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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문학기행 5] 루산 풍경구와 백록동 서원

Onepark 2019. 5. 16. 23:00

루산 하워드 존슨 호텔에서 VIP인 것처럼 일박을 하였다.

5월 16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하늘의 비구름은 맑게 개었고 멀리 산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계속 비가 올 줄 알고 풍경구 가는 일정은 취소하기로 결정했으나 다들 마음이 바뀌어 미니 버스를 호텔로 불렀다.

소동파(蘇東坡)가 말한 "루산의 진면목(廬山眞面目)"을 보고 싶다는 기대애 부풀었다. 

 

* 급경사면에 호텔을 지어 건물 구조가 복잡한 까닭에 엘리베이터로 이리저리 오르내려야 했다.
* 호텔 구내 연못의 비단잉어떼

 

해가 뜨면 안개가 걷히리라는 기대는 풍경구에 당도하자 안개 속에 묻혀버렸다.

우리는 맑게 개인 날에는 아름다운 숲과 연봉(連峰)의 스카이라인이 보이고 저 멀리 폭포의 자태도 볼 수 있으리라 상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안개가 더욱 짙어졌음에도 중국 관광객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루산 풍경구를 벗어나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시야가 넓어졌다.

좀 더 기다렸으면 루산의 경치를 잘 볼 수 있겠지만 백록동 서원을 방문하고 오후 3시에는 구강(九江) 역에서 장사행 열차를 타야 하므로 환승센터로 서둘러 가야 했다.

환승센터 주차장에는 어제 우리가 들고 가지 못했던 여행가방을 싣고 관광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은 말 그대로 당대(唐代)의 이발(李渤)이라는 사람이 흰 사슴을 기르며 독서를 하던 곳이었는데 주희(朱熹)가 이 지역의 지사가 되었을 때 부흥시키고 스스로 백록동 서원의 원장이 되었다.

주희는 이곳에서 삼강오륜(三綱五倫)과 중용(中庸)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유명한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유교(儒敎)의 이상을 실현하고 이를 전파하는 데 힘썼다.

1542년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시대의 유학자 안향(安珦)을 기리기 위하여, 백록동 서원을 본뜬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이후 한국 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 마침 중국 초등학생들이 당대의 복장을 하고 수학여행을 왔다.
* 실제로 굴 속에 서원의 상징인 흰사슴 조각을 만들어 놓았다.
* 백운동 서원의 주차장에서 눈에 띈 처음보는 자동차 브랜드와 번호판

 

우리 일행이 탄 버스는 백록동 서원에서 나와 구강(九江) 시내에 접어들었다.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강변의 심양루(潯陽樓)를 찾아볼 예정이었다.

그런데 한식을 끊은지 벌써 닷새째임에도 한식을 먹고 싶다는 일행이 없는 것이 놀라웠다. 

 

* 구강시내 점심식사 장소로 가는 길에 일행 중 한 분이 돌출물에 걸려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 인근 호텔에서 본 기마행렬 병풍 그림

 

심양루는 송나라 때 구강의 옛지명인 심양(潯陽)의 누각, 풀이하면 강가(潯)에서 볕(陽)을 쬐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중국의 4대 기서(四大奇書)의 하나인 수호전(水滸傳)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역시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것은 이야기(storytelling)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익히 들었던 이야기를 현장에 가서 보고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실제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뉴질랜드 여행할 때에도 "반지의 제왕" 영화에 나온 로케이션 장소라 해서 기를 쓰고 찾아다녔던 기억이 났다. 

 

 

우리나라에서도 고우영의 만화까지 수많은 수호전이 번역 출판되었거니와 수호전을 한 번이라도 읽었던 사람으로서 심양루에 올라가는 길에 위 사진의 표어를 보니 섬뜩해졌다.

'청산 녹수'야 푸른 산 맑은 물을 뜻하고 환경보호의 목적이지만 인자(仁者樂山) 지자(智者樂水) 라는 공자 말씀을 들어가며 중국의 정신(中國心)을 부르짖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나/우리는 한족(我華夏, 华夏는 汉族을 스스로 일컫는 말)"이라는 프로퍼갠다였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전통적으로 꺼내 들었던 비장의 무기, 민족주의를 내세워 공자 말씀대로 인자요 지자인 우리 중국인이 환경보호를 잘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말이 내겐 심상치 않게 들렸다.

