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은 둘이 하나가 되어 가정을 이룬다는 '부부의 날' 이다.
KBS 클래식 FM 〈세계의 모든 음악〉시간에 슈만과 클라라 부부의 공동일기(Marriage Diaries)가 화제에 올랐다. 그리고 스승이자 예비 장인인 비크 교수와의 소송전 끝에 결혼식을 올리게 된 슈만이 그 전날 클라라에게 선물한 가곡집(Myrthen, 대표곡은 '헌정') 속의 한 곡 '호두나무'(Der Nussbaum, Op.25-3)을 들려주었다. 게다가 5월 20일은 클라라 슈만의 기일이었다.
사실 연인으로부터 "그대는 나의 영혼, 나의 마음"이라고 하는 '헌정'(Widmung, Op.25-1, 뤼케르트 작시)을 듣고서 감동하지 않는 여인이 어디 있을까![1]
슈만 부부의 공동일기와 예술과 현실의 갭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과 클라라 비크(Clara Wieck, 1819-1896)은 1840년 9월 12일 결혼했고 그 다음 날부터 두 사람은 부부 공동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슈만이 일기장을 선물하며 먼저 제안한 이 공동일기는 대략 일주일에 한 번씩 번갈아 기록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 교수의 거센 반대를 극복하고 법원의 판결까지 받아 힘겹게 이룬 결혼이었으니 이 소중한 결혼을 잘 지키고 싶다는 소망이 담긴 일기였다.[2]
이 일기에는 부부가 함께 지켜야 할 삶의 원칙으로 근면, 절약, 충실함이 기록되어 있었다. 서로를 예술적 동반자로 대한 이 두 음악가의 기록으로도, 슈만의 불안과 우울에 관한 기록으로도 무척 의미 있는 일기가 되었다. 슈만과 클라라의 부부 일기가 가진 진짜 매력은 이상적인 결혼의 풍경만 담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그들이 결혼할 당시엔 슈만보다 클라라가 훨씬 더 유명했는데 일기에는 그에 따른 갈등도 적혀 있다. 또한 경제적 압박과 육아의 고단함 같은 현실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클라라는 이미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이었지만 남편인 슈만이 작곡에 몰입해 있을 때는 그녀가 피아노 앞을 떠나 육아와 살림을 감당해야 했다. 결혼과 출산 후에 마음껏 음악 활동을 할 수 없는 현실에 괴로워했던 클라라의 모습은 여러 장면에 기록되어 있다.
후대의 연구자들이 이 얘기를 중요하게 보는 이유도 19세기 여성 예술가가 감당해야 했던 현실이 매우 생생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3] 두 예술가의 자서전과도 같았다. 이 부부 일기는 낭만주의 시대 음악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사랑과 일상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모두 기록한 이 일기에는 약간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슈만과 클라라가 서로의 예술을 깊이 존중했다는 점이다.
결혼식날 건네준 이 일기장은 슈만의 결혼 선물이었다. 진짜 결혼 선물은 결혼식 전날 클라라에게 바친 가곡집 〈미르테의 꽃〉 (Myrthen)이었다. 괴테, 리케르트, 모젠, 하이네 같은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인 아름다운 예술가곡들으로 '헌정'을 비롯하여 지금도 널리 사랑받고 있다.

클라라의 관점에서 본 결혼생활
예술가들 중에서 반려자를 '뮤즈'로 여기고 주옥 같은 명작을 남긴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이 블로그에서 소개한 음악가로는 독일의 슈만과 클라라, 영국의 에드워드 엘가, 러시아의 라흐마니노프가 있고, 화가 중에는 스웨덴의 칼 라르손, 스위스의 세간티니, 러시아/프랑스의 샤갈과 벨라 등이 있다.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슈만과 클라라의 결혼은 음악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명곡과 더불어 8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다. 슈만 부부가 발굴하여 세상에 알린 브람스가 불행에 처한 클라라를 물심 양면으로 도왔고, 클라라가 연주 여행을 떠날 때에는 브람스가 슈만의 자녀를 돌봐주기도 했다. 그러나 브람스의 순애보적인 사랑으로 끝이 났다. 그래서 그 궁금한 뒷이야기를 클라라 슈만에 대한 인터뷰 형식으로 알아보았다. 이를 위해 Wikipedia 등 여러 자료와 함께 Gemini에 문의하여 정리[3]하였음을 밝혀둔다.
Q 로베르트 슈만을 처음 만난 때가 언제였죠?
