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사촌형님(朴燮鏞)이 초등학교 시절의 일본인 은사를 극적으로 재회하신 후 그 소감을 적어 보내주신 것이다. 이를테면 <TV는 사랑을 싣고> 프로처럼 편지가 70년 전의 은사와 제자가 재회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섭용 형님은 우리 집안의 종손이시자 집안의 중심 역할을 하시는 어른이시다. 현재 LA에 살고 계시는데 필자가 2007년 LA에서 연구년을 보낼 때에도 장남인 홍균(세라젬 미국본부 CFO) 군을 시켜 여러 모로 보살펴 주셨다. 일본인 은사를 방문하실 때에도 필자더러 동행하자고 하셨으나 강의 일정 때문에 가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다음과 같은 사연을 보내주셨다.
I. 운봉의 지리적 환경
나는 운봉(雲峰)이라고 하는, 지리산록 해발 600m의 고원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이곳에서 20km 더 가면 경남 함양이고, 서쪽으로 20km 고개로 내려가면 춘향전으로 유명한 남원이다. 또 남쪽으로 20km 가면 화엄사로 유명한 전남 구례에 당도한다. 이렇게 운봉은 전남, 경남, 전북의 경계이며, “1년 농사를 잘 지으면 3년 먹는다”는 넓은 분지를 이루고 있다. 앞산이 모두 1000m가 넘는 지리산 연봉이고, 사방이 아름다운 산세로 둘러싸여 있고 동네를 흘러가는 맑은 시냇물은 산내(山內)의 신라 때부터의 대찰인 실상사(實相寺) 앞을 지나 흘러흘러 낙동강으로 간다. 이상하게도 4km 정도 남원으로 가면 여원치인데, 그곳 물은 섬진강으로 흘러간다. 말하자면 섬진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인 것이다. 옛날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 두 나라의 싸움 가운데, 운봉은 때로는 신라가 되기도 하고 백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춘향전에는 ‘운봉 영장(營將)’이 등장한다. 비록 조그만 고을이지만 군법(軍法)으로 주변의 현감들을 지휘 감독했다고 한다. 고려 말 왜구가 창궐했을 때, 후에 태조왕이 된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운봉 황산에 진을 치고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 일당을 섬멸하였는데 전승지인 그 자리에 지금도 어마어마한 황산대첩비가 서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곳에서 4km 정도 떨어진 인월(引月)이란 곳이 역촌(驛村)이었다.
II. 나의 초등학교 시절
운봉 소학교는 한일 합방 전인 1907년에 나의 증조부께서 사립 만성학교(晩成學校)로 세우신 것인데, 스스로 교장이 되어 신문물(新文物)을 받아들이셨다. 그 학교가 1912년 이후 공립학교가 되어 내가 입학하던 1935년에는 6학년에 6학급의 학교가 되었다. 주변의 인월, 아영, 산내 등은 4년제 간이학교였다. 학교장은 반드시 일본인이었고, 그 외에 한두 명의 일본인 선생이 있었다.
1938년 내가 4학년 때 마쓰오(松尾) 선생이라는 아주 명랑하고 쾌활한 인물 좋은 일본인 선생이 와서 우리 담임이 되었다. 중학교 때 축구부 주장이었다는 그 분은 전주사범 강습과를 나온 뒤 첫 부임지였는데, 한 20세쯤 되어 보였다. 그 분은 일본인 선생 같지 않았다. “고쿠고죠요(國語常用)”하라고 단속이 심하였는데, 오불관언(吾不關焉)이었다. 못 입고 못 먹는 아이들이 있었고, 그 때 겨울에는 도무지 목욕조차 하지 못하여 땟국물이 흐르는 그야말로 “닝니쿠구사이”(마늘 냄새 지겹다는 일본말)가 대부분이었는데, 그 분은 그런 것을 차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선생이 좋았다. 심지어 여름에 그 선생은 겨드랑이 냄새가 심해서 다른 애들은 코를 싸매는데, 나는 그 냄새조차 좋았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 해부터 우등생이 되었다. 50명 중 3, 4등까지 했던 것 같다.
그 선생은 대성여관이라는 곳에 하숙을 했었고, 나중에는 우리 집에서 가까운 집을 세내어 자취생활을 했다. 다테야마(立山)라는 일본인 선생과 함께였다. 가끔 놀러가기도 하고 또 선생이 불러 가기도 했는데, 얼마 떨어진 곳에 있던 만석꾼 부자의 별장으로 자주 놀러갔다. 지금도 그 선생과 그 무렵에 찍은 사진이 다선 장이나 남아 있다. 함께 찍은 친구가 네 명이나 저 세상으로 가서 선생과 나만 살아 있다.
