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6시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 항에 접근하면서 선상 일출을 보고 라운지에 모였다가 하선하여 대기해 있던 버스를 탔다.
오늘은 크레타 문명이 꽃을 피웠던 크노소스 궁전 유적지를 돌아보고 소설과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7)의 묘소를 찾아가는 일정이었다.
우선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저녁에 투숙할 예정인 Capsis Astoria 호텔로 갔다.
페리 안에서는 WiFi도 유료였는데 호텔 로비에서 WiFi가 잘 터지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 일행은 밀렸던 메일 체크와 카톡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크레타 섬의 분위기는 그리스와 사뭇 달랐다.
우선 지중해의 태양이 더 뜨거웠으며, 거리의 서점 간판도 크노소스 유물과 관련이 있고, 주민들도 터키와 사라센, 북아프리카 계 혈통이 많은지 피부가 더 검게 보였다.
크레타 하면 연상되는 미노스 문명은 이미 기원전 35세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산토리니 화산의 대폭발에 따른 쓰나미로 저지대가 수몰되고 파괴되는 참화를 겪었다.
크노소스 왕궁의 유적은 영국 옥스포드 대 박물관장을 역임한 아서 에반스가 1898년부터 35년여에 걸쳐 발굴한 것이다.
에반스는 트로이 문명 유적지를 발굴한 슐리이만처럼 그리스 신화에 주목하고 미노스 왕이 통치하던 크노소스 궁전을 찾는 데 성공했다. 그는 유적 발굴에 그치지 않고 왕궁 터의 무너진 기둥을 다시 세우고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지워져버린 벽화를 다시 그려 넣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편리하지만 고고학적인 가치가 반감되었다 해서 UNESCO는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것에주저했다.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에반스의 상상력 산물로 치부한 것이다. 영국 정부는 독일에 뒤져 있던 고대문명의 고고학 발굴에 기여한 공을 기려 그에게 기사(Knight 1911) 작위를 수여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그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BC3500년 전부터 이미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던 이 섬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것을 보고 절망했다 한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조금만 밀어도 쓰러질 것 같은 제국 말기적 상황이었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아테네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소르본느 대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그리스 육군에 자원입대하여 그가 모시던 상관(베니젤로스 총리)을 따라 정치에 입문하였다. 1922년 그리스가 터키와의 전쟁에 패배하자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되었으며, 크레타에서 나중에 그의 소설의 모델이 된 조르바를 만나 실제로 갈탄채굴과 벌목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이집트,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상세한 여행기를 남겼다.
이 대목에서 한국의 춘원 이광수와 비교가 된다. 조국과 민족, 가정과 전통에 얽매여 있던 춘원에 비하면 그는 훨씬 자유롭게 지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사상적으로 편력을 거듭하였다. 결혼도 두 번 하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기독교인이었음에도 그가 쓴 [미할리스 대장]과 [최후의 유혹]이 신성 모독이라는 이유로 그리스 정교회,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모두 금서로 지정된 데 이어 그 역시 파문을 당하고 말았다. 1957년 그가 독일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했을 때 이 때문에 그의 유해는 교회 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고 한다.
그의 묘소는 에게해가 내려다 보이는 성벽 안쪽에 백화가 만발한 가운데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그의 오랜 동반자인 두번째 부인 엘레니의 묘소가 수줍은듯 비켜서 있었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은 그가 생전에 미리 써 놓았던 석 줄의 유언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진정한 자유로움이란 무엇일까?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고 하셨는데 카잔차키스에게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를 쓴 사람으로서 일반 크리스천들처럼 "예수님"이라고 답변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스인, 세계인, 작가, 시인, 철학자, 사업가 -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그의 정체성(Identity)이 아니었을까?
카잔차키스 묘소에서 걸어 나올 때 해풍을 받아 가지가 한쪽으로 쏠려 있는 소나무가 끝내 말라죽고 만 것을 보았다. 끝내 굽히지 않았던 카잔차키스의 정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의 정신과 영혼은 자유로웠을까? 자유를 갈망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산위의 광산에서 해변까지 설치해 놓은 운반시설이 설계와 시공 잘못으로 마치 도미노처럼 모두 무너져버린다. 그럼에도 덩실덩실 춤을 추던 안소니 퀸의 모습도 떠오른다.
사도 바울이 말한 성령의 열매 - 오래 참음, 절제, 충성, 온유함(갈라디아서 5:22)이 결여된 인격은 결코 성령의 감화를 받았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우리나라에서 널리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시골의사' 박경철 씨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리스의 카잔차키스에 매달린 것은 얼마나 성과가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베네치아 성벽에 바깥을 향해 방사형태로 파여져 있는 굴이 일행들 사이에 논란거리가 되었다.
밀려오는 파도의 힘을 분산시키는 기능을 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으나 즉석에서 인터넷 검색을 한 분이 전형적인 베네치아 성벽의 캐논 포 쏘는 포구*였음을 밝혀냈다.
* 참고: Wikipedia에서 보는 베네치아 성벽 내부의 모습
여기서도 지중해 해상무역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베네치아 사람들의 조바심과 완전무결성을 보는 것 같았다.
뙤약볕 아래 돌아다녔기 때문인지 점심 먹고 들어간 호텔 방은 천국과 다름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3시 반 포럼 측에서 마련한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호텔 지하 1층 회의실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는 남북으로 나뉜 키프로스의 통일 협상에 관하여 한명섭 변호사가 주제발표를 하고 나를 포함한 3명의 전문가가 각자의 관점에서 코멘트를 하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시내 구경에 나섰을 때 주변이 갑자기 흥겨운 음악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호텔 앞 공원 무대에서 브라스밴드가 흥겨운 팝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다른 거리에서는 크고작은 북을 울리는 풍물패가 등장했다. 거리에 붙은 포스터를 보니 7월의 거리예술축제(Street Art Festival)를 알리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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