A 제가 11살이던 1830년 로베르트가 아버지 비크(Friedrich Wieck) 교수님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집에 왔을 때였어요. 우리집에 하숙을 하였는데 저는 2년 전에 이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다음이었기에 9살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그가 저를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로베르트는 손을 다쳐 피아노 연주를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아버지의 훈련 덕분에 대부분의 악보를 외워서 치는 '피아노의 신동'으로 소문나 있었거든요.
Q 그럼 로베르트가 자기의 습작곡을 피아노로 쳐보라 하고 의견을 묻기도 했겠군요.
A 그럼요. 제 나름대로 그의 복잡하고 내성적인 내면을 피아노로 표현했는데, 저를 보고 자기 음악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하고 연주해 주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했어요. 그때부터 서로의 작품을 비평하고 영감을 주고받으며 영혼의 동반자로 발전했다고나 할까요?
Q 아버지 비크 교수가 두 분의 결혼을 결사반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어요?
A 아버지는 매우 가부장적이고 완고하신 분이었어요. 라이프치히에서 유명한 음악교사로서 저 또한 아버지의 엄격한 통제하에 피아노 연습을 하고 연주여행을 다녀야 했습니다. 제가 로베르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결혼하고자 했을 때 완강히 반대를 하셨어요.
그때는 아버지가 너무 야속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고 저 역시 딸을 둔 어머니의 입장이 돼보니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그점에서 죄송스러운 마음도 들고요. 아버지가 반대하신 이유는, 첫째 슈만이 손가락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하고 신생 잡지(Neue Zeitschrift für Musik)를 발행하는 평론가이자 무명 작곡가에 불과하여 수입이 지극히 불안정했기 때문입니다. 슈만이 피아니스트로 대성할 수 있는 자기 딸을 부양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셨던 거예요.
두 번째로는 슈만이 라이프치히 대학교 다닐 때 술 담배를 많이 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고 눈살을 찌뿌리셨어요. 법정에서는 슈만이 '알코올 중독자이고 게으름뱅이'라고 비난을 하셨지요. 또 그의 집안에 정신질환 내력[4]이 있다는 점을 크게 우려하셨어요.
아버지의 예언은 결국 비극적인 현실이 되고 말았어요.
Q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A 슈만의 정신질환은 나이가 들수록 악화되었습니다. 작곡에 대한 압박감과 환청에 시달리던 그 이는 1854년 라인강에 투신 시도를 하였고, 구조된 이후 스스로 엔데니히(Endenich) 정신병원에 입원했어요. 저는 그 이의 발작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야 했고, 남편이 입원한 뒤에는 가계를 책임지기 위해 만삭의 몸으로 다시 유럽 전역으로 연주 여행을 다녀야 했습니다 . 그 이는 입원한 지 2년 만인 1845년, 쓸쓸히 생을 마감했어요.

슈만의 결혼 생활과 심리적 중압감
슈만은 그 자신도 천재적인 음악가였으나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클라라 앞에서는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둥 자존감이 떨어졌다. 슈만이 '숭배하는 뮤즈를 얻은 기쁨'에서 시작해 '압도적인 아내의 그늘에 가려진 남편의 열등감과 죄책감'으로 침전해가는 과정을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1. 결혼 1~3년 차 (1840~1843): '가장(家長)'이라는 무게와 현실적 충돌
결혼 초기 슈만은 마침내 사랑을 쟁취했다는 환희에 가득 차 있었지만, 곧 자신이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클라라의 커리어를 가로막고 있다는 죄책감에 직면하게 되었다.
슈만은 극도로 예민하고 고독한 상태에서 작곡에 몰두하는 스타일이었으나, 클라라는 매일 몇 시간씩 피아노 연습을 해야 하는 연주자였다. 얇은 벽을 사이에 둔 신혼집에서 클라라의 완벽한 피아노 타건 소리는 슈만에게 큰 스트레스였고, 결국 클라라가 연습을 양보하게 되었다. 슈만은 자신 때문에 아내의 천재성이 녹슬고 있다는 자책감을 일기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1842년 클라라의 북독일 연주 여행에 동행했을 때, 대중과 귀족들은 클라라에게만 환호했고 슈만은 그저 '음악 평론을 하는 독특한 남편' 정도로 취급받았다. 가부장적 성향이 강했던 19세기 독일 사회에서, 아내보다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낮다는 사실은 슈만의 자존감에 첫 번째 큰 균열을 냈다.
