨 뒷자리의 내 몫이 없는 것 아닌가! 국수를 먹기로 했다가 치킨버거로 마음을 바꾼 분이 중간에서 한 개를 차지한 탓이었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처지가 아닌데" 하며 악양루에서 감동을 받았던 기억은 사라지고 당장의 배고픔에 대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여행기간 내내 연령대에 따른 뒷자리 그룹에 속해 함께 어울렸던 아주머니 한 분이 자기의 치킨버거 절반을 나한테 나누어주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국 여행을 마무리하던 날 공산국가인 중국의 빈부격차 확대 같은 현대사의 모순을 온몸으로 체험한 꼴이었다.
아무리 큰 땅의 물산이 풍부해도 권력자들이 독차지하고 나면 민초는 항상 배를 곯았다. 그렇기에 민초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마오쩌둥이 중원(中原)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초 일정보다 훨씬 이르게 1시 35분 무한 역에 도착했다. 오후에 관광지를 돌아볼 시간이 넉넉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이 편이 더 좋았다. 일본 스모 선수 닮은 한국인 현지 가이드와 상의한 결과 후베이 박물관과 황학루를 방문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했다.
무한에 일찍 도착한 대신 내일 아침의 황학루 방문 일정을 오늘 소화하면 내일 아침은 느긋하게 귀국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연일 7시 반 출발로 피로가 겹친 일행이 모두 이에 찬성하였다. 여행사 측에서는 일정을 자의로 변경하면 고객들로부터 손해배상 청구를 당할 수도 있다 한다.
후베이(湖北) 박물관에서 볼 것은 춘추시대 증(曾)나라의 을 승상(侯乙, Marquis Yi)의 고분에서 발견된 석관과 청동기 부장품들이었다. 1978년 아주 정교하게 만든 각종 청동기 물품과 제례도구, 옥으로 된 장식품과 악기, 무기류가 대거 출토되었다.
여기에 진열된 유물은 예컨대 타악기인 편종의 경우 "증후을 편종"이라고 부르는데 중국 국가1급문물(우리나라의 '국보'에 해당)로 지정된 바 있다.>
오후 3시 50분 해가 많이 길어졌기 때문에 황학루를 보러 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남았다.
도심을 통과하여 황학루로 가는 동안 현지 가이드가 주변의 건물과 황학루 전설의 유래를 설명하였다.
입구에서 황학루까지 가는 길이 꽤 멀어 나이드신 분은 전기자동차를 타고 가기로 하고 나머지 사람은 씩씩하게 걸어서 갔다.
마침 초입에 악비(岳飛)의 동상과 비석이 서 있었다. 북송이 금나라에 쫓겨 남으로 내려 왔을 때 악비 장군은 금과 전쟁을 벌여서라도 고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송나라 왕이 화친 쪽으로 기울었기에 그는 정적 진회의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지금도 악비의 상 앞에서는 합장을 하고 무릎 꿇은 진회의 동상 앞에서는 침을 뱉는다고 한다.
황학루의 전설은 장강이 보이는 높은 언덕 위에 큰 누각을 지었는데 자선과 긍휼, 보은(報恩)의 이야기를 엮어 감동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붙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起] 어느 주막에 드나들던 영감에게 돈이 없어도 신씨 부인은 그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承] 10년째 되는 날 영감은 은혜를 갚겠다며 벽에 귤껍질로 선학을 한 마리 그려주었다.
[轉] 황학 그림 앞에서 손뼉을 치면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으므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신씨 부인은 큰 돈을 벌게 되었다.
[結] 그 후 영감은 선인(仙人)이 되어 다시 나타났는데 피리를 불자 황학이 날아와 흰구름을 타고 올라갔다.
드디어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인 황학루(黃鶴樓) 앞에 섰다.
1989년에 중건하여 콘크리트 구조의 건물이고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어 있었다.
여러 곳을 다녀 보았지만 건축물이나 구조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놓고 어떻게 시문으로 표현하였느냐, 이것을 매개로 무슨 사건이 있었는가를 알아보는 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70세 이상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고 나머지 사람은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다.
이백이 어느 날 황학루(黃鶴樓)를 찾아 시를 한 수 짓고자 했다. 먹을 가는 동안 앞서 다녀간 최호(崔顥)가 지은 시를 보고 이백은 그보다 잘 쓸 자신이 없어 붓을 꺾었다고 한다.
바로 위의 조각은 최호의 시를 바위에 새기고 시인의 조각을 만들어 놓았으므로 일종의 종합예술인 셈이다.
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萋鸚鵡洲
日暮鄉關何處是 煙波江上使人愁
옛사람 이미 흰구름 타고 날아가 버렸고
이곳에는 황학루만 남았구나
황학이 한 번 떠나 다시 오지 않으니
흰 구름만 부질없이 천 년을 떠가네
날이 개인 강 저편엔 한양의 나무가 뚜렷하고
앵무 섬에는 방초가 무성하구나
날도 저무는데 고향은 어디메인가?
안개 피어오르는 강위에서 시름에 잠기네
나중에 이백도 오랜 친구 맹호연을 황학루에서 이별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 - 황학루에서 광릉으로 떠나는 맹호연을 보내며
故人西辭黃鶴樓 - 옛친구를 서쪽 황학루에서 이별하고
煙花三月下揚州 - 버들개지 피는 삼월에 양주로 내려간다
孤帆遠影碧空盡 - 외로운 돛단배 멀어져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
唯見長江天際流 - 오직 보이는 건 하늘에 맞닿아 흐르는 장강뿐
마지막 날 만찬을 위해 들어간 무한의 조차반점(粗茶飯店)은 중국에서는 드물게 보는 퓨전 중식당이었다. 입구에서도 아담한 보살상이 손님을 맞았다.
중국 여행 중 처음으로 둥근 원테이블이 아닌 사각 테이블에 남자와 여자로 구분해서, 다시 말해서 동반한 부인들과 떨어져서 앉았다. 자연히 남자들의 테이블에는 음료가 백주와 맥주 그리고 고급차까지 올라 그 동안 밀린 화제를 나누느라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숙소인 무한 르네상스 호텔(光明万麗酒店)에 투숙하였다.
몸은 피곤하였지만 그 동안의 여정을 되돌아 보느라 잠을 설치기까지 했다.
이튿날 5월 19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2층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중국차를 주로 내놓는 중국 호텔과는 달리 여기서는 커피를 선호하는 외국 손님이 많아서 그런지 커피를 웨이터가 직접 서빙하였다.
그리고 호텔을 떠나 귀국편 항공기가 대기하고 있는 무한 공항으로 향했다.
우리 일행은 중국 강남의 문사철(文史哲) 기행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반년 후에는 이곳 야생동물시장에서 발원했다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전세계적인 팬데믹을 일으켰다.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밀집해 있는 관광의 도시가 2020년 1월 24일부터 4월 초까지 전면 봉쇄(lock-down)되었으니 여행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말로만 듣던 동정호 악양루를 찾으니
시인은 간 데 없고 떠들썩한 사람뿐이구나
가슴을 뛰게 하는 시문(時文)은 여전히 살아있네
I once heard of Dongting-ho and Yueyanlou,
longing for coming here.
The famous poets left the scene with some poems.
And only strangers make noise.
In my sensitive heart,
beautiful and moving poetry still remains.
(Three 17-syllable English haik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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