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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문학기행 4] 남창 등왕각과 루산 동림사

Onepark 2019. 5. 15. 23:00

4일째를 맞은 시문학 기행 여정도 중반에 접어들었다. 5월 15일 오늘은 등왕각 (滕王閣, Pavilion of Prince Teng) 방문이 하이라이트이다. 그리고 루산(廬山, Lushan)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샹그리라 호텔에서 잠깐 잠만 자고 나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대신 잘 차려진 조식 메뉴를 보고 잘 먹고 나왔다.

 

*식사 중이라는 표시 , 'Hungry /享受中'이라는 팻말이 재미있다.

남창시의 명물 등왕각을 찾아갔다. 멀리서도 웅장한 자태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당나라 초기 당태종의 스물두번째 아들 이원영(李元嬰)이 이 지역 홍주 도독에 봉해졌을 때 그의 도락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전화(戰禍)와 지진으로 무너지고 새로 짓기를 반복했다. 지금 있는 것은 29번째로 1989년에 중건한 신축건물이다. 

 

등왕각 내부에는 시대별로 과거의 등왕각 모형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것을 보니 등왕각 이름은 같지만 처음에는 작고 아담하던 것이 중건을 거듭하면서 누각의 만리장성 급으로 크고 웅장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 곳이 유명해진 것은 1363년 명태조 주원장이 파양호에서 벌어진 진우량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큰 연회를 베푼 일이다. 등왕각 연회 장면은 지금도 볼거리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것보다 등왕각 하면 왕발(王勃. 650~676)이란 천재 시인의 "등왕각서(滕王閣序)" 시가 훨씬 더 유명하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한다. 

 

현재의 건물은 새로 지은 지 30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역사적 의미가 대단하다는 것을 여러 가지 전시물로 보여주고 있었다.

각종 유물과 서화, 휘호, 실내장식 문양, 제례복식 등 등왕각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것을 층별로 전시해 놓은 것이 마치 번쩍번쩍한 졸부(猝富)의 인테리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누각 자체로는 역사적이거나 문화적인 가치가 별로 없음에도 우리는 왜 이곳을 찾아 왔는가?

그것은 한 편의 시(詩)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시인은 안타깝게도 27세로 요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이 건물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왕발(王勃, Wang Bo)의 시 "등왕각서(滕王閣序)"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건물이나 시설의 안내서를 지금도 서(序, Preface)라고 부른다.

전설처럼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675년 26세의 왕발이 남방(越南)에 부임한 부친을 뵈러 가는 길에 남창에 들렀다가 등왕각의 중건 낙성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등왕각을 소개하는 시를 즉석에서 지어 좌중을 압도했다. >

당시 이 지역 태수 염백서가 그의 사위 오자장의 문재(文才)가 뛰어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이보다 더 뛰어난 시를 지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시오"하고 말했다. 다들 주저주저하는 사이에 왕발이 이 시를 읊었던 것이다. 오자장이 자기도 그리 구상하고 있었다고 말하자, 왕발이 마지막 8행의 칠언율시를 덧붙였다. 이것을 본 참석자들은 왕발의 글솜씨에 탄복하며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나름대로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보니 춘향전에서 변사또 앞에 나나탄 이몽룡이 '어사출도'를 외치는 장면이나 다름 없었다. 

 

滕王高閣臨江渚 - 등왕의 높은 누각 강가에 서 있는데
佩玉鳴鸞罷歌舞 - 패옥과 방울로 어지럽던 춤과 노래도 끝났구나
畫棟朝飛南浦雲 - 그림 같은 누각에 아침에 피어오른 건 남포의 구름
珠簾暮捲西山雨 - 붉은 발을 저녁에 걷으니 서산에 비가 내린다
閒雲潭影日悠悠 - 한가한 구름이 강물에 비치고 햇빛이 아득하니
物換星移度幾秋 - 사람도 바뀌고 별자리가 달라졌으니 몇 해가 지났는고?
閣中帝子今何在 - 누각을 짓고 즐기던 등왕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檻外長江空自流 - 난간 밖 장강은 속절없이 흘러만 가는구나.

 

* 나 같은 사람도 좋은 글(名文章)은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 누각에 올라서 보니 왕발이 묘사한 대로 그제나 지금이나 장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등왕각의 한 층에는 이 지역 출신의 유명 인물들을 벽화로 그려놓았다.