2. 결혼 4~7년 차 (1844~1847): 드레스덴 시절, 깊어지는 고립과 열등감
1844년 슈만 부부는 환경을 바꾸어 드레스덴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슈만의 정신적·육체적 건강이 본격적으로 무너지며 자괴감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그해 5개월간의 러시아 연주 여행은 클라라에게는 엄청난 명성과 막대한 수입을 안겨주었으나, 슈만에게는 지옥 같았다. 한 연회에서 현지 귀족이 클라라에게 찬사를 보낸 후, 옆에 있던 슈만에게 "아, 당신도 음악을 하십니까? 무슨 악기를 연주하나요?"라고 물은 일화는 유명하다. 슈만은 심각한 우울증과 이명 현상을 겪고 자신이 클라라의 짐이자 '덤으로 딸려 온 존재'라는 깊은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슈만은 교향곡 1번, 2번과 피아노 협주곡 등을 발표하며 작곡가로서 입지를 다지려 애썼지만, 당대 대중의 반응은 클라라의 연주회만큼 즉각적이거나 열광적이지 않았다. 슈만은 자신이 클라라가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헌신에 보답하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이라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3. 결혼 10년 차 이후 (1850~1854): 뒤셀도르프 시절, "당신을 해칠까 두렵다"
1850년, 슈만은 뒤셀도르프의 시립 음악감독으로 초빙되어 마침내 '한 가정의 떳떳한 가장'으로서 사회적 지위를 얻는 듯했다. 그러나 이 자리가 도리어 그의 파멸을 앞당겼다.
슈만은 내성적이고 소통에 서툴러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다. 지휘 도중 멍하게 서 있거나 박자를 놓치는 일이 잦아지자, 단원들은 슈만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클라라가 리허설을 돕고 남편의 실수를 수습해야 했다. 가장으로서 당당해지고 싶었던 공간에서조차 아내의 능력에 의존해야 했던 슈만의 자존감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1853년부터 슈만은 천사나 악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심각한 환청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이 미쳐가고 있음을 자각했고, 이 과정에서 클라라에게 포악한 태도를 보이거나 차갑게 밀어내는 등 태도가 돌변했다. 이는 클라라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내 안의 악마가 언제 당신과 아이들을 해칠지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와 죄책감 때문이었다.
1854년 2월, 라인강에 투신했다가 구조된 슈만은 클라라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정신병원 입원을 선택하며 그들의 결혼 생활을 스스로 단절시킬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클라라의 마음가짐이나 태도의 변화
유명 피아니스트인 클라라가 자질은 뛰어나지만 성격적ㆍ기질적으로 결함이 많은 남편과 살면서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감정의 기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클라라가 남편을 대하는 마음은 '경외하는 예술적 천재를 향한 무조건적인 헌신'과 '가정과 남편을 홀로 지탱해야 했던 생활인으로서의 처절한 책임감'이 교차하는 고달픈 여정이었다.
1. 결혼 전 ( ~1840): "내 아버지를 거역하더라도 당신의 천재성을 지키겠어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비크 교수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 '온실 속의 천재'로 자란 클라라에게 슈만은 단순한 연인이 아니라 예술적 해방구였다.
클라라는 슈만의 작곡 능력을 자신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천재성으로 보았다. 아버지가 슈만의 무능함과 성격적 결함을 비난할 때도, 클라라는 슈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의 천재성에 비하면 내 연주 능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며 그를 격려했다.
결국 아버지를 상대로 법정 소송까지 벌인 것은, 당시 19세기 여성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주체적 결단이었다. 그녀는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서 누리던 부와 명예를 모두 잃을 위험을 감수하고 슈만을 선택했던 것이다.
2. 신혼 초 (1840~1843): "나의 연주보다 당신의 작곡이 훨씬 중요합니다"
결혼 후 클라라는 '유럽의 스타 피아니스트'에서 '한 가정의 아내'라는 낯선 역할로 전환하며 심리적 위축을 겪었지만, 철저히 슈만 중심으로 자신을 맞추었다.
부부 공동 일기에는 클라라의 애달픈 양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슈만이 고독 속에서 작곡해야 할 때, 클라라는 자신의 피아노 연습을 전면 중단했다. 그녀는 일기에 "로베르트가 작곡 중일 때 내가 연습하면 그의 악상이 깨진다. 내 연주 능력이 퇴보하는 것 같아 슬프지만, 그의 위대한 작품을 위해서라면 견딜 수 있다"고 적었다.
슈만이 자신과 동행한 연주 여행에서 '아내의 덤' 취급을 받으며 상처받을 때, 클라라는 남편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무대 위에서 슈만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연주하며 그를 '위대한 작곡가'로 대중에게 각인시키려 애썼다.
3. 육아 전념 및 생활고 기간 (1844~1853): "내가 무대에 서야 우리 가족이 삽니다"
결혼 생활 동안 클라라는 14년간 무려 8명의 아이를 출산했다. 이 시기 슈만의 정신질환이 본격화되면서 클라라의 태도는 '순종적인 아내'에서 '강인한 가계의 책임자이자 보호자'로 진화했다.
