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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5월의 보라빛 등나무 꽃 단상

Onepark 2012. 5. 10. 00:39

어느 시인은 등나무 꽃을 보고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등꽃 서러움은 풍성한 꽃송이 그 화려함 만큼이나
덧없이 지고 있는 꽃 그늘 뿐이어서
다시 꽃 필 내년을 기약하지만
.  .  .
차라리 등꽃 보라나 되어
화라락 지고 싶어라

김명인, "저 등나무 꽃 그늘 아래" 중에서

 

 

목련도, 벚꽃도, 라일락 꽃도 지고나면 그윽한 향기를 풍기면서 보라빛 등나무 꽃이 핀다.

등나무 넝쿨은 그 자체가 그늘을 만들기에 무엇보다도 화려한 꽃이 있는 듯 없는 듯 피어 있다.

나 역시 매일 그 앞으로 다니면서도 등나무 꽃이 피어 있는 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몇 년 전 안식년 때 LA에서 거주했던 파크 라브레아(Park La Brea) 아파트 단지 안에 만개했던 자카란다 (Jacaranda) 꽃나무가 생각났다. 잎과 수형(樹形)이 아카시 나무 같이 생겼는데 꽃은 영락없이 보라빛 등나무 꽃을 닮았다.

다만, 등나무 꽃과 같은 향기가 없어 무미건조한 것이 아쉽게 느껴지곤 했다. 그곳에서 보냈던 날들이 새삼 추억으로 떠올랐다.

 

자카란다 가로수가 유명한 곳은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이다. 넬슨 만델라가 집권한 후 백인 정권이 가꿨던 자카란다 가로수도 없애자는 여론이 비등했으나 만델라가 일축했다. 잎이 무성하고 꽃이 아름다운 가로수에는 흑백 차별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사는 아파트도 꽃동산으로서 손색이 없다.

아파트 정원의 산책로에서 철쭉이 절정을 지날 때쯤 그 밑에서 수줍게 보라빛 꽃이 피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면서 이처럼 안복(眼福)을 누리는 사람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때 마침 "도래미파솔라시도" 한 옥타브로 노래 부르듯 하는 새소리도 들렸다.

 

 

아파트 베란다에서도 조그만 소동이 벌어졌다.

지난 몇 년간 꽃을 피울 줄 몰랐던 군자란이 서로 경쟁을 하듯이 주홍색 꽃을 피운 것이다.

수령이 오래된 꽃이어서 잎만 보고 말리라 했는데 그 존재의의를 확실히 부각시켰다.

 

 

그런 의미에서는 학교 연구실에서 수줍게 피어 있는 게발선인장도 빼놓을 수 없다.

집에 있는 게발선인장은 늦가을에 피는데 연구실의 것은 4월 말 5월 초에 피는 종류이다.

집이나 학교에서나 꽃 밭에서 지내고 있는 저는 정녕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 앞서 소개한 김명인 시인의 시는  화사하게 피어 있는 등나무 꽃 아래 무료급식소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의 서글픈 모습을 보고 지은 것이다. 강렬한 콘트라스트로 2000년 현대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