강서(江西) 사람들의 자부심이라고 할까, 주요 인물의 과거급제 명패를 전시해 놓기도 했다.

인솔자 이기승 이사는 여기에 빠져 있는 한 사람이 있으니 마오쩌둥과(毛澤東)의 권력투쟁에서 실각한 린뱌오(林彪)라고 했다. 여기 전시되어 있는 것들은 극히 최근에 제작된 것들이니 승자의 전유물인 셈이다. 

 

등왕각 바깥에는 음양 오행에 따른 십이지의 동물(예컨대 돼지는 亥, 양은 未)과 태극(太極)으로 정원과 바닥을 장식해 놓았다.

관람객들에게는 에티켓을 지키도록 문명인(교양인?)의 행실(civilized behavior)을 요구하였다.

공산당 정권의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도 캐치프레이즈처럼 입간판에 적어 놓았다. 곳곳에 혁명구호를 붉은 글씨로 도배해 놓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졌다.

 

* 관광 에티켓 수칙이 한국어로도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이를 어기는 한국인도 요 경게대상이었다.

등왕각에서 나왔을 때 비는 내리지 않아도 구름이 잔뜩 끼고 날이 우중충하였다.

우리가 탄 버스는 일로 다음 행선지인 루산을 향해 달렸다.

버스 안에서 이기승 이사가 루산에 가서 볼 것과 알아둘 것을 브리핑 했다. 중국 현대사를 공부한 사람들에게 남창은 1927년 공산주의자들의 난창 봉기 사건, 그리고 루산은 1959년의 공산당 대회(八届八中全会)로 유명한 곳이다. 모두 중국역사에 일대 변곡점을 찍은 대사건들이다.

루산에서는 케이블 카로 휴양지에 올라갈 터이므로 작은 짐 하나만 들고가라고 말했다. 늦은 점심을 먹게 될 거라고도 했다. 

정오가 다 되어 우리 일행은 불교 정토종(淨土宗)의 본사인 동림사를 찾아갔다.

 

옛날 구법승들은 이 개울물을 건너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곳에  혜원(慧遠)이 부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의 공덕을 생각(念佛)하는 것만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나오는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며 백련사(白蓮社)를 열었다. 그와 추종자들은 모두 견불왕생(見佛往生)하기를 바랬다.

오늘날에도 중국 각지에서 온 불자들이 제각기 다른 승복을 입고 와서 예불을 드리고 소원을 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우리나라 불국사의 다보탑이 여기에도 서 있었다. 다른 점은 이슬람 모스크 처럼 네 군데 참탑을 세워 놓은 것었다.

불교 신자들이 합장하고 탑돌이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자동차 번호판에는 강서성을 나타내는 어려운 한자가 적혀있다.

루산의 고지대는 해발 1100m가 넘어 여름철에는 매우 시원한 곳이다. 산 아래 저지대와는 10도 이상 차이가 난다.

1895년부터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각국 부동산업자들이 이곳에 별장을 지어 분양했다고 한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자동차로 올라가야 하지만 2018년 7월에 케이블카(索道)가 개통되어 지금은 10여분이면 휴양지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지역이 유명한 풍경구임에도 안개 낀 날이 많아 경치를 제대로 구경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더욱이 지금은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 케이블카를 타고 고산지대에 올라오니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이 지역(牯岭街)의 교통 시스템은 곳곳에 버스 정류장을 설치하고 미니버스가 노선을 따라 다니면서 승객을 나르는 식이었다. 우리도 여러 번 타고 내릴 수 있는 승차권을 구입하였는데 지문을 등록하여 티켓 한 장을 여러 사람이 돌려 쓰지 못하도록 했다. 

면적이 협소한 지역에 교통량이 몰리는 것을 막고 이용자들이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환경친화적 시스템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어느 관광지든지 대규모 환승센터와 주차장을 만들어 놓고 그 이후는 소형 공용 버스가 관광객들의 수송을 전담하는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다.

* 버스에는 루산의 삼첩천 폭포를 보기 전에는 루산에 가보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글이 붙어 있다.
* 오늘의 늦은 점심식사에는 당나귀 요리와 개구리 뒷다리, 감자 등의 음식이 푸짐하게 나왔다.

