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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교동도] 통일의 결의를 다진 탐방행사

Onepark 2015. 11. 15. 17:19

11월 14일 남북물류포럼과 남북경제포럼(회장 이오영 변호사) 회원들은 공동으로 김포의 최북단 애기봉과 강화도, 교동도 탐방행사를 가졌다.

오전에 짙은 안개가 끼어 애기봉 전망대에 올라갔을 때에는 기대와는 달리 북한 땅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인 것이 요사이 남북관계와 같았다.

대신 전망대 소장님이 이곳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셨다.

 

이곳에 얽힌 이야기는 애기봉(해발 165m)의 전설이다.

조선조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에 쫓기던 평양감사가 개풍군에서 붙잡혀 끌려갔는데 그를 따르던 애첩이 조강리 뒷산에 올라 님이 오시는지 매일같이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녀가 죽을 때 님이 오시는 것을 맨먼저 보겠다며 산등성이에 묻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1966년 이곳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애기(愛妓)의 한(恨)이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가지 못하는 이산가족의 한(恨)과 같다"며 애기봉(愛妓峰)이라는 친필휘호를 써서 남겼다.

애기봉은 연말이면 북한 주민들도 볼 수 있도록 이곳 철탑에 전구로 장식한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설치한지 40년이나 되어 2014년 10월 안전상의 문제로 철거하였는데 이것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바람에 마치 북한측의 철거요구 압력을 못 이겨 그리한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경기도 김포시는 애기봉 철탑을 다시 세우는 대신 전망대가 포함된 '애기봉평화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점심 때 김포의 명물 새우젓으로 간을 두부조림과 함께 식사를 한 후 강화도로 이동하는 동안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떠내려 온 황소가 구조되었던 유도에 이르렀을 때에는 한강 이북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 황소는 황해지역의 홍수로 떠내려 온 것이지만 마치 북한주민이 탈출해 온 것처럼 환대를 받고 서산 농장으로 옮겨져 후손까지 남기고 남북이산가족 상봉의 상징이 되었다. 유도 앞에는 황소의 (플라스틱) 조각상도 서 있었다.

한강변에는 둘레길도 조성되어 있고 통일에의 염원을 다질 수 있는 관광지로서 개발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접경지역이라 일일이 군 부대의 동의를 받아야 하기에 그런 엄두를 못 내고 있다 한다.

 

우리 일행이 탄 버스는 강화대교를 거쳐 교동도로 건너갔다. 

2014년 7월에 강화도와 교동도를 연결하는 교량이 개통됨에 따라 교동도는 더 이상 망향의 한이 서린 '외딴섬'이 아니었다.

비록 해병대가 지키고 있지만 정전협정에 의하면 교동도는 공격용 무기가 허용되지 않는 '평화의 섬'이고. 교동도와 황해도 연백군 사이의 해역은 평화수역(Peace Water Zone)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한강 건너편은 북한 땅이었다. 특히 교동도에서는 지척으로 보였다. 6.25 당시 황해도의 연백평야는 북한의 곡창이었기에 북한군은 전력을 집중하고 필사적으로 이곳을 지켰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교동면사무소 앞에서 이곳 출신으로 "우리누리 평화운동"을 펼치고 있는 김영애(아래 사진의 맨 왼쪽) 씨를 만나 교동도의 역사와 현황에 대하여 친절한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김영애 씨는 교동도가 갖는 상징성을 강조했다. “교동도로 피란 온 실향민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분단의 애환과 실향민들 노고를 실감할 수 있다”며 “교동도를 감싸고 흐르는 한강하구(조강)는 정전협정 규정에 의해 서로 무력을 사용할 수 없는 평화수역으로 지정되어 지난 60여 년간 군사 충돌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마침 교동도의 하늘 위로 철새들이 V자 대형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하늘 길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면서 실향민들은 망향의 시를 노래 부른다고 한다.

 

와룡지 너른 들에 뜸북새 지저울고
북신당 맑은 샘물 솟구쳐 흐르는데
그리움 구름되어 비봉을 찾아드니
한 서린 안개되어 눈앞을 가리누나.
(후략)

 

교동도에는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

바로 피란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생업의 터전을 이룩하였던 대룡시장이다.

북한 땅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던 주민들이 하나 둘 강화로 김포로 떠나고 교동도가 외딴섬으로 있는 동안 건물이고 간판이고 시설이고 시간이 멈춘 것처럼 1960년대의 정물(still life)로 남아 있었다.

김영애 씨는 시장 복판에 대와 민속공방을 차려놓고 방문객들에게 교동도의 유래와 평화의 섬 운동을 설명하였다. 공중파 방송(KBS, SBS)으로 소개된 바 있는 교동도 실향민의 염원을 방문객들에게 전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공방의 처마에는 서울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제비집들이 여기 저기 붙어 있었다. 마치 강남 가기 전에 임시로 거처하는 초라한 집이지만 통일이 되면 고향 땅으로 훨훨 날아가겠다는 소망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대룡시장에서 찍은 위 사진에서 브나로드(Vnarod)란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이 운동은 19세기에 러시아의 지식인들에게서 시작되어 일제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1930년대에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다. 당시 언론기관이 중심이 되어 지식인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농촌계몽,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심훈이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던 소설 [상록수]가 그 전형을 보여준 것이다.

1960년대에 멈춰서 있는 듯한 교동도의 대룡시장에 이 포스터가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한반도 통일에 대하여 여전히 냉전시대적 사고에 젖어 있는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을 일깨우는 격문으로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