슈만이 정신적 쇠약으로 뒤셀도르프 시립 음악감독직에서 해임될 위기에 처하고 작곡 수입도 불분명해지자, 클라라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다시 무대로 나섰다. 그녀는 남편을 원망하는 대신, "내가 연주를 해서 돈을 벌어야 로베르트가 돈 걱정 없이 고귀한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슈만이 지휘를 망치고 단원들에게 조롱당할 때, 클라라는 리허설장에 상주하며 단원들을 매섭게 통제하고 남편을 대변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남편을 '기댈 수 있는 가장'이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아픈 예술가'로 대하기 시작했다.
4. 슈만 입원 기간 (1854~1856): "당신의 무참한 모습을 세상에 보이지 않겠어요"
1854년 슈만이 라인강에 투신한 후 엔데니히 정신병원에 격리되었을 때, 클라라의 태도는 현대의 관점에서는 다소 냉정해 보일 만큼 단호한 '격리'를 유지했다. 그것은 클라라로서 고독한 결단을 내린 후의 결론이었다.
클라라는 슈만이 입원한 2년 동안 단 한 번, 그가 사망하기 이틀 전에만 면회를 갔다. 면회가 환자의 정신 발작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의사들의 권고도 있었지만, 클라라는 '위대한 천재 작곡가 슈만'의 품위가 정신병으로 무참히 무너진 모습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고, 세상에도 감추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나 클라라는 슬픔에 침잠하는 대신 헌신적인 젊은 음악가 브람스와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의 도움을 받아, 남편이 남긴 악보들을 정리하고 그의 음악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 매진했다. 그것이 병상에 누운 남편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5. 슈만 사후 (1856~1896): "나는 평생 로베르트의 음악적 미망인으로 살 것입니다"
슈만이 46세의 나이로 쓸쓸히 사망한 후, 클라라는 7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간 오직 검은 상복만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당대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복귀하여 수많은 연주회를 가졌는데, 레퍼토리의 중심에는 늘 슈만의 곡이 있었다. 브람스의 깊은 연모를 받으면서도 끝내 일정한 선을 넘지 않았던 이유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언제나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이자 그의 예술을 전파하는 사제 (Priestess)'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말년에 그녀는 슈만의 모든 작품을 집대성한 《로베르트 슈만 전집(Robert Schumanns Werke)》을 직접 편집·출판했다. 그녀는 남편을 정신병으로 파멸한 비극적 인간이 아니라, 인류 음악사에 영원히 남을 위대한 거장으로 완성해 놓고 눈을 감았다.
슈만 부부의 자녀에 대한 리거시
슈만과 클라라 부부는 14년 동안 총 8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부모로부터 음악적 재능을 이어받아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공한 자녀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자녀는 당대 최고의 스타 연주자였던 어머니 클라라의 그늘에 가려, 그리고 아버지의 유전적 정신질환과 기질적 취약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1. 음악가의 길을 걸었으나 빛을 보지 못한 자녀들
어머니 클라라는 자녀들에게 음악을 가르쳤으나, 자신과 남편의 수준이 너무나 높았기에 자녀들의 재능에 엄격했고 때로는 냉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슈만 자녀들의 사진 맨 왼쪽부터 루드비히, 마리, 펠릭스, 엘리즈, 페르디난트, 유제니)
* 첫째 딸 마리(Marie, 1841~1929)는 음악가로 독립하기보다, 평생 어머니 클라라의 개인 비서이자 매니저, 그리고 동생들을 돌보는 '제2의 어머니'로 헌신했다. 말년에 피아노 교사로 활동하며 슈만 부부의 유산을 지키는 데 기여했다.
* 둘째 딸 엘리제(Elise, 1843~1928)는 피아니스트로 잠시 활동하며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으나, 어머니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결혼 후 평범한 삶을 살았다.
* 여섯째 아들 페르디난트(Ferdinand, 1849~1891)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여 작곡가가 되기를 희망했고 슈만도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군 복무 중 심각한 척추 부상을 입고 극심한 통증을 잊기 위해 모르핀 중독자가 되었다. 결국 42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 일곱째 딸 유제니(Eugenie, 1851~1938)는 어머니 클라라에게 피아노 교육을 받았고 피아니스트로서 클라라의 후광을 입기도 했다. 영국에서 피아노 교사로 일하다가 1918년 큰언니 마리와 같이 살기 위해 스위스로 이주하였다. 말년에는 슈만 가족의 이야기를 회고록 형태로 펴내 주목을 받았다.