나는 5학년 3학기에 서울 덕수초등학교로 전학을 했고, 그 선생은 2년 후 교사자격을 갖추어 정(正)교사가 되려고 평양사범학교로 공부하러 갔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었다. 해방 후 그 선생의 생사여부가 궁금했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릴 때 기억으로 그 분 이름이 마쓰오유기오(松尾行雄)이고 규슈(九州) 오이타현(大分縣) 출신인 것만 알고 있었지만, 그냥 몇십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내가 미국 이민 온 것이 30년이니 그럭저럭 70년의 세월이 흘러간 것이다.
III. 서신 왕래
2007년 가을 그 분이 고향인 오이타현 나카쓰(中津)시에 건재하시다는 것을 알고 편지를 썼다. 실로 오래간만에 쓰는 일본말 편지에서 고지링(廣辭林)을 뒤적이면서 썼는데, 그 후 그 편지 사본을 본 일본통 박승서 형이 “편지를 정말 잘 썼더라”고 칭찬을 해주어서 기분이 좋았다. 물론 미국으로 장문의 답장이 왔다. 70년 전의 소년을 기억하고 계시고, 당신 생전에 만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2년 전 좌골신경통의 대수술을 받아 보행이 불편하여 전기로 움직이는 휠체어를 타고 동네를 다닌다고 하시며, 또 통풍(痛風)이란 병도 앓고 있는데, 요즘은 요산을 없애주는 좋은 약물이 많아서 걱정 없다고 했다. 오미야게(선물) 같은 것은 걱정말고, 우리집에서 며칠 먹고 자며 옛날 이야기고 하자고 했으며, 가족사진과 전통적인 일본식 건물의 당신 집 사진도 함께 보내주셨다.
두 번째, 세 번째 계속 편지가 왔는데, 후쿠오카(福岡) 공항에서 당신의 집으로 오는 약도, 이용해야 할 교통수단 등을 자세히 알려 주셨다. 만나기를 기다리는 심정을 쓴 편지, 그리고 그 곳 벚꽃 만개 시에 맞추어 왔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이렇게 환영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으며, 70년 전의 12, 13세의 소년 제자를 이렇게 기다려 주는 선생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다.
서울에 먼저 가서 우리 북악회(경복고등학교 동창회) 총회에 참석하고, 고향 선영에 성묘하고, 4월 6일 일요일 아침 후쿠오카행 KAL을 탔다. 몇 년 전 여러 친지들과 함께 도쿄 근방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나라(奈良) 등 12일간 여행을 했지만, 그 때는 일본에 오래 산 조카 되는 사람이 안내를 하여 하나도 걱정이 없었는데, 단신으로 가는 것이고, 일본말이 제대로 될 것인가도 의문이었다.
IV. 극적인 재회(再會)
후쿠오카 공항도 국제선과 국내선이 따로 있었으며, 기차 타는 역은 국내선 공항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야만 했다. 선생은 잇보혼셍(日豊本線) 소닉호 특급을 타고 나카쓰에 내리라고 했는데 자동으로 사는 표를 내 재주로는 살 수가 없었다. 정산소(精算所)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역원에게 부탁했더니, 두 말 없이 쫓아와서 표를 사주는데 10일 동안 유효하니 왕복을 사면 값이 많이 싸다고 알려주었다.
나카쓰 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상코(三光) 모리야마(森山)의 마쓰오 선생”이라고 했더니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전망이 좋은 언덕 위에 있는 저택이었다. 일본식 고옥(古屋)으로 내부도 잘 정돈되어 있고 깨끗한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서울에서 미리 전화는 드렸지만, 내외분이 기다리고 있어서 너무도 고마웠다. 넙죽 엎드려 큰절을 했다.
당신 집에서 먹고 자라고 하셨지만, 고령의 노인들이라 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서 편지로 사양을 하고 일본식 료칸(旅館)을 예약해 달라고 했었는데, 선생 왈 “이런 시골에는 예쁜 ‘오카미상’도 없을 뿐 아니라 숙박료가 몹시 비싸서 역전에 있는 호텔을 잡아 놓았다”고 하신다.
그 날 밤 댁에서 87세의 사모님이 손수 준비한 저녁을 대접 받았다. 외식을 했으면 좋겠다고 해도 한사코 이미 준비되어 있다 하시면서, 식품점에 들러 김치를 큰 병으로 사신다. “조선에서 김치에 중독이 되어 그것 없이는 밥을 먹을 수가 없다”고 하신다. 반주를 하면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하셨다.
“네 소식은 여러 사람에게 들어, 네가 미국으로 이민 간 것도 알고 있었다. 너의 아들이 미국 공인회계사(CPA)로 돈을 잘 번다고 들었다”며 웃으신다. 정말 놀랄 일이었다. 아마 서강대 부총장을 지낸 초등학교 3년 후배인 서정호(徐正湖) 박사에게서 들으셨나 보다. 우리 아들이 귀국하여 서울 출신 규수와 결혼했는데, 서 박사가 주례를 해주어 잘 알기 때문이다.
