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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3] 델피 신탁과 유대 선지자의 예언

Onepark 2018. 6. 30. 22:00

둘째 날 여정은 델포이(고대 그리스어 발음) 또는 델피(현대식 발음)의 아폴론(로마신화에서는 아폴로) 신전을 탐방하고 바위 절벽 위의 수도원이 있는 메테오라까지 가는 것이었다. 가는 도중에 인기 TV드라마 "태양의 후예" 로케 장소였던 아라호바 마을도 들른다고 했다.

방마다 발코니가 있는 피닉스 호텔을 떠날 때 주유소 마트에서 휴대폰을 분실한 일행이 CCTV를 통해 휴대폰을 찾은 것에 모두 박수를 쳤다. 요즘은 휴대폰에 메모나 연락처는 물론 휴대폰으로 찍거나 전송받은 사진까지 모두 저장되어 있으므로 휴대폰을 분실하면 누구나 멘붕에 빠지게 된다.  

 

 

아라호바 마을은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산지에 한 데 모여 있었다. 지금이야 성능 좋은 자동차로 쉽게 오를 수 있지만 옛날에는 말이나 노새를 타거나 아니면 도보로 다녀야 했을 터인데 이렇게 높은 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이 놀라웠다. 주된 산업은 올리브 재배와 관광업인 것 같았다.

인기 TV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남녀 주인공이 시계탑 밑에서 키스를 하였다고 하여 우리 일행은 그 시계탑으로 우르르 몰려 갔다. 그곳 만큼 이 일대의 경치를 구경하기 좋은 곳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 "태양의 후예" 로케 장소였다는 이유로 관광의 필수코스가 된 산간마을

 

'배꼽'이라는 의미의 옴파로스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우리 말고도 여러 팀의 단체 관광객들이 몰려왔다.

그리스인들은 자기네 국토의 배꼽은 세계의 중심이고 이곳 파라나소스 산 지하에서 에너지(vortex)가 솟아나온다고 믿었다.

 

델피의 신탁(Oracle of Delphi)은 이런 식으로 행하여졌다.

신탁을 받고자 하는 의뢰인, 즉 왕이나 귀족, 돈 많은 부자가 재물을 들고 찾아오면 아폴론 신(태양)의 활동이 왕성한 시점(초기에는 연 1회, 나중에는 월 1회, 동절기에는 1회)에 신탁을 받을 준비를 하였다. 

무녀(Pythia)는 카스틸리아 샘물로 목욕재계하고 흠없는 어린 양을 아폴론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무녀는 아폴론 신전의 지하 성소(adyton)로 내려가 신탁 의뢰인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옴파로스 옆 삼각 의자(tripod)에 앉아 월계수 잎을 씹으며 계시를 받았다. (영화 "Minority Report"에서 예지능력을 가진 3명의 소녀가 수조 속에 둥둥 떠 있는 상태에서 그가 본 환영을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신기(神氣, 예언을 하는 기력)가 딸리면 땅의 틈새에서 나오느 유황 가스를 마시기도 했다. 무녀가 신탁의 메시지를 받고 뭐라고 웅얼거리면 그 내용을 옆에 앉은 신관 사제가 받아적어 의뢰인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 델피 부근의 옴파로스 레스토랑은 이름답게 대형 홀을 갖추고 여러 팀의 단체관광객을 받았다.
* 델피 아폴론 신전이 위치한 파르나소스 산은 보통사람의 눈에도 땅기운이 충만해 보이는 곳이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아폴론 신이 예언과 광명, 음악을 주관하지만 그리 쉽게 계시를 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옴파로스(omphalos)라는 보조장치를 이용할 줄 알았다. 말하자면 파르나소스 산의 지기(地氣 vortex)를 모아주는 깔때기 역할을 하는 장치였다.

무녀(Pythia)가 월계수 잎과 유황가스의 영향으로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떠오르는 상념을 이야기하면 이것을 옆의 사제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옮겨적었다. 샤머니즘의 세계에서 접신한 무당이 예언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위의 옴파로스 사진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델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기독교를 믿게 된 로마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이를 파괴하는 바람에 그 작용 메커니즘을 파헤칠 수 없었다고 한다.

 

 

델피 신탁에 관한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는 오이디푸스에 대한 신탁이다. 그가 국왕인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관계를 갖는다는 신탁에 따라 갓난아기 적에 깊은 산속에 버려졌지만 구출되어 이웃나라에서 양육되었음에도 신탁을 실현하기에 이르렀다.
반대로 가장 고무적인 이야기는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 아테네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목책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은 이 신탁에 힘입어 목선을 건조한 후 숫적으로 상대도 안되는 적은 병선을 가지고 페르시아 해군에 맞섰다. 그 결과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해군에 대첩을 거둘 수 있었다.

 

* 델피 아폴론 신전 앞의 월계수 나무. 이곳 월계수 잎은 씹으면 의식이 몽롱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한다.
* 신전에서는 초기에 소녀를 무녀로 세웠으나 의뢰인이 늘자 50세 이상의 여성을 3인까지 두었다.
* 일찍이 그리스에 정착한 가이드 곽동훈 씨가 바위에 뚫려 있는 구멍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아폴론 신전의 지하 성소(adyton)에서 가운데 구멍에서는 유황가스가 스며나오고. 세 개의 구멍은 무녀가 앉은 트리포드를 고정시키는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 델피의 아폴론 신전 왼편 지하 성소에서 무녀가 트리포드에 앉아 신탁을 내렸다.
* 아폴론 신전의 보물창고

 

지혜의 신 아폴론에게 계시를 구하면 아주 영험한 메시지가 주어졌는데 그 해석이 매우 중요했다.

