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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 해] Mars를 깨우는 종교갈등과 권력다툼

Onepark 2015. 4. 29. 20:55

두브르브니크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들어갔다가 다시 크로아티아 고속도로를 한참 달린 후 우리는 모스타르를 향해 동쪽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네레트바 강 상류쪽으로 올라가면서 우리가 탄 버스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국경을 다시 넘어야 했다. 이곳 국경초소는 통과여객이 아니므로 폴란드인 운전기사가 정식 입국절차를 밟느라 시간이 다소 지체되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모스타르(Mostar) 시의 에로 호텔에 도착한 것은 저녁 7시 반이 다 되어서였다.

우리 일행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비록 날은 어두워졌지만 새로 복구되었다는 옛다리(Stari Most)를 보러 갔다.

 

 

1993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분리와 잔류를 둘러싸고 보스니아에서는 기독교도와 회교도 사이에 살륙전이 벌어졌다. 티토의 강권 통치 하에서는 잠잠하던 종교적, 인종적 갈등이 소연방의 해체로 이데올로기가 퇴색되면서 종교와 민족주의가 전면에 투영된 결과였다.

모스타르에서도 두 진영을 연결하였던 유서깊은 옛다리가 파괴되는 등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지금까지 도시 곳곳에 포격으로 반파된 건물이나 탄환자국 등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도심에 위치한 높은 첨탑의 천주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파괴된 종전의 교회 터에 새로 신축한 것이라 했다. 카페로 이용되는 부속건물의 벽에는 총탄 자국이 역력했다. 바닥에는 종전의 교회 내부 구조가 표시되어 있었다.

1993년 인종과 종교가 복잡한 보스니아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세르비아계는 세르비아 공화국과 합치겠다고 나서고 크로아티아계는 크로아티아에 합류하려 했으며 이슬람계는 분열을 거부했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가 각각 보스니아 내 자민족 민병대를 지원하면서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세르비아의 지도자 밀로셰비치는 인종청소와 대량학살을 명령했다. 3년 이상 계속된 전쟁은 NATO의 개입과 미국의 중재로 1995년 12월 간신히 끝이 났다. 내전 기간 중 10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숨지고, 220만명이 고향을 등졌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지금은 로마 가톨릭교, 세르비아 정교, 이슬람교가 평화롭게 공존한다. 종교별로 각기 대표를 선출하고 공무원을 두고 있어 표면상으로 관용을 앞세우고 유태인들을 위한 시나고그 부지까지 마련해 놓았다고 한다.

 

 

어제 밤 조명 아래서 보았던 새로 복원한 옛다리의 아치가 주위의 풍경과 어울려 아름답게 보였다.

다리 아래로는 네레트바 강이 급물살을 이루며 흐르고 주변에는 기념품점과 카페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다리의 바닥은 파괴되었던 옛다리의 석재를 써서 전과 똑같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한쪽에 "1993년을 잊지말라"는 표지석이 놓여 있었다.

나 역시 감개무량하여 옛다리의 아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주변에 서 있는 모스크(회교사원)의 첨탑과 저 멀리 산 위에 세워진 기독교 십자가가 함께 배경으로 들어왔다.

하늘에는 큰 지도같은 구름이 전쟁의 신(Mars)이 군대를 이끌고 철수하는 것처럼 멀어져 갔다.   

 

 

모스타르 관광을 마치고 국경 관문이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는 크로아티아로 이동하였다.

여러나라로 여행을 해 보니 크로아티아는 고속도로 등 인프라가 실제 교통량에 비해 잘 만들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스플리트(Split) 도심은 활기를 띠어 보였다. 1시 반이 넘어 늦은 점심 식사를 한 후 아드리아 해 항구에 면해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을 보러 갔다. 

 

 

현지 가이드의 해설을 들으며 디오클레시안 궁전 내부를 구경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곳 스플리트 하층민(노예?) 출신의 군인으로 황제 근위대장으로까지 승진한 후 정복전쟁 중에 황제로 옹립되었다.

그는 군인황제 시대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국방을 튼튼히 하여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는 일에 힘썼다. 그러나 로마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정제와 부제를 두는 4두정치제제(Tetrarchia)를 구축하였다. 기독교와 마니교가 황제의 권력을 위협한다고 하여 기독교도를 탄압하기도 했다. 

그는 고향에 화려한 별궁을 짓고 자진 은퇴한 후 이곳에 머물며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자신이 제우스로부터 황권을 수여 받았다며 이곳 별궁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기까지 했다(제우스 신상은 훗날 지금의 세례요한으로 대체되어 세례식이 베풀어졌다). 그러나 권력을 손에서 놓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노년은 처자마저 정쟁에 희생되는 등 매우 참담했다고 전한다. 

 

 

디오클레시안 궁전 밖으로 나가니 그레고리우스닌 동상이 서 있었다. 종교의식에 있어서도 크로아티아 언어를 쓰도록 권장하여 이렇게 추앙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의 신앙심과 문장력을 본받고 싶은 사람들이 그의 발가락을 어루만지는 바람에 하얗게 반질반질해 있었다.

궁전 안팎의 중세 건축물은 다자르 등지에서 보았던 건축양식과 비슷비슷하였다.

자유시간이 주어져 우리 일행은 야자수가 서 있는 아드리아 해가 보이는 프롬나드 벤치에 앉아 모처럼 망중한을 즐겼다.

어제 오늘 보았던 많은 문화유산과 사람들이 종교적 갈등이나 권력 다툼에 휘말려 전쟁(Mars) 중에 희생이 되었던 것을 돆똑히 볼 수 있었다. 여전히 남과 북 긴장상태에 있는 한반도의 상황이 오버랩되었다.    

 

 

아드리아 해의 풍광을 즐기기 위해서는 새롭게 기분전환이 필요하였다. 

다음 행선지는 스플리트와 비슷한 휴양지 트로기어(Trogir)였다.

스플리트 도시의 확장을 가로막는 산을 통과하는 사이에 로마시대에 만들었던 수도교가 여전히 건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토르기어 리조트의 광장에 가니 아카펠라 넘성 4중창단이 우리 일행을 위해 달마시아 지방의 민요와 전래가요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흥겹고 쾌활한 곡조의 노래를 들으며 여행의 피로를 씻을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답례는 그들이 녹음한 CD를 사주는 것으로 갈음하였다.

 

 

숙소는 비오그라드(Biograd)에 있는 일리리야 리조트 호텔이었다.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서쪽 하늘에서 연일 강행군을 하는 동안 보지 못했던 저녁놀을 감상할 수 있었다.

우리의 숙소에는 한국 관광객들도 많이 있었는데 안팎으로 파스텔 톤으로 장식한 매우 모던한 호텔이어서 아주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