V. 스승의 회고담
종전 후 고생한 얘기를 하신다. 남쪽에 있었으면 그런 고생을 하지 않고 귀국했을 텐데, 평양에 있었기에 큰 고생을 하셨단다. 평양사범 본과를 일등으로 졸업하고 다시 운봉으로 가려고 했으나, 사범학교 교장이 수석 졸업생은 반드시 사범부속 교사로 남아야 된다고 우겨서 그냥 평양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1945년 8월 초에 드디어 소집영장이 나왔다. 소련군과 접전을 했으면 전사하거나 시베리아 노역장으로 끌려갔을 텐데, 미처 그럴 경황도 없이 종전이 되어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졌다. 그러나 38선을 넘을 때 보안대에 붙잡혀서 해주 가까운 바닷가 일본인 수용소에서 3년 가까이 노역 동원 등 갖은 고생을 하는 바람에 갓난 아들이 영양실조로 죽고 말았다. 그들의 고생을 보다 못한 한국인 의사가 감독관의 눈을 피해 목선(木船) 하나를 주선해 주어 몇 사람만 남쪽으로 와서 미군의 환대를 받으며 현해탄을 건너 귀국할 수 있었다. 가까스로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나이 많은 어머니가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계셨다. 다행히 정식 사범학교 출신 정교사 자격증이 있어서 평생을 초등교육계에서 봉직하였다. 사모님이 생전 처음으로 농사를 지어가며 열심히 동생들을 대학까지 보내고 다 출세시켰다. 자신들도 남매를 두었는데 아들은 신문기자로 이름을 날리고, 딸은 도쿄 도청에서 오래 근무하였는데 멋있는 부잣집 아들과 연애결혼을 하여 잘 살고 있다고 자랑하셨다.
마쓰오 선생은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 하셨고, 한국으로 말하면 시 교육장 같은 요직을 거쳤으며, 90이 넘은 요즘에도 여러 모임에서 고문으로 나오라고 한다고 하셨다. 사모님이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마쓰오 선생이 술도 좋아하고, 가사 일을 모르는 체 하지만, 참 열심히 일하여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남편 자랑을 사셨다. 택지 안에 있는 언덕 위 석비(石碑), 마쓰오가의 묘(松尾家之墓)를 가리키며 저 비석 속에 조상의 유골을 모시고 있는데 아들이나 오사카에 살고 있는 손자나 아무도 이 고향에 와서 집을 지킬 사람이 없다고 한탄을 하셨다. 그런 사정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 같은 실정인가 보다.
사모님 쓰네코 여사에게 친정이 어디시냐고 여쭈었더니 나카쓰 시의 중심가에 있는 메이지 시대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생가 가까이에 있었다고 하신다. 언니들은 타향으로 시집가고, 하나 있던 오빠가 군함의 기관장이었다가 미군의 포격으로 바다에서 전사해서 대가 끊겼다고 쓸쓸히 말씀하셨다. 집이 빈 채로 있었는데 가야부키(새로 이영한 집)라서 불이 나면 이웃에게 큰 피해가 날 것 같아 자진하여 집을 헐어버렸다고 하신다.
사모님은 “이렇게 나이가 많아도 전쟁반대 데모라도 나면, 머리띠를 두르고 데모에 참가하여 ‘전쟁 반대!’라고 크게 외친다”고 하셨다. 패전으로 인하여 이북 보안대에 붙들려 3년이나 갖은 고생을 한 것이며, 해군이었던 오빠가 전사하여 한이 뼈에 사무치셨나 보다. 정말 전쟁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VI. 사제간의 관광
다음날부터 그 근방의 명소를 선생님이 직접 택시를 전세 내어 안내해서 연 이틀 동안 구경할 수 있었다. 그 중 인상에 남는 몇 곳을 적어보자.
우리의 소학교 시절 책에도 나왔던 것 같은데, 기쿠치 칸(菊池寬)의 아오노도몽(靑의 洞門)을 찾아갔다. “원수의 피안”에 무대였던 바로 그 곳, 밑에는 깊은 강물이 흐르고 비탈진 바위길이라 특히 비 오는 날이나 한 겨울에는 그 곳을 걸어가다가 많은 사람들이 미끄러져 강물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에도(江戶) 시대 이 곳을 지나던 젠가이 이와쇼(禪海和尙)라는 스님이 뜻을 세워 30년의 세월이 걸려 끌 한 자루와 쇠망치 하나로 기어이 터널을 관통시켰다. 정말 감명 깊은 이야기이다. 그 스님의 동상 앞에서 마쓰오 선생은 합장 배례를 한다.