신탁을 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재물을 바쳐야 했으므로 아폴론 신전의 보물창고는 진귀한 보물로 가득 찼다.

돈이 없는 평민들은 점을 쳤다. 그리스에서 전도를 하던 사도 바울이 곤경에 처한 것은 신들린 소녀를 통해 사람들 점을 쳐주던 헬라인들이 바울이 귀신을 쫓아내자 물질적 타격을 입고 그를 배척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6:16-23).

 

왜 그리스 사람들은 점치는 것을 좋아했을까?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리스에서는 큰일이 생기면 델피 신탁에 의존하였던 것처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미래를 알아보려고 애썼다. 그리스에서는 도시국가 간의 전쟁이 수시로 일어나고 외적의 침입도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주로 바다를 통한 무역업에 종사하였기에 항상 위험을 안고 살아야 했다. 이를테면 위험관리 차원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점치는 방법으로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페르시아 원정 길에 나선 알렉산더는 생각이 달랐다. 그가 델피 신탁을 들으러 갔으나 신전에는 신관이 없었다. 강제로 끌려나온 신관이 알렉산더를 보고 "당신은 절대로 지지 않을 사람이요"라고 힐난 조로 말하자 알렉산더는 "내가 듣고자 했던 게 바로 그 말이요"하며 신전에서 나갔다고 한다. 신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얻는 자기확신과 사기진작이 필요했던 것이다.

 

* 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대부분 델피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그리스의 신탁(oracle)과 기독교의 계시(revelation) 내지 예언(prophesy)은 무엇이 다른가?

성경에서 스케일이 크고 적중률이 높은 예언은 다니엘서와 이사야서에 많이 나온다.

소싯적에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 왕의 측근으로 일했던 다니엘이 알렉산더 대왕을 묘사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수산성의 을래 강변에서 두 뿔을 가진 숫양을 보았는데 두 뿔이 다 길었고 그 중 하나는 다른 것보다 더 길었다. 그 숫양이 서쪽과 북쪽과 남쪽을 향해 받을 때 이에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 때 홀연히 한 숫염소가 서쪽에서 나와 온 지면에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두루 돌아다녔다. 숫염소의 두 눈 사이에 현저한 뿔이 솟아나 두 뿔을 가진 숫양에 돌진하여 엄청난 위력으로 숫양을 땅에 쓰러뜨렸다. 숫염소가 스스로 강대해졌으나 최고조에 이르러 큰 뿔이 꺾이고 그 대신 네 개의 뿔이 사방을 향해 뻗어났다." (다니엘 8:1-8)

 

* 테베 땅을 황폐케 하고 어려운 문제를 내서 사람을 잡아먹은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격퇴 당했다.

 

위의 예언대로 마케도니아 필립2세의 아들 알렉산더는 BC333년 4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 정벌에 나섰다.

잇수스에서 다리우스 왕의 페르시아 군과 격돌하였는데 결과는 알렉산더의 완승이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페르시아 다리우스 왕은 전차를 버리고 말에 올라타 왕의 표지까지 떼어버리고 도망갈 정도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알렉산더는 말머리를 남쪽 이집트로 돌려 두로와 가자를 치고 곧바로 이집트를 점령해 버렸다. 그 다음 타겟은 누가 보더라도 페르시아 총독이 관할하는 유대 땅이었다.

이 시기는 신ㆍ구약 중간시대(BC400-BC4)로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느헤미야의 지휘 아래 성전을 재건하고 선지자 말라기가 활동하던 것을 마지막으로 성경(구약)에서는 기록이 끊어진다. 선지자의 예언과 구원이 없는 이 기간을 암흑시대라고도 하지만 이 시기에 헤로도토스, 투키티데스, 플루타르크, 요세푸스 등 수많은 역사서가 기록되고 그리스 철학이 꽃을 피웠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 공동체는 지속되고 있었다.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유대의 대제사장은 여호와께 기도를 올리고 나서 자주색과 주홍색의 예복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금패가 달린 모자를 쓰고 또 백성들에게는 흰옷을 입혀 알렉산더 군대를 맞이했다. 유대 지도층은 자기 민족을 바벨로니아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성전 재건까지 허용했던 페르시아를 배신할 수 없었다. 한편으론 다니엘서 8장을 펼쳐 알렉산더의 용맹과 세계 정복 예언을 보여줬다고 한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대제사장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에서 원정을 떠나기 전에 꿈을 꾸었는데 어떻게 하면 페르시아와 동방 나라들을 정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울긋불긋 복장을 한 사람이 흰옷을 입은 무리와 함께 나타나 자기가 인도하여 승리를 거두게 해주겠노라 말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그 꿈을 상기하고 대제사장이 이끄는 대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는 매 7년 마다 그들의 안식년에는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며 후의를 베풀었다. 역사가 요세푸스 등 이스라엘 전승(傳承) 기록 참조.

 

* 세바스티노 콩카가 그린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참배하는 알렉산더 대왕
* 세계의 중심인 옴파로스는 박물관에 그 힘을 얽어맨 매듭으로 묶여 있다.
경주마차를 조종하는 젊은이의 동상은 표정이 살아있는 채로 원형 가까이 발굴됐다.
* 메테오라 기암괴석 위에 수도원이 있는 칼람바카 마을의 성당 앞 광장에서 뛰어노는 어린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