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를 참 좋아한다.
법학교수이다 보니 학교 안팎에서 영화를 소재로 강의하는 기회가 적지 않다. 그럴 때면 개인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영화평이 좋은 텍스트가 된다.
그 동안 변호사협회와 서울시 공무원교육원의 요청으로 예비변호사, 서울시공무원들을 상대로 [스크린 위의 법적 현실], [영화로 배우는 소송실무] 같은 특강을 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이번은 사정이 좀 달랐다.
지난 4월 초 사법연수원의 특강 요청을 수락하고 나서 내용을 들어보니 법관들의 2012년도 ‘재판진행기법에 관한 세미나’에서 [영화 속의 법, 그리고 법관]에 대하여 영화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참석대상자 면면을 보니 고등법원 부장판사에 이르기까지 40명이 넘는 법관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도 법정에 서본 적이 없는데 실제 재판을 진행하는 판사님들을 상대로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도 좋은 기회다 싶어 자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법률영화, 법정 드라마는 많지만 법관이 주인공인 영화는 별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존 그리샴 같은 변호사인 작가가 후환이 있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재판장을 조롱하거나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인터넷을 뒤지고 기억을 더듬어가며 몇 편의 후보작을 고르고 콘티를 짰다.
* 법관의 비중이 큰 영화 찾기
일단 금년 초 화제작 <부러진 화살>이 떠올랐다. 또 성경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 이야기도 있었다. 예수가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무시하고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관이 억울한 사정이 있는 과부의 신소를 들어주었다고 하셨다. 우리도 이처럼 하나님한테 매달리며 끈질기게 기도를 해야 한다는 예화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사법정의의 실현에도 무대장치가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게 하라, ▹당사자의 변론을 뛰어넘는 판례이론도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결론으로는 ▹반전과 감동을 안겨주면 금상첨화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다음은 사법연수원 특강 중에 소개한 영화의 목록과 PT 중에 소개한 장면의 간단한 설명이다.
해당 비디오 클립은 생략한다.
물론 영화 매니아들에게 줄거리를 말해주는 것은 ‘스포일러’라 해서 금기에 속한다. 그러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머랜다 편집장(메릴 스트립)이 자선파티 석상에서 두 여비서의 도움을 받아 초청인사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아래 사진) 영화도 적절한 해설이 있으면 그 장면의 의미와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의하면 로마시대에 유력한 정치인은 로마시민의 인적 사항을 귀띔해주는 노멘클레이터를 비서처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 일반적인 소송절차의 진행
<내 사촌 비니(My Cousin Vinny)> 앨라바마주의 시골을 여행하던 중 살인범으로 몰린 두 청년이 갓 변호사가 된 사촌 비니에게 도움을 청한다. 비니는 여러 해 도전 끝에 변호사시험에 가까스로 합격하였고 법정경험도 전무하다. 비니는 약혼녀까지 데리고 시골 법정에 나타나 재판장으로부터 복장이 “로여답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고 재판 도중에도 좌충우돌하며 법정에서 쫒겨날 뻔한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반대신문을 통해 검찰 측 증인의 허점을 파헤치고 두 피고인의 누명을 벗기는 데 성공한다.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The Lincoln Lawyer)> 링컨 타운카를 타고 경찰서로 법원으로 다니며 형사사건을 수임하는 변호사(매튜 매커너히)가 위기에 처한다. 순진한 부잣집 아들 같아 고액의 보수를 받기로 하고 사건을 맡았는데 그가 진짜 살인범인 것을 알게 된다. 변호인은 고객의 비밀을 밝히는 즉시 변호사를 그만둬야 하기에(Attorney-Client privilege) 영리한 피고인이 그를 함정에 빠뜨린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고심하던 그는 법정에 형사들을 불러놓고 검찰 측 증인이 감방동료를 밀고하는 사람이고 증언도 조작된 것임을 밝혀낸다. 재판장은 검사와 피고인측 변호사를 사무실로 불러 담당검사를 질책하고 배심원평결 없이 피고인을 무죄 석방한다. 그러나 검사 측 증인의 진술을 통해 비슷한 다른 사건의 진범임을 알게 된 형사들이 그를 체포한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던 것이다.
▹ 사법정의의 실현에도 무대장치가 필요하다
<아미스타드(Amistad)> 스필버그 감독의 또 다른 <쉰들러 리스트>라고 불린 영화이다. 아프리카 서부해안에서 노예상에게 납치된 흑인들이 선상반란을 일으켰다가 미 해안경비대에 붙잡혀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노예는 화물과 같으니 선주의 본국인 스페인에 반환하라는 외교적인 압력이 거세다. 반뷰렌 대통령은 노예제를 지지하는 남부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이 문제로 내란이 터지지 않을까 우려한다.