 

 

예상했던 대로 심양루 안에는 양산박(梁山泊)에 모인 108 호걸(豪傑)이 온갖 표정을 지은, 경덕진 도자기로 만든 피규어(figure)로 죽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수호전에 나오는 몇 개의 극적인 장면이 벽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뭐니뭐니 해도 술에 취한 송강이 일필휘지로 반시(反詩)를 심양루 벽에 쓰는 모습이 압권이었다. 소설 수호전의 삽화처럼 벽에 그려져 있었다. 

 

 

본디 송강은 양산박에 들어가 도적단이 되는 것을 주저했다. 심양에 귀양 와 있는 울분에 술 취한 나머지 복수를 다짐하는 마음을 시로 표현하자 그는 불온분자로 몰려 쫒기게 되었다. 이에 양산박 호걸들이 송강을 구해주었고, 그는 양산박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반시의 내용은 무엇일까. 송대에 실존했다고 알려진 송강이 다 썼다기보다 시내암 같은 후세 사람이 읽는이들의 공감을 얻도록 살을 많이 붙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 경전과 역사를 배우고, 자라서는 권모(權謀)가 있었다네.
사나운 범 쓸쓸히 언덕에 누워 발톱과 이빨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네.
안타깝도다. 두 뺨에 문신 새기고 강주에 귀양 온 가련한 신세.
뒷날 한풀이 하는 날이 오면 심양강은 피바다가 되리.
마음은 산동에 있고 몸은 오나라에 있네.
낯선 땅과 물을 헤메니 서러운 마음뿐이네.
뒷날 뜻을 펼치는 날이 오거든 황소가 대장부가 아니고 바로 나일세.
제남군 운성현 사람 송강 씀

 

* 이기승 이사가 우리 일행에게 송강의 반시를 열심히 풀이해주고 있다.
* 여기서도 의뢰인의 이름을 가지고 멋드러진 한시를 즉석에서 써준다고 했다.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를 읽고 자란 중국의 젊은이들이 심양루에 올라 장강을 바라보면서 포부를 다지고 호연지기를 길렀을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에는 이만한 장소가 어디 있을까 생각하니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나 역시 이곳 저곳 많이 돌아다닌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금강산과 홍길동전, 지리산과 홍의장군전, 내장산과 녹두장군전 이런 조합이 가능할 듯 싶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적인 스케일의 인물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나오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박정희, 정주영, 이병철 등등.

이런 생각을 하며 심양루를 나설 때 시내 쪽으로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 쇼핑몰과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 왔다.

 

* 심양루에 진열된 심양의 특산주. 송강이 마시고 대취한 술은 어느것일까?

 

3시 15분에 장사(長沙)행 고속열차를 타야 했으므로 우리는 시간 여유를 갖고 구강역으로 갔다.

심양루를 찾았던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구강역에도 들러 휘호를 남긴 모양이었다. 대문짝보다 큰 그의 휘호가 걸려 있었다.

역 대합실은 수많은 인파로 혼잡했다. 출발 10여분 전에 개찰구가 열리고 우리는 여권과 승차권을 챙겨 줄을 지어 섰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도중에 고속열차 화해호가 멈춰선 것이다. 승무원들이 부산하게 오갈 뿐 승객들에게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70여분을 정차해 있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인솔자인 이기승 이사가 내일 일정에 포함된 중국의 현대사 탐방주제를 설명해주었다.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공산혁명과 그 이전 쑨원(孫文 1866~1925)의 신해혁명, 쑨원의 오른팔이자 손아래 동서이기도 한 장제스(蔣介石 1997~1975)와 여러 등장인물 간의 얽히고 섥힌 이야기를 삼국지처럼 들려주었다.

