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럴 수가?”
추석연휴를 앞둔 금요일(9.21) 아침에 받은 전화는 내 귀를 의심케 했다. 몇 주 전에도 만나 환담을 나눴는데 변호사사무실 개업소연을 마치고 심야 귀갓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소천(召天, 別世)했다는 것이다.
바로 검사장까지 역임하고 정계에 입문하여 19대 국회의원(광주北乙)을 지냈던 임내현(林來玄) 대학동기의 이야기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오래 전 사석에서의 농담이 문제되어 공천에서 배제되는 바람에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권토중래(捲土重來)의 기회를 엿보다가 법무법인을 세워 변호사 활동을 막 재개하려던 참이었는데 너무나 허망했다.
강남성모병원 빈소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의 조화가 고인이 받은 훈장(황조근정)과 함께 영정 옆에 죽 늘어서 있었으나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고인은 광주에서 소문난 수재였다. 광주서중에서는 몇 년 만에 나온 천재라며 서울로 진학하기를 권했고 경기고등학교와 대입예비고사에서도 그 기대에 한 치 어긋남이 없었다. 마침내 서울대 법과대학 3학년 말에 응시한 1974년 사법시험에서 최연소로 합격했다. 그 당시 사법시험 합격자가 연 60∼80명에 불과할 때였다.
고인은 검찰에서도 승승장구하였으며,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기관장을 몇 차례 역임하는 동안 영호남 화합을 위해 진력했다. 그 공을 인정하여 경북고등학교에서는 고인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대학동기 두 사람(임채진, 김진태)은 조금 늦게 고시에 합격한 덕분에 검찰총장을 하였으니 약관에 일찍 합격하여 승진 차례가 오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다.
나하고는 인생의 진로가 달랐지만 고인이 닦아놓은 길을 나도 편하게 이용한 적이 있었다.
고인은 법무부 재직 당시 국제법무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이 업무를 담당하는 과를 설치하고 학술지[통상법률]을 발간하는가 하면 국제회의에 파견하는 전문가 풀을 구성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 결과 나도 국제거래법연구단의 연구위원으로서 몇 차례 UNCITRAL과 Unidroit 회의에 정부대표로 참석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가 ‘마약청정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도 대검찰청 마약과장을 역임한 고인의 적극적인 국제활동에 힘입은 바 컸다. 고인의 마지막 사회활동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세계검찰회의에 참석하여 네트워크를 다지는 일이었다고 한다.
고인의 국제적인 감각은 일찍이 중견검사 시절 미국 댈러스 소재 남감리교대학(SMU) 로스쿨에 유학을 가기 전부터 발휘되었다. 그것은 고인이 학창시절에 닦았던 탁월한 영어 실력에서 유래하였지만 짧지 않은 미국 유학 생활을 계기로 글로벌하게 체계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해외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일가친척이 모두 김포공항에 나가 손수건을 흔들 때였다. 고인의 진취적인 업무수행으로 우리나라 검찰도 국제적인 위상을 한층 높일 수 있었다고 한다.
고인은 교회(양재온누리)에서 장로의 직분을 맡고 있었다.
20여 년 전 부인(정은주 권사)의 기도와 권유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으나, 교회 일도 검찰업무 보듯이 열심이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새벽기도에 빠지질 않았으며, 교회 안팎의 골치 아픈 법률문제도 그가 손대면 원만히 해결되곤 하였다. 고인은 고 하용조 목사님의 둘도 없는 법률고문이었다.
지난 여름(8.10∼8.15)에는 인도네시아 아웃리치(의료선교)에 참가해 다채로운 유머로 봉사활동에 지친 일행의 피로를 씻어주었다. 우리는 온누리 교회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법조선교에 관해 이야기를 함께 나눴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유가족 말로는 고인이 하루 15분 전화로 배우는 중국어회화에도 열심이었다는데, 고인이 해외선교에 경륜을 펼칠 기회가 영영 사라지고 말았으니 교회로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고인이 교회와 사회에 기여한 것을 기려 장례식장에서 온누리교회 주관으로 입관예배, 천국환송예배(영결식)가 진행되었다. 빈소에는 어지간한 교회가 옮겨왔다 싶을 정도로 검은 정장을 한 장로와 집사, 권사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당회장 이재훈 목사를 비롯한 여러 목사님들은 설교를 통해 불의의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나신 임 장로님은 한 가지 진리를 일깨워주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 땅이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아니라는 것과 죽음이 영원한 이별은 아니며 이런 일 때문에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씀이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았다면 너희에게 미리 말해두었을 것이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요한복음 14:1∼2).
고인처럼 한국전쟁 통에 태어나 험한 시절을 헤쳐 온 나로서도 찬송가 384장(2절)을 부를 때 눈물이 핑 돌았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임내현 장로님, 이 땅의 일은 잘 키워놓으신 아들과 딸, 사위에게 맡기시고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소서.
'Peop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묘] 두 사람의 신입 신고 (0) | 2018.09.29 |
---|---|
[송공연] 총장 공관에서의 퇴직교수 만찬 (0) | 2018.09.28 |
[공연] 가을맞이 '우리 가곡의 밤' 감상 (0) | 2018.09.12 |
[강연] 국회도서관 법률정보 간담회 참석 (0) | 2018.09.04 |
[정년] 가족 기념패와 교육부장관 시계 (0) | 2018.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