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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문학기행 3] 무이구곡에서의 대나무 뗏목 선유

Onepark 2019. 5. 14. 23:00

셋째날 5월 14일 아침의 최대 관심사는 어제 오후 구곡(九曲)의 수위가 올라 중단되었던 대나무 뗏목(竹筏) 타기가 가능한가 였다.

어제 밤 장예모 쇼를 보는 데 큰 지장은 없었으나 계속 비가 내렸기 때문에 언제 무이산에 또 올 수 있을지,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지 안타까웠다. 아침 식사를 하고 호텔 주변을 돌아볼 때에도 가랑비는 그치지 않았다.

 

* 5층 객실에서 내려다 본 호텔의 후정(後庭). 정자에 앉아 무이산의 정취를 되새기기에 좋았다.

오후에 남창행 고속열차를 타야 하므로 일단 체크아웃부터 한 다음 일행의 짐은 호텔 로비에 맡겨놓고 버스에 올랐다. 배멀미를 하는 일행 두 분은 호텔에 남았다.

현지 가이드가 알아본 바로는 대나무 뗏목 운항이 개시되었으므로 우리는 우선 무이산 풍경구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오래 기다리지 않고 6명씩 2개조로 나누어 뗏목에 올랐다. 주희 선생과는 달리 상류쪽 9곡부터 시작하여 1곡으로 내려가는 선유였다.

 

붉은말 업소 간판의 구곡도가는 주희가 무이구곡을 노래한 시가 아니던가!

주희를 흠모한 퇴계선생이 도산구곡을 지을 때 모델이 되었다.

 

주희의 무이구곡
조선 선비들 꿈꾸던 곳,
가 보니 대나무 뗏목 타는
행락객들의 부산함

Zhu Xi’s valley was
Joseon gentlemen’s Shangri-La.
Now tourists’ theme park.

 

3인승 대나무 뗏목(竹筏)을 가로로 2개 연결한 뗏목에 6인이 승선하였다. 사공 두 사람이 앞 뒤에서 내나무로 계곡 바닥을 밀어내 방향을 잡고 물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식이었다.

물의 깊이와 밑바닥 지형에 따라 군데군데 급류가 흐르는 지역도 있었으나 맑은 물 위로 뗏목이 미끄러지듯 흘러갔다. 우리는 계곡 주변 경치를 구경하면서 옛날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이 모습을 어떻게 상상하였을지 궁금해졌다. 이곳에 직접 다녀갈 수는 없었으니 아마도 주희의 구곡도가(九曲棹歌)를 읽고 또 읽고 했을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무이정사에서 제일 가까운  제5곡을 살펴보기로 한다.

 

五曲山高雲氣深 - 다섯번째 구비라 산은 높고 구름이 깊은데
長時煙雨暗平林 - 사철 안개비에 숲 안은 어둡다.
林間有客無人識 - 숲 속의 나그네를 알아보는 사람 없는데
欲乃聲中萬古心 - 사공의 노 젓는 소리에도 오랜 세월 변함없는 마음이여.

 

임간(林間) 무이정사의 나그네는 주희 자신을 가리키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학문에 정진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음(만고심은 '만고강산 유람할제'와 비슷한 용례)에도 그의 학식과 덕망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 했던 것 같다.

여기에 매료된 퇴계 선생도 深, 林, 心 세 자를 차운(借韻)하여 도산구곡에서 아래와 같이 읊었다.

 

當年五曲入山深 - 그해 오곡의 깊은 산에 들어갔으니
大隱還須隱藪林 - 숲에 은거하던 큰 선비는 어디 있는고
擬把腰琴彈月夜 - 달밤에 거문고 뜯어본 들
山前荷篑肯知心 - 저 산 앞의 초부가 알아줄까

 

주희는 무이정사에서 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면서도 멀리서 찾아온 벗들을 이 대나무 뗏목 선유(bamboo draft cruise)에 초대하였을 것이다. 호주가(好酒家)인 주희는 뱃놀이가 끝난 다음에 술을 권커니 자커니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성리학자들은 주희의 성리학을 완벽하다고 보고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세웠으니 어찌 박지원이나 박제가, 정약용의 실용적인 학문이 발전할 수 있었으랴!  조선조 때뿐만 아니고 지금까지도 이러한 풍조가 이어지고 있으니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 암벽에 세로 줄무늬가 있는 이곳은 제6곡 신선의 손바닥 봉우리(仙掌峰)이다.