루산의 휴양지답게 유명 인사들이 묵었던 곳, 그들에 얽힌 일화와 사건들이 도처에 가로명이나 기념관, 안내판 등에 남아 있었다. 중산(中山)은 쑨원(孫文)이 일본에 피신하였을 때의 이름이다.

장개석(蔣介石) 송미령 부처도 여름마다 이곳을 찾았다고 하며 마오쩌둥(毛澤東), 저우언라이(周恩來)도 여름을 이곳에서 많이 지냈다. 펄벅 여사도 집필할 때면 이곳을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마오쩌둥이 여러 차례 휴가를 보냈던 건물은 아예 마오쩌둥 기념관으로 바뀌어 사진과 휘호, 물품 등을 전시해 놓았다.

이곳이 백거이가 자주 찾았고  머물렀던 곳이기에 마오쩌둥이 달필로 쓴 백거이의 한시가 도처에 걸려 있었다. 도연명도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부르고 이 지역에 낙향했다고 전한다.

 

1959년 7월부터 8월까지 루산에서 공산당 전당대회(八届八中全会)가 열렸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화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던 대약진운동의 결과 4000만 명이나 굶어죽은 정책의 과오를 인정하였다. 마오쩌둥은 그의 동향인으로 혁명동지이자, 한국 전쟁 당시 중공군총사령관을 지낸 펑더화이(彭德怀)에게 그 책임을 묻고 스스로도 주석 직을 류사오치(劉少奇)에게 넘겨주고 정계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루산의 풍류(風流) 정신은 백거이의 한시에도 잘 나타나 있다.

백거이가 이곳으로 좌천되어 울적해 있을 때 손님을 배웅하러 강가에 나왔다가 쟁쟁하게 울리는 비파 소리를 들었다. 한 물 간 여자가 연주하는 구슬픈 곡조를 듣다가 문득 자신의 처지와 비슷함을 깨닫고 612자의 서사(敍事)를 읊었다. 

 

琵琶行 (서사시 비파행의 도입부) - 白居易
潯陽江頭 夜送客 - 심양강 어귀에서 밤에 손님을 배웅하려니
楓葉萩花 秋瑟瑟 - 단풍잎과 갈대꽃에 가을 바람이 쓸쓸한데
主人下馬 客在船 - 주인은 말에서 내려 배 안에서 손님과 함께
擧酒欲飮 無管絃- 술잔을 들어 마시려 하나 풍악이 전혀 없네.

 

우리는 안개 속에 보지 못했지만 이백은 루산 폭포를 바라보며 과장법의 대표적 사례인 다음의 시를 남겼다.

 

望廬山瀑布 - 루산폭포를 바라보며, 이백

日照香爐 生紫煙 - 향로봉에 해 비치니 자주빛 안개 피어오르고
遙看瀑布 掛前川 - 아득히 폭포 바라보니 긴 강이 하늘에 걸려있구나.
飛流直下 三千尺 - 날아 솟았다 바로 떨어진 물줄기 삼천 척
疑是銀河 落九天 - 은하수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 아닐까.

 

* 백거이가 기거했던 루산의 화경(花徑) 기념관 입구
* 백거이 기념관에는 손님 요구에 응해 백거이의 시를 써주고 돈을 받는 서생이 자리를 지켰다. 

우리 일행은 앞이 안보이는 안개 속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그치고 숙소인 하워드 존슨(Howard Johnson) 호텔에 투숙하였다.

오늘 오후 견문한 대로 이곳을 찾았던 유명 인사들처럼 모처럼의 휴식을 즐겼다.

이렇게 즐기는 관광객들은 우리 뿐만 아니었다. 어느 회사 소속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단체로 들어와 저녁식사 자리에서는 이들이 외치는 건배사 "이, 얼, 산, 쓰"가 우리 테이블의 경쟁심을 묘하게 자극했다. 우리는 그들에 질새라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를 큰 소리로 외쳤다. 

 

등왕각에 오르니
(왕발의) 시 한 수가
어느 보물보다 값지네

Pavilion of Prince Teng shows
A good poem is better than
Any other treasure.

* Isn’t it a Chinese version of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