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북동부에 위치한 로드 아일런드주의 '뉴포트(New Port)' 하면 음악 애호가들은 해마다 여름철에 열리는 재즈 페스티벌을 연상하고, 스포츠 팬이라면 아메리카즈 컵 요트 경주를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뉴포트에 해군기지가 있었고 일본을 개국시킨 페리 제독이 그곳 출신이라는 것까지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뉴욕에서 몇 년 살다 가는 사람들은 뉴포트란 보스턴이나 케이프 코드에 관광차 다녀올 때 시간 나면 잠깐 들르는 곳 정도로 보통 인식하고 있다. 옛날 미국의 부자들이 살던 호화 저택(New Port Mansions)이 볼만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보스턴에 두 번 다녀올 때까지만 해도 뉴포트는 건너뛰었으나, 밴더빌트家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일부러 뉴포트를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산업혁명기의 거부 밴더빌트
밴더빌트는 산업혁명기 미국의 대표적인 부자이다. 맨해튼 파크 애브뉴를 가로막고 있는 그랜드 센트랄 역은 당시 밴더빌트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케 한다. 一代 코넬리우스 밴더빌트는 해운업과 철도사업으로 미국 굴지의 부를 이루었다.
코모도어(艦長)라는 별명으로 불리운 그가 16세(1810)에 처음 손댄 사업은 맨해튼과 스테이튼 아일런드를 잇는 나룻배 운행이었다. 이때 승객을 좀더 많이 실을 수 있도록 밑바닥 평평한 배를 띄운 것이 대성공이었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해운업에 투신하여 1849년의 골드 러시 후에는 뉴욕-샌프란시스코간의 화물 수송에도 나섰다. 그는 니카라과를 경유하는 지름길을 이용, 수송시간을 크게 단축함으로써 경쟁회사를 압도하고 그 여세를 몰아 철도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철도회사 주식을 사들이고 경쟁자들을 물리쳐 남북전쟁이 끝나고 서부개척이 본격화되었을 때(1873)에는 뉴욕-시카고 황금 철도노선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의 자손들은 밴더빌트 철도 왕국을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물려받은 부(富)를 유감없이 세상에 과시하였던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산업혁명이 절정에 이르러 부자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나던 황금의 시대(Gilded Age)였다. 갈브레이스 교수의 '돈'(Money)이라는 책에도 잘 묘사되어 있지만, 미국의 신흥 부자들은 유럽의 문화와 교양을 동경하여 유럽풍의 저택을 짓고 고전가구ㆍ조각을 통째로 사들이는가 하면 전통있는 귀족 가문과의 통혼(通婚)을 서둘렀다.
내가 밴더빌트에 주목하게 된 것도 경치 좋은 관광지마다 들어서 있는 이러한 호화 맨션 때문이었다. 위대한 개츠비의 무대인 롱 아이런드의 센터포트, 허드슨 강변의 하이드 파크에서도 으리으리한 밴더빌트 맨션을 구경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스모키 마운틴 부근의 애쉬빌에서도 밴더빌트 맨션과 마주쳤다. 더욱이 뉴포트에는 두 채나 된다는 것이었다. 東에 번쩍, 西에 번쩍하는 홍길동처럼 밴더빌트는 호화 맨션만 짓고 산 것 같았다.
1991년 5월의 메모리얼 데이 연휴를 이용하여 밴더빌트 맨션 탐사에 나서기로 했다. 18세기 해양 중심지였던 뉴포트는 경치와 기후가 좋은 데다 뉴욕에서 과히 멀지 않고 섬으로 주위와 격리되어 있어 부자들이 여름을 지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부자나 저명인사들은 뉴욕주의 롱 아일런드나 사라토가 또는 메인의 아카디아, 뉴 저지의 롱 브랜치 등지에 여름 별장을 갖고 있었는데 뉴포트는 '하계 휴양지의 여왕'이라 불리울 정도로 모든 면에서 단연 뛰어났다. 더욱이 그때 부자들은 엄청난 과시욕(誇示慾)이 있었으므로 다른 부자들하고 이웃하여 지내는 것이 도리어 마음 편할 터였다.
