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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문학기행 6] 악록서원, 마왕퇴 유물과 마오 기념관

Onepark 2019. 5. 17. 23:00

간만에 짐 싸지 않아도 되는 2박을 완다 호텔에서 하였다. 마지막 행선지인 무한(武漢)으로 내일 떠나기 때문이다.

간밤에 잘 쉬었던 만큼 오늘은 아침부터 일정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현지 가이드 말이 오늘 방문 예정인 마오쩌둥(毛泽东) 기념관에서 정부 행사가 있으므로 오전에 방문하기는 곤란하고, 먼저 악록서원부터 가는 게 좋은데 이곳도 사람이 많이 몰린다고 말했다.

그래서 전원 7시 40분까지 호텔 로비에 집합하여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강을 건너 호남대학교 구내로 들어갔다. 악록서원(岳麓書院)은 현재 호남대학교가 관리하고 있다. 악록서원 주차장에는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하여 서원과 애만정으로 가는 셔틀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악록서원으로 가는 셔틀버스 주차장에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포함해 중국 관광객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20대에 호남 제1사범학교를 다녔던 마오쩌둥의 동상이 그 특유의 뒷짐을 지고 장사시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중국을 통일한 위대한 지도자가 자랑스러울 것이다.

 

* 호남대 출신 모택동 주석의 동상

8시 반 우리 일행이 제일 먼저 셔틀버스에 탑승했다. 나는 함께 탄 중국 여학생들에게 어제 CCTV Ch.2에서 방영한 빅쇼가 무슨 행사와 관련된 것이냐고 물었는데 스마트폰의 통역 서비스까지 동원했음에도 시간이 모자라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했다.

 

악록서원은 송태조(宋太祖) 때(976)에 건립되어 1903년 구학(旧学) 교육제도가 막을 내릴 때까지 1,000년 가까이 존속하였다. 주희(朱熹)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유학을 강의하여 더 유명해졌다.

서원 주변의 원림(園林)도 잘 가꾸어져 있었다. 유학의 핵심 개념이 주희의 친필로 적혀 있어서 마치 입장객에게 그의 해당 여부를 묻는 면접시험을 보는 것 같았다.

 

*  忠 = Loyalty,  廉 = Integrity,  節 = Moderation,  孝 = Filial duty

서원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맨 위쪽에 굴원(屈原) 기념관이 있었다. 굴원이 누구이기에 악록서원에서 이처럼 존숭을 받고 있는가?

굴원(BC343?~277)은 전국시대의 정치가 시인으로서 학식이 뛰어나 초(楚)나라 회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강국인 진(秦)나라와 대항하기 위해 제(齊)나라와 손을 잡아야 하는지 여부를 둘러싸고 궁중의 정적들과 충돌하여 그만 조정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초왕이 화친을 맺으러 진나라에 갔다가 붙잡혀 죽는 등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조정에 다시 불려갈 조짐도 없자 세상을 한탄하며 멱라수에 투신하였다. 그의 자살 소식에 백성들은 그의 시신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그의 우국충정을 기려 음력 5월 5일을 단오절로 지키기로 했다.

굴원은 시인으로서 초사(楚辭)라는 문체를 창안하고, 작품《이소(離騷)》를 남겼다. 이소란 근심을 떠난다는 뜻으로 초왕과 충돌하여 물러나야 했던 실망감과 우국(憂國)의 정을 노래한 것이다. 시경에도 없는 문체를 창안하고 부(賦)라고 하는 운문 형식을 만들어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희도 굴원의 저작을 모으고 편찬하는 작업을 벌인 바 있다.

 

* "해와 달은 똑 같은 빛"이라는 말도 굴원이 지었기에 여러 모로 활용돼 왔다.

대나무가 우거진 원림 출구로 나와 악록산(岳麓山) 공원으로 올라갔다. 서원 내부와는 달리 애만정(愛晩亭)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이곳 사범대학에 다니던 마오쩌둥이 친구들과 이 정자까지 산책을 나와서 토론을 벌였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정자가 무너진 것을 중건하고 마오의 간택을 받은 시 구절로 정자의 이름을 새로 정하였다.

마오가 공부하였고 길을 다녔다는 것만으로도 주민들이 큰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애만정은 1938년 총격으로 부상을 입은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이 후난성 성장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악록산에서 정양을 하였기에 우리들과도 친밀한 곳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한국 관광객들은 유서 깊은 장사(長沙)가 장가계를 가기 위해 잠시 들르는 곳으로만 인식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곳이 중국 공산당의 성지이기에 냉전 시대의 여파로 사람들이 오래 머물기를 꺼려한 까닭도 있을 것이다. 

 

* 인솔자인 상미회의 이기승 이사가 애만정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그 다음 행선지는 후난성(湖南省) 박물관이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2100년 전의 미이라가 방대한 유물과 함께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을 가 보기 위함이었다.

그 다음날이 국제박물관 기념일이어서 정부 요인이 찾아오는지 우리가 여권을 보여주고 입장한 직후인 12시부터 보안검사가 강화되었다.