* 여러 경로로 조사해보니 위 동영상은 제7곡 석당사(石唐寺) 부근이다.

삼곡에는 보기에도 위압감을 주는 깎아지른 암벽 소장봉(小藏峰)이 우뚝 서 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중턱의 바위굴에서 홍판교(虹板橋 무지개 다리판)와 가학선관(架壑船棺 바위 틈에 둔 배모양의 관)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800년 전에 이미 주희는 이것을 남방 소수민족의 풍장(風葬)의식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 당시 사람들은 비바람에도 썩지 않은 유골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신선이 하늘로 올라 가면서 남겨놓은 배라고 믿었다고 한다 (아래 무이박물관 방문기 참조)

 

三曲君着袈壑船 - 세번째 구비라 그대는 매어둔 배를 보았는가.
不知停櫂幾何年 - 노 젓기를 그친지 몇 해인지 모르겠네.
桑田海水今如許-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된 것이 언제이런가.
泡沫風燈敢自憐 - 물거품 같고 바람에 날리는 풍등 같은 우리 인생 가련하다.

 

이러한 사정을 자세히 알 길이 없는 조선의 선비들은 아마도 주희가 노래한 가학선(袈壑船)이 높은 바위 굴에 놓여 있는 배 모양의 관을 단순 묘사한 것임에도 벼라별 해석을 덧붙이고 자기 말이 옳다고 언쟁을 벌였을 것이다. 풍등(風燈, sky lantern) 역시 바람 앞의 위태로운 등불이라기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벤트로 많이 행하는, 종이로 된 등 안의 고체연료에 불을 붙여 하늘로 날리는 소형 열기구이다.

주희는 삼곡에서 오래 전 가학선관에 장사 지낸 사람을 생각하고 그저 물거품 같고 풍등 같은 우리 인생이 가련하다고 노래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주희의 언설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겼던 사람들은 온갖 철학적 해석을 동원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쓴 웃음이 지어졌다.

 

무이구곡에 관한 전설이 서려 있는 옥녀봉(玉女)이 뗏목 선유의 하이라이트였다.

대나무 뗏목의 사공은 사진 찍기 좋게 배의 진행 속도를 늦췄다.

과연 주변 경관도 수려했다.

 

위의 사진에서 듬직하게 생긴 바위가 대왕봉(大王峰)이다.

하늘에서 살던 옥녀가 아버지 옥황상제 몰래 인간세상에 내려왔다가 무이산 경치에 매료되어 돌아갈 줄 몰랐다. 옥녀는 우연히 만난 대왕에 반하여 자식을 낳고 살다가 하늘로 올라오라는 명령을 어기고 벌을 받아 대왕과 함께 바위가 되고 말았다. 그들을 해코지한 철판장이란 병풍 바위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위와 같이 면경대(面鏡臺)가 생겨 옥녀봉은 대왕봉과 서로 얼굴을 비춰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윽고 대나무 뗏목 선유의 종점(주희의 구곡도가에서는 기점)에 도달했다.

거리상으로는 8km, 시간상으로는 75분여 선유를 한 것이다. 우리는 거의 불가능할 뻔한 이 행사를 가능케 해준 날씨 덕에 서로 치하하기에 바빴다. 옥녀봉의 전설을 떠올리고 인솔자인 이기승 이사에게 언제 옥황상제에게 전화를 걸어 허락을 받았느냐고 조크를 던졌다.

 

* 무슨 일이나 끝이 있는 법. 기대 이상의 대나무 선유의 종착지가 저만치 보였다.

대나무 뗏목 선유의 종점에 도달해 뗏목에서 내리니 출구 앞에 남송 시대의 상점가가 관광객들을 맞았다. 물론 옛날부터 있었던 유적지가 아니고 뗏목 선착장을 만들면서 관광지로 조성해 놓은 것이다.

우리 일행은 무이산 박물관부터 들렸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무이산과 계곡은 전설처럼 난을 피해 온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으며, 유력자가 죽은 후에는 나무 관에 담아 바위 틈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바로 주희가 삼곡에서 묘사한 가학선관(架壑船棺)이다.

마치 중세 그리스 마테오라 암벽 위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죽어서도 그 안에 묻히기를 원했던 수도사들과 같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디였을까?