코모도어는 자식이 13명이나 되었지만 철도왕국의 통수권은 맏아들인 윌리엄 H. 밴더빌트에게 물려주고, 윌리엄은 죽을 때(1885) 어려서부터 사업수완을 보여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받았던 큰 아들(코넬리우스 밴더빌트 2세)과 둘째 아들(윌리엄 K. 밴더빌트)에게 경영권을 똑같이 나눠주었다. 두 형제는 뉴포트에 나란히 별장을 장만하였는데 당대 최고의 부자답게 서로 경쟁적으로 호화 맨션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형제도 예외는 아닌 것이 영농조림(營農造林)사업에 투신한 조지 W.밴더빌트는 노스 캐롤라이나주 애쉬빌의 빌트모어 영지에, 프레데릭 W. 밴더빌트는 뉴욕주 하이드 파크에 각각 맨션을 지었으며, 롱 아일런드의 맨션 '독수리 둥지'는 윌리엄 K. 밴더빌트 2세의 소유였다.
뉴포트의 밴더빌트 맨션
코넬리우스 밴더빌트 2세는 본디 점잖고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사치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뉴포트 별장이 화재로 소진되자 가업을 물려받은 장자로서 때마침(1892) 완공된 동생의 마블 하우스에 비해 처지지 않는 맨션 브레이커즈(Breakers)를 짓기로 한 것이다. 반면 윌리엄이나 그의 부인 앨바는 어느 유럽의 왕궁 못지 않은 맨션을 갖기를 원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정통 건축을 공부한 리차드 헌트에게 1888년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집'을 주문하였는데 그 산물이 바로 마블 하우스(Marble House)였다.
그당시 11백만불을 들여 지은 이 저택을 둘러보면, 유럽 각처에서 수입해온 형형색색의 대리석과 루이 14세식 실내 조각ㆍ장식들이 단연 압권이다. 그 으리으리한 규모는 한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한다. 이런 집을 부인에 대한 생일선물로 주었다니 당대 제일가는 부자로서의 풍모가 대단하였다.
브레이커즈, 마블 하우스 뿐만 아니라 로즈 클리프, 엘름즈, 샤토-쉬르-메르등 뉴포트의 다른 맨션들을 돌아보면 당시 미국의 내노라 하는 부자들이 유럽 문물에 얼마나 경도되었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족보상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루이 14세의 초상화가 중앙 홀에 걸려 있다. 밴더빌트 형제도 당시 풍조에 따라 경쟁하다시피 딸들을 유럽의 전통 있는 가문에 시집보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황금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이들 호화 맨션이 맞게된 운명이다. 브레이커즈에서는 코넬리우스가 심장마비를 일으킨 후 회사경영을 동생에게 넘겨주고 이곳에서 정양을 하다가 죽었다(1899). 그 부인은 1934년까지 살았는데 딸(라슬로 셰케니 백작부인)에게 이 맨션을 물려주었다.
마블 하우스에서는 앨바 부인이 딸의 정략결혼을 치른지 1년만에 돌연 윌리엄과 이혼하고(1896)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여권신장론자로 변신하였다(결국 그 딸도 20여년후 말보로 공과의 결혼생활을 청산하였다). 이만한 집을 갖고 있으니 구차하게 결혼생활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는지 모른다. 밴더빌트로서는 호화 저택에서 호강도 못해보고 마누라 잃고 집 뺏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 마블 하우스에서 살면서 앨바는 대서양이 바라보이는 정원 한쪽에 중국풍의 티 하우스(찻집)를 짓고(1914) 여권(女權, Feminist) 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죽기 1년 전(1932) 말많던 이 집을 보스턴의 부자한테 팔아버렸다.