흑인들의 변론을 맡게 된 존 퀸시 애담스 전직 대통령 변호사는 "자기네 조상이 재판을 이기게 해줄 것"이라는 아프리카 흑인의 말을 듣고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9명의 대법관 중 7명이 노예제를 지지하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해밀턴, 워싱턴, 존 애담스 등 미국의 건국지도자들을 언급하면서 "미국 독립전쟁의 마지막 전투"라고 그 사건을 규정한다. 마침내 대법관들은 1명을 빼놓고는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판결을 내놓는다.
▹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게 하라
<발명의 순간(Flash of Genius)> 간헐적으로 움직이는 와이퍼를 발명한 컨즈는 포드 자동차를 상대로 특허권침해 소송을 제기한다. 10년 이상을 끌어 온 소송에 지친 나머지 부인도 그의 곁을 떠나가고 그는 변호사를 구할 수도 없어 자녀들과 함께 자신이 직접 소송을 수행한다.
그의 특허기술이 기존 기술을 짜깁기한 것이라는 피고 측 증인에 맞서, “그렇다면 사전에 나와 있는 영어단어를 나열한 디킨즈의 소설도 창작이라 할 수 없는 것이냐” 하고 반박한다. 심지어는 재판장의 배려로 스스로 증인이 되어 소송당사자와 증인이라는 1인 2역을 수행하기도 한다.
▹ 당사자의 변론을 뛰어넘는 판례이론도 필요하다
영화를 통해서 법률이론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는 사례로 두 편의 영화를 소개했다.
<반지의 제왕 1편: 반지원정대(Lord of the Rings: Fellowship of the Ring)> 소인족이 반지를 지녔을 때 지상에 평화가 찾아왔고, 소인족인 프로도가 절대반지를 운반하는 사명을 맡게 되었다는 설정은 소액주주(Minority)를 존중하는 영미식 기업지배구조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아바타(Avatar)> 아바타는 독자적인 생존능력도, 판단능력도 없지만 컨트롤 유니트에서 조종하는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 나비족의 낙원 판도라 행성이 탐욕스런 지구인들에 의해 파괴될 찰나, 아바타도 그를 조종하는 인간들도 나비족과 함께 맞서 싸운다. 마찬가지로 구글의 스트리트뷰 사건에서 보았듯이 국내 거점이 없는 글로벌 인터넷사업자가 회복할 수 없는 기본권 침해행위를 자행하였을 때에는 아바타 같은 사람이 행한 국내 위법행위에 대해서도 본사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본다(개인정보보호법의 역외적용).
* 필자의 홈페이지(Internet/Privacy 논문)에 실려 있는 “글로벌 인터넷사업자의 개인정보침해에 대한 규제 - 아바타 이론의 제안”, 정보보호학회지 21권 5호, 2011.8. 참조.
▹반전과 감동을 안겨주면 금상첨화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는 실명한 상이군인 프랭클린 슬레이드(알 파치노)의 탱고(Por una Cabeza) 춤 장면으로 유명한 영화이다. 슬레이드 예비역 중령은 뉴욕으로의 마지막 여행 때 에스코트 알바를 했던 동부의 명문고 학생 찰리(크리스 오도넬)가 제적당할 위기에 처하자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학교를 찾아가 열변을 토한다. 비행을 저지른 친구를 밀고하지 않았다고 퇴학처분을 내리는 학교가 어떻게 국가지도자를 양성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열변에 회의를 주재하던 교장도, 징계위원들이나 이를 방청하던 학생들도 찰리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필라델피아(Philadelphia)> HIV 양성반응이 나타나자 필라델피아 로펌에서 퇴출당한 앤드류(톰 행크스)는 그를 해고한 로펌을 상대로 소송을 벌인다. 최후진술 때 그는 촉망받는 유능한 법조인으로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기 좋아했노라고 말하고 법정에서 쓰러진다.
* * *
마침내 예정되었던 100분이 지나고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다.
나는 법관들을 향해 불의한 재판관을 언급한 성경에는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잠언 31:9)는 말씀도 있다고 전했다. 법관은 재판을 때 정의를 기준으로 하고,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지켜줘야 하며, 법관의 판결문은 오직 이러한 사명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고 끝을 맺었다.
'Peop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시회] 은퇴 후 화가로 변신한 김민홍 교수 (0) | 2012.05.18 |
---|---|
[결혼식] 화창한 5월 대전 누이집의 혼사 (0) | 2012.05.13 |
[Ph.D.] 이동욱, 김양곤 박사학위 Congrats (0) | 2012.02.03 |
[친우] 권오현 부회장 승진축하 친구들 모임 (0) | 2012.01.07 |
[행사] 김문환 교수 논문집 봉정식 (0) | 2011.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