 

* 구곡계 선유를 마친 뒤라서 무엇보다도 구곡도가의 글과 그림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 놀랍게도 주희가 구곡도가의 삼곡에서 묘사한 가학선관(架壑船棺)이 전시되어 있다.
* 송대의 유적은 아니고 관광객들이 송대의 문물과 인물을 접할 수 있게 조성한 체험형 박물관이다.

어느 사이에 날씨고 맑게 개었고 우리는  다소 무거워진 마음을 떨치기 위해 가벼운 걸음으로 일선천(一線天)을 찾아갔다. 깎아지른 높은 암벽 사이로 마치 선을 한 줄 그은 것 같은 하늘이 보인다는 곳이다.

이 길은 178m에 달하는데 바위 틈이 가장 좁은 지점에서는 너비가 30cm 밖에 되지 않아 교행(交行)이 어렵고 뚱뚱한 사람은 지나가기도 어렵다는데 사람들에게 묘한 도전의식을 갖게 하는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 기념사진만 찍고 무이산 관광을 마치기로 했다.

 

점심식사는 무이산의 전통을 잘 이어받았다는 벽호원(碧湖園)이라는 중식당에서 했다. 겉보기에는 허름했으나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 할까 이집 음식이 가장 우리 입맛에 맞는다는 찬사를 들었다.

다시 원기를 보충한 우리는 대홍포차의 연원이 된 바위 위의 홍포를 둘렀다는 차 재배지를 찾아갔다.

과연 이곳에서 차나무가 자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왕실에서 인정하는 최고 품질의 찻잎을 생산하였다는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 바위에 대홍포(大紅布)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한 때는 무장경관이 차나무를 지켰다고 한다.

* 누구 지시를 받은 듯이 바위 위의 글자를 가리키는 싱크로나이즈된 손길들

그러니 대홍포차가 어떠한지 그 맛과 향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지 가이드에게 부탁하여 이곳의 유명한 차 제조업체를 찾아갔다.

그리고 배가 부를 정도로 이것 저것 여러 종류의 차를 시음할 수 있었다.

선물용으로 구입하는 일행도 있었으나 우리집에는 중국차 재고가 많은지라 모처럼 초연할 수 있었다.

 

무이산 일정을 모두 마치고 우리는 호텔에 맡겨둔 짐을 찾은 후 서둘러 무이산 북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7시 21분발 남창행 고속열차 2등칸에 탑승하였다. 1등칸을 실력자가 매점해버려 표를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당간부의 위세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통로 양쪽으로 2인석과 3인석이 배열되어 있었는데 열차가 중간중간 시속 308km 까지 속도를 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시 16분에 남창역 도착하여 연변 백두산에서 강남 땅으로 일하러 왔다는 조선족 현지 가이드를 만났다. 연변 자치주에서는 젊은 남녀가 일자리를 찾아 중국 전역으로 흩어져 나가 연변에는 조선족 노인과 아이들만 남아 자치주의 인구비율 요건을 갖추기 어렵게 되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저녁식사는 이곳의 인기 음식점에서 뷔페식 샤브샤브를 먹기로 했다. 중국 본토에서 먹는 진짜 마라탕이었다.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훠궈(火鍋)에서 매운 맛 가스가 치솟아 눈물, 콧물, 재채기가 나는 바람에 제대로 먹지 못하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몇 사람은 매운 맛을 적당히 줄여가면서 이맛 저맛을 보고 나중에는 육수에 라면 사리까지 넣어 맛있게 먹는 체험을 하였다.

 

위와 같이 색색깔 그릇에 담긴 음식을 훠궈(火鍋)에 익혀서 먹는다. 그리고 나중에 그릇수대로 식대를 지불하는 식이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그랬던가! 욕심 같아서는 이것저것 다 먹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훠궈에서 솟아오르는 매운 연기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내일은 등왕각에 가 볼 예정인데 오늘 밤 숙소는 동남 아시아에서 최고로 치는 샹그리라 호텔이었다.

이렇게 좋은 호텔에서 몇 시간만 자고 나가는 것이 자못 서운했다.

그래서 오늘 밤과 내일 아침 호텔의 이모저모를 돌아볼 궁리를 하였다. 우선 로비와 객실의 인테리어가 심플한 것(minimalism?)이 마음에 들었다.

 

무이산을 샅샅이 보았으니
이번 여행 절반 이상 성취했네
내일부터의 관광은 보너스인 셈

Walking thru Wuyishan,
We've finished a half of journey.
The rest will be our prize.

(6-8-6 syllable English hai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