그런데 뉴포트 시민들이 1945년 자발적으로 맨션 보존협회(Preservation Society)[1]를 만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브레이커즈등 유서깊은 뉴포트 맨션을 물려받은 상속인들이 자진하여 이들 맨션을 보존협회에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무거운 재산세, 상속세 탓도 있었겠지만 공공의 이익과 시민정신을 앞세운 보존협회의 노력이 크게 어필했기 때문이었다. 부자들도 이기적인 부(富)의 과시보다 이웃 시민들로부터의 존경과 칭송을 기꺼이 선택했음이리라. 일부 저택과 동산은 보존협회에서 은행대출을 받아 사들이기도 했다. 당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덕분에 전국 명승지마다 높은 담 속에 갇혀 있던 맨션들이 공익단체에 기부되어 일반인들도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미국에는 백만장자, 억만장자가 수없이 많지만 그네들의 행동거지가 우리나라 졸부(猝富)들처럼 표나게 드러나지는 않는 것 같다. 1991년 3월 10억 달러 이상을 호가하는 미술품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한 아넨버그의 예처럼 그들의 재산이 어떠한 형태로든 사회에 환원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도 큰 부자를 질시하지 않는다. 또한 2차 대전 후부터 미국의 자본주의에는 일종의 사회적 책임이 부과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은행경영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으며, 예컨대 지역재투자법(地域再投資法, CRA)에 의하면 어느 은행점포의 영업구역에서 예금으로 끌어들인 자금의 일부는 그 지역 주민들에 대한 대출등으로 다시 투자하게끔 되어 있다.
코모도어 밴더빌트는 그의 생전에 이러한 결말을 내다본 것 같다. 그는 테네시주 내쉬빌에 있는 대학교에 백만불을 기증하였는데, 그랜드 센트랄 철도는 오래전에 주인이 바뀌었어도 그 학교는 여전히 밴더빌트의 이름을 간직한 채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영재(英材)를 배출[2]하고 있는 것이다.
Note
1] 뉴포트 카운티의 뉴포트맨션 보존협회는 비영리단체로서 18-19세기 부자들의 기호(嗜好)와 건축양식, 실내장식 스타일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8채의 맨션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이들 맨션을 모두 구경하자면 하루로는 부족하다. 자원봉사자들의 안내를 받아 맨션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데 최소한 두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안전수칙상 개별행동은 허용되지 않으며 실내에서는 사진, 비디오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 이글은 필자가 한국산업은행 뉴욕 주재원 근무를 마친 후 1995. 1. 社報에 기고한 것으로 30년이 지났어도 방문 당시의 소감을 전달하기 위해 내용은 일체 손대지 않았다.
2] 코넬리우스 '코모도어' 밴더빌트는 남북전쟁으로 인한 상흔을 속히 치료하는 길은 영재를 키우는 것이라 믿고 대학교 설립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사촌동서인 남감리교 홀랜드 맥타이어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1873년 테네시주 내슈빌에 설립된 센트랄 대학교에 1백만불을 기증하였고 1877년에는 교명도 밴더빌트 대학교(Vanderbilt University)로 바뀌었다. 밴더빌트大는 당초 감리교 지도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운영되다가 1914년부터는 종교색을 지우고 여성을 포함한 미국과 세계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명문 사립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엘고어 미국 부통령도 이 학교 출신이며, 우리나라에서도 미국 AID 장학금으로 많은 공무원들이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아웅산 사건 때 순직한 서석준 경제부총리를 비롯해 정원식 총리, 권혁세 금융감독원장, 유명환 통상교섭본부장 등 유명인사 졸업생이 많다.
3] 위의 주 1] 말미에 적은 것처럼 이 글은 산은사보에 실렸던 것을 필자의 경희대학교 홈페이지에 올려 놓았다가 2022년 여름 Tistory 블로그에 옮긴 것이다. 2022.11. 9 서초구 시민의숲 걷기 문화행사에 참가하고 나서 오래 전 자원봉사자의 안내를 받아 구경하였던 미국의 뉴포트 맨션이 떠올라 업데이트하였다.
그러다보니 11월 11일 11시 11분 11초에 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빼빼로' 과자나 중국 광군제와는 전혀 무관하고, 매년 10월 24일을 서로 잘못을 사과하는 '사과 데이(Apple Day)'로 일컫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런데 뉴스를 보니 매년 11월 11일 11시 부산에서는 'Turn Toward Busan'이라는 유엔군 참전용사 국제추모식이 열린다고 한다. 1차대전 전승기념일이자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국가의 현충일(Remembrance Day)인 이날 11시가 되면 유엔 참전장병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려 그들의 묘지가 있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향해 1분간 묵념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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