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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 해] 바다 & 옛 성곽도시

Onepark 2015. 4. 28. 23:17

아드리아 해 여행 셋째 날 오전 크로아티아에 들어서니 발칸 반도의 지형적 특색이 드러나 보였다.

나무가 별로 없는 황량한 산은 험준하기까지 하고, 농업은 해안 쪽 일부 지역에서나 가능해 보였다. 사막에 비유를 하자면 지중해 연안이 오아시스인 셈이었다.

바다가 잔잔한 지중해는 해상무역에 적합하여 교통요지에 자리잡은 항구를 중심으로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고 중계무역이 발달하였다.

 

 

자다르(Zadar)는 제4차 십자군전쟁(1202~1204)과 관련이 있다. 1200년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예루살렘을 되찾자고 제창해 프랑스와 독일의 제후들이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였으나 이들을 호송하기로 한 베네치아에 지불할 배삯이 부족했다. 베네치아의 지도자 엔리코 단돌로가 십자군 수뇌부에 제안한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기독교국가인 헝가리 제국에 속한 자다르를 약탈하여 배삯에 충당하고 동방무역에 걸림돌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을 빼앗자는 것이었다. 당초의 종교적 신념은 사라져버리고 참전하는 제후들의 사리사욕에 휘말린 추악한 전쟁이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십자군 전쟁은 처음의 숭고한 목적을 상실하고 본말(本末)이 전도되어 버렸다.

 

베네치아인들은 해상교역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이곳 자다르 지역을 점령하고 반도 모양의 해안에 성곽을 두르고 교회와 상가를 건설하였다. 음용수를 조달하기 위해 가로의 빗물을 모아 큰 우물을 만들고 이를 아껴 썼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해안 성곽대신 볼거리와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를 많이 만들어 놓았다.

 

 

자다르는 구 시가지 전역이 Free WiFi Zone이었고 해변에 파도가 칠 때마다 파이프를 울리게 하는 바다 오르간(Wave Organ)도 만들어 놓았다.

이곳을 방문한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감독은 "자다르 여인이 예쁘고, 저녁놀이 아름답고, 이곳의 특산 마라스카 술이 그만"이라고 말했다 한다.    

 

 

아쉽게도 자다르 관광을 서둘러 마치고 그 다음 행선지인 쉬베니크(Sibenik)로 갔다.

이곳도 성곽도시였다. 야곱 교회를 본 후 좁은 계단을 걸어 올라 쉬베니크 요새로 갔다.

입장료가 필요했으나 유로화를 안 받는다고 하여 성곽 위로는 못 올라 가고 그 아래 공동묘지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것으로 갈음해야 했다.

 

 

숙소는 해변에 가까운 스포츠 컴플렉스여서 호텔 안팎에서 야유회 비슷한 모임이 여럿 열리고 있었다. 

호텔 식당도 대규모 행사를 치룰 수 있도록 초대형이었다.

4일째 되는 날 우리 일행은 해안도로를 따라 일로 남하하였다. 

오른쪽 창밖으로 펼쳐진 아드리아 해의 코발트 빛 바다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밝은 태양 아래 파도는 잔잔하고 연안의 섬들은 마치 두루마기의 그림처럼 죽 이어져 있었다.

 

 

12시가 조금 지나서 이윽고 두브로브니크(Dubrovnik) 신 시가지 입구에 도달하였다. 

서스펜션 브리지 건너 부두에는 대형 크루즈 선박이 여러 척 정박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앞으로 이곳에서 뭔가 익사이팅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버스는 구 시가지 성곽 가까운 좁은 길에 들어섰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남녀 고등학생들은 우리 학생들이나 다름이 없었다.

올드 타운 부두에도 소형 요트가 여러 척 정박해 있었다. 

 

 

우리 일행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부둣가 테라스 레스토랑에 앉아 스파게티를 시켜 먹었다.

마침 테라스의 밴드가 프랭크 시나트라의 재즈 "I've got you under my skin"(나는 당신을 내 몸 안에 간직했소)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로맨틱한 가사와 흥겨운 멜로디로 인해 두브로브니크에서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현지 가이드를 만나 우리 일행은 해설을 들으며 성곽 안의 올드 타운 관광을 시작했다.

두브로브니크는 1806년 나폴레옹 군대에 무릎을 꿇을 때까지 자유도시로서 주로 지중해 무역에 종사하였다. 오스만 투르크에는 조공을 바치고 베네치아와는 경쟁관계에 있었으며 베네치아의 공격에 대비하여 성곽을 높이 쌓고 대비하였다고 한다.

두브로브니크를 크게 파괴한 것은 1667년의 대지진이었다. 근자에는 유고 내전 당시 유서 깊은 성곽도시가 파괴될 위험에 직면하였다. 이미 1979년에 UNESCO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 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인간 띠'를 만들어 유적의 파괴를 막았다.

 

 

현지 가이드의 해설을 들으며 총독(Rector) 관저의 내부를 구경했다.

나폴레옹의 이태리 왕국에 편입된1806년까지 두브로브니크는 베네치아와 오스만 투르크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한 자유도시로서 여러 유력 가문이 지배계층을 구성하는 공화정이었다. 총독은 한 달씩 돌아가며 맡았는데 임기 중에는 관저를 떠나지 않고 집무를 하였다고 한다.

총독 관저 안에는 재산을 헐어 빈민구제에 힘쓴 지도자의 동상이 서 있고, 실내에는 당시의 가구 집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지하감방과 면회 온 가족이 죄수의 빨래를 해주는 곳도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성곽으로 올라가 마치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순찰을 돌듯이 해안 쪽으로 반 바퀴를 돌았다. 

 

 

다시 부둣가로 내려와 소형 보트를 타고 50분 동안 두브로브니크 항을 일주하였다. 조금 떨어져 바다에서 바라보니 올드 타운의 성곽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였다. 뒤에는 산이 병풍처럼 솟아 있고, 바로 앞에는 섬이 있어 외해의 높은 파도를 막아주었다.

성곽 외곽에는 두브로브니크에 일하러 오는 사람들을 일정 기간 수용하고 그들의 체력과 능력을 테스트하는 노란색 외벽의 수용소 건물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올드타운을 떠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지막으로 지갑을 열게 만드는 기념품 가게와 노천 카페, 거리의 화가 작품들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 일행은 두브로브니크와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해안도로를 따라 왔던 길을 되짚어 북상하였다.

티토 사후 유고슬라비아가 6개 나라로 분할이 되면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내륙국가를 면하고 바다로의 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네움(Neum)이라는 도시를 고수하는 바람에 크로아티아는 두브로브니크가 본토와 떨어진 외딴 섬이 되었다. 다시 한 번 간단한 수속을 밟고 우리가 탄 버스는 국경을 통과해야 했다.

 

 

아드리아의 짙푸른 바다가 
중세에는 베니스 상인의 
번창하는 무역로. 
오늘날에는 
멋진 경치에 감탄하며 
수많은 관광객들이 지갑을 여네

The Adriatic Sea,
Once prolific trade routes
Of the Venetian merchants,
Now becomes an invaluable cash cow
For those states welcoming foreign touri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