그 다음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생가. 문명주의의 횃불을 높이 치켜든 일본 근대화 민주주의의 선각자이며 쿄토의 명문 게이오(慶應) 대학의 창설자로서 일본 1만엔권 지폐에 그 얼굴이 그려져 있다. 바로 그의 옛 집터인데, 새로 이영한 가야부키(茅茸) 집이고 그 옆에 조그만 방이 어린 후쿠자와가 디딜방아를 찧으면서 한 손에 책을 들고 공부했다는 인형 모형이 세워져 있다. 그 아래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아니한다”는 어록이 새겨져 있었다.
나카쓰성을 지나 하치멘산(八面山)에 올랐다. 사방팔방에서 보아도 모양이 똑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정말 어느 쪽에서 보아도 똑같이 느껴진다. 온 산에 야마사쿠라(山攖)가 만개하여 산 정상까지 차로 오르내리는데 정말 환상적이었다. 벚꽃 구경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그 산 속에 평화공원이 있는데, 슬픈 유래가 깃들어 있었다. 1945년 8월 패전 직전 그 상공을 날아가는 B29 폭격기에 일본의 카미가제(神風) 전투기가 돌진하여 두 항공기가 모두 추락하여 전원 전사하였다고 한다. 전후 양국 정부가 조국을 위하여 전사한 두 나라 군인의 위령비를 세워 그들의 영을 위로했다고 한다.
3박 4일 여정의 마지막 만찬은 두 분을 모시고 외식을 하려고 했으나, 벌써 가장 넓은 방에다 케이터링회사에서 밴에 가득 싣고 온 음식으로 큰상을 차리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나라의 한정식 같은 일본식 정식인데, 가이세키료리(懷石料理)라고 한다. 선생님 설명으로는 이 요리는 결혼 피로연이나 수연(壽宴)에 나오는 음식으로 최하 13가지 이상이고 절대로 가짓수를 짝수로 차리지 않는다고 한다. 속으로 세어 보았더니 19가지나 되었다. 또 우리 식과는 다른 것이 남의 요리에는 손을 대지 않도록 각기 따로 따로 차린 것이었다. 선생님, 사모님, 나 이렇게 세 사람인데 그 많은 요리를 놓으니 겹쳐 놓은 것도 많았다. 정말 호화찬란하였지만, 미처 손도 대지 못한 것이 많았다.
내가 머물고 온 호텔은 나카쓰 오리엔탈 호텔이었다. 역에서 가깝고 여러 가지 시설이 좋았다. 내 방 옆에 방을 잡아 선생님도 묵으셨다. 내가 슬그머니 프런트에 내려가 호텔비를 지불하려고 했더니, 예약할 때 선불을 하셨다고 한다. 정말 미안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내가 선생님을 찾아간 보람이 있었던 일은 내가 부축을 해야 걸으실 수 있었는데 길에서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이렇게 설명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92세이고, 이 사람은 80세인데, 옛날 소학교 때 제자이고, 70년 만에 나를 만나러 일부러 미국에서 온 사람이다”라고 자랑을 하시는 것이었다.
VII. 에필로그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 두 달에 한 번 정도 편지가 오간다. 지난 11월 그곳에서는 전국 여자축구대회가 있었는데, 자청하여 홋카이도 팀의 선수 두 사람을 민박시키셨다고 한다. 현관에 아치 등 장식이 요란하고, 두 사람 이름이 크게 써 붙여져 있는 사진을 보내오셨다.
여러 날 숙식 대접을 하려니까 연로하신 사모님이 할 수가 없어서 도쿄에 있는 딸을 불러서 했다고 하신다. 동네 사람들까지 동원하여 열심히 응원하였는데, 그만 준결승전에서 지고 말았다며 이쉬워하셨다. 선생이 축구광이어서 70세까지 선수로 뛰었다고 하고, 자진하여 축구선수를 민박시켜 환영하고 응원하였는데 준결승전에서 졌으니 실망하여 밤에는 술을 많이 드셨을 것 같다.
이번 편지에는 이런 말씀이 적혀 있었다.
“명예욕, 성욕, 물질욕 등 모든 욕심은 버렸지만, 이런 건강이라도 이 땅에서 더 살고 싶은 장수욕은 살아갈수록 더 하다”고 하셨다. 당신 몸 가누기도 어려울 연세인데 아직도 민박 선수까지 받아서 요란스럽게 사시는 걸 보면 백세장수하실 것은 틀림이 없을 것 같다.
2008년 4월 70년 만에 일본 땅으로 그 옛날의 은사를 찾아뵌 것은 나에게 두고두고 잊지 못할 일이다.
* 출처 : 박섭용, “은사(恩師)를 찾아서”, 북악회지, 경복고등학교 동창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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