마오가 향학심에 불타 호남 제1사범대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할 때 영국 유학을 마치고 강단에 선 양창지(楊昌濟)의 눈에 들었다. 그의 집에 드나들면서 양 교수의 딸 양개혜와 눈이 맞았다. 마오에게는 부모가 정해준 고향 여자가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며느리지 내 아내가 아니오" 하고 그녀를 외면하였다. 마오는 양개혜(楊開慧)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혁명가의 가족에게 따르는 것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 뿐이었다.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양개혜는 상하이로 피신했으나 국민당 군대에 붙잡혀 30세의 나이에 처형되고 말았다.

그래도 산 사람은 태자당(太子黨)이 되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지 않은가? 이 역시 개인의 팔자 소관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중국 고속열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7시 반으로 예약했던 만찬이 취소될 뻔하였다. 주방장은 저녁 9시면 퇴근하는데 우리는 아무리 빨라도 8시 45분께 식당에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기승 이사가 기지를 발휘하여 식당에 요금을 선불하고 주방장 퇴근 전에 모든 요리를 차리라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중국의 결제 시스템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 관광 중인 외국인은 전자결제를 이용할 수 없으므로 조선족 현지 가이드가 스마트 폰으로 결제하고 그에게 대금을 지불하는 식으로 일이 원만하게 처리되었다.

 

 

그 때문에 오늘의 저녁 식사는 매우 특별하였다. 더욱 우리를 만족하게 만든 것은 금수홍루(錦繡紅樓, 锦绣는 간자체)라는 상호 못지 않게 요리의 맛이나 인테리어가 지금까지 다녔던 음식점 중 제일 뛰어난 점이었다.

이번 여행단의 제일 연장자이자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정영의 전 재무부장관이 건배제의를 하시면서 아무 탈없이 함께 여행 잘하고 있는 일행에 대해, 오늘 못 먹을 뻔 했던 저녁식사를 잘 차려준 이기수 이사에게 치하의 말씀을 하셨다.

해외 여행을 하는 도중 벼라별 일을 겪게 마련이지만 이처럼 고속철의 연착으로 이렇게 훌륭한 만찬을 먹게 된 것도 생각지 못한 기쁨이었다.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한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중국의 부동산 재벌 완다 그룹이 장사의 구시가지를 재개발하여 세운 완다(富力万达) 비스타 호텔에 투숙한 일이었다. 나도 여행을 많이 다니는 축에 들지만 이렇게 호화스럽게 꾸며놓은 호텔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대리석도 심지어 꽃까지도 사방이 금빛으로 번쩍거렸다. 체크인 수속 밟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렸는데 그 대기시간 중에 호텔 로비를 샅샅이 둘러보고 마치 컴퓨터 게임 BGM 같은 로비 뮤직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었다. 

 

* 호텔 입구부터 삐까뻔쩍한 완다 호텔

* 중국 장사시 완다 비스타 호텔 로비, 밤 10시 33분

 

늦은 시간이었으므로 단잠을 자기 위해 서둘러 샤워를 하려는 순간 객실 TV에서 눈에 익은 장면과 장단이 펼쳐졌다. 한복을 입은 북한 사람들이 신명나게 장구와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곧 이어 산성의 누각(평양의 을밀대?)이 배경 화면으로 나왔다. 중국에서 무슨 국제행사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그 다음에는 고산지대 소수민족이 전통무용을 추는데 무대에서 말을 탄 사람이 마구 달렸다. 그것은 무대장치에 대형 트레드밀을 설치하고 그 위에서 말이 달리는 광경을 연출한 것이다. 나는 출연진과 무대의 매머드 규모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TV와 비슷한 모습을 한 MC들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안드레아 보티첼리가 나왔다. 그리고 오케스트라와 대규모 합창단과 함께 푸치니의 투란도트에 나오는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열창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날 베이징에서는 베이징 국제영화TV 축제가 열렸다고 하는데 그 개막식이나 전야제 행사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안개 속 루산, 빛 바랜 백록동
역사의 현장에서
무심한 나그네는 사진만 찍네

Mist-clad Lushan and time-honored Bailu [Academy]
Make good places for strangers
To take pictures.

 

여기는 땅도 넓고 물산이 풍부한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걸출한 인물들이 역사를 이루어 왔다는 것

Here's a big land of resources
We're ready to see
Great men have made their own l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