 

* 박물관 보안요원은 X레이로 관람객의 소지품을 일일이 검사하고 라이터와 성냥은 모두 압수했다.

장사 마왕퇴는 묘가 발견된 지역 이름이고, 한묘는 서한시대(西漢時代) 유력자의 가족묘라는 뜻이다. 마왕퇴는 육군병원 창고를 지으려다 발견되었는데 고고학적인 가치가 엄청난 워낙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기에 후난성 박물관을 따로 지어야 할 정도였다.

마왕퇴 한묘(馬王堆漢墓)는 마치 고대로 타임 머신을 타고 간 듯, 당시의 발달된 문물을 백과사전처럼 상세히 보여주었다. 3개의 묘는 장사국의 승상 이창(利蒼)과 그의 부인 및 아들의 무덤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도굴되지 않은 2기의 무덤 속에서 무려 3천 점이 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더욱이 이곳에서는 유력자의 순장(殉葬) 풍습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어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1972~1974년 발굴 당시 중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처음 발견된 1호 무덤에서는 2100여년 전 여성의 유해가 거의 완전한 형체로 발굴되었는데 관절이 움직이고 피부에는 탄성이 있어서 마치 막 죽은 듯 보였다. 그것은 시신을 20겹의 옷으로 싸고, 4겹의 목관에 넣은 후, 다시 석회로 만든 곽에 넣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함께 나온 유물을 판독한 결과 그 주인공은 이캉(利蒼) 승상의 부인 신추(辛追)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21명의 젊은 여성이 주인을 따라 순장되었다.

 

* 당시 발굴팀에게 보낸 '디테일의 왕'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친필 서한
* 마왕퇴 2호묘의 주인공 장사국 리캉(李蒼) 승상의 초상

마왕퇴 한묘는 2100년 당시의 백과사전을 땅 속에서 꺼내보는 것 같았다.

리칸 승상이 평소에 주도면밀하였는지 그와 부인의 사후에 당시의 습속과 지식을 담은 각종 물품과 백서(帛書)를 빼곡하게 무덤 속에 넣어놓았다. 너무 이르지도 않고 또한 늦지도 않게 후세 사람들은 보물창고를 송두리째 전해준 셈이었다.

 

* 周 수상의 특별지시에 따라 발견된 미이라는 과학자와 의학자들의 철저한 조사 분석을 거쳤다.

1시간 반 마왕퇴 전시물 관람을 마치고 나오자 마치 무덤 속을 헤매다 나온 듯 현기증이 났다.

무엇보다도 순장을 당한 젊은 여자들이 애처로왔다.

 

주군이 죽자
꽃다운 나이에
통곡(痛哭) 소리 나네

 

거리에 서있는 서양풍의 동상이 고대 풍습을 비웃는 것처럼,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점심을 예약한 중식당은 너무 멀었으므로 박물관에서 가까운 국수집을 찾아갔다.

국수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기력을 회복할 수 있는 맛있는 점심식사가 되었다.

 

그 다음 일정은 오전으로 예정되었던 마오쩌둥 기념관 방문이었다.

우선 방문센터로 가서 셔틀버스로 갈아탄 후 그의 생가 부근에 건립된 기념관을 관람했다.

그리고 희망자는 마오의 생가(故居)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러나 입장하는 데 70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그 부근의 마오가 다녔던 소학교 내부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나왔다. 

대부분의 일행이 마오 기념관을 이렇게 상세히 와서 볼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표했다.

 

* 마오 기념관 광장의 마오쩌둥 동상에 중국 사람들이 단체로  헌화를 하고 있었다.
* 이곳에 있는 마오쩌둥의 동상이나 사진은 대개 책이나 서류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  마오쩌둥은 악록서원을 다니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 국공합작 당시의 장졔스와 마오쩌둥
*  마오쩌둥의 생가(故居)는 아주 잘 보존되어 있었다.
*  장사진에 설 필요 없이 창문으로 들여다 볼 수 있었던 마오 생가 주방

마오 기념관에서 장사 시내로 들어오니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점심을 예약했던 집으로 갔다.

이 식당에도 마오 가념관 앞에서 처럼 빨간 모자를 쓴 평범해 보이는 중국 사람들이 연이어 들어와 식사를 하고 나갔다. 이러한 서민들이 마오쩌둥을 지지했고 따른 사람들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니 마음이 놓이고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이기승 이사의 제안에 따라 몇 사람은 호텔에 인접해 있는 재래상가와 슈퍼마켓(超市)을 돌아보고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구매하였다. 카카오 매장도 있고 한국 화장품을 파는 가게도 눈에 띄었다.

 

영국 여왕처럼 지폐마다 있는 초상
화폐가치 이상으로 존숭받을지는
그 나라 민중과 역사가 판단할 일

Mao was a supreme leader of China.
His portrait appears on each bank note
Like the British Queen.
Whether he could be respected (or not)
Will be determined
Only by the people and history.
(17-syllable English haik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