2. 유전적 정신질환을 앓은 자녀들
슈만 집안의 비극적인 정신질환 내력은 자녀들 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발현되었다.
* 셋째 아들 율리우스(Julius, 1845~1872)는 어려서부터 매우 병약하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다. 정신적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이탈리아 등지로 요양을 떠났으나, 결핵과 심한 신경쇠약이 겹쳐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 넷째 에밀(Emil, 1846~1847)은 생후 1년 만에 뇌 질환(정신·신경계통의 문제로 추정)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 다섯째 아들 루트비히(Ludwig, 1848~1899)는 자녀들 중 아버지 슈만의 조현병 및 망상 장애 증세를 똑같이 앓았다. 20대 초반부터 심각한 감정 기복, 대인기피,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피해망상과 환청에 시달렸다. 피아노와 책 제본 기술을 배우려 했으나 정신적 발작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결국 클라라는 루트비히의 폭력성과 발작이 다른 아이들에게 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1870년 그를 콜디츠(Colditz)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루트비히는 그곳에서 무려 29년 동안 격리되어 살다가 1899년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 클라라는 살아생전 루트비히의 병원비는 꼬박꼬박 냈으나, 남편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면회는 거의 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 막내 아들 펠릭스(Felix, 1854~1879)는 슈만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태어난 유복자였다. 슈만이 가장 아꼈던 브람스를 대부(Godfather)로 삼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가장 다재다능했다. 바이올리니스트와 시인으로 활동하여 브람스는 펠릭스가 쓴 시에 곡을 붙여 가곡(Lieder)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러나 펠릭스 역시 신경쇠약과 정서적 취약성을 앓았고, 설상가상으로 폐결핵까지 걸려 예술적 꽃을 피우기도 전인 24세에 요절했다.

예술사상 가장 고결하면서도 미스테리한 로맨스
클라라 슈만과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의 사랑은 슈만의 입원과 사후에 절정에 달했다.
14세 연하였던 청년 브람스는 슈만이 정신병원에 갇혀 절망에 빠진 클라라와 그녀의 자녀들을 위해 집안 살림을 도맡고, 아이들의 대부 역할을 자처하며 경제적·정서적으로 헌신했다. 그리고 슈만 사후 브람스는 열렬한 구애를 보냈지만, 클라라는 끝내 거절하고 평생 '예술적 동반자'의 선을 유지했다.[5]
실제로 두 사람은 평생 매일같이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1896년 클라라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브람스는 큰 충격을 받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이듬해인 1897년 그녀의 뒤를 따르듯 숨을 거두었다.
1. 클라라가 직접 밝힌 솔직한 심정: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머니, 그리고 예술적 뮤즈"
클라라는 브람스를 깊이 사랑하고 의지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한 사랑의 형태는 브람스가 원한 '남녀 간의 결합'과는 궤를 달리했다.
클라라는 1856년 슈만이 사망한 후, 아이들이 장성하자 맏딸 마리(Marie)를 비롯한 자녀들에게 브람스와의 관계를 솔저히 고백하는 편지를 남겼다.
"너희는 요하네스를 삼촌처럼 생각하겠지만, 그는 내게 그 이상이란다. 아버지가 병원에 계실 때 내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그는 내 슬픔을 나누어 짊어지며 내 마음을 붙잡아 준 유일한 사람이었단다. 그의 사랑은 내 영혼을 살린 신의 선물이었어.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세상이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술과 영혼으로 묶인 가장 순결한 관계란다." —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클라라는 브람스가 남편의 자리를 대체하는 순간 브람스의 창작 세계가 무너질 것을 염려했다. 그녀는 브람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요하네스, 당신은 아직 젊고 위대한 음악을 세상에 내놓아야 할 예술가입니다. 나처럼 나이 많고 8명의 아이가 딸린 미망인의 남편이 되는 순간, 당신의 자유로운 영혼과 예술적 커리어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버릴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아내가 되기보다, 당신의 음악을 평생 수호하는 뮤즈로 남고 싶습니다."
2. 정황상 짐작할 수 있는 세 가지 결정적 사정
역사학자들과 음악학자들은 두 사람의 편지와 당시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클라라가 구애를 뿌리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①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라는 정체성과 사회적 평판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적 기준에서, 당대 최고의 천재 작곡가였던 남편이 정신병원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는데, 그 남편이 발굴해 낸 14세 연하의 제자와 곧바로 재혼하는 것은 클라라의 사회적·음악적 생명을 끝장내는 스캔들이 될 수 있었다. 클라라는 평생 '슈만의 위대한 미망인'이라는 왕관을 쓰고 그의 음악을 전파하는 사제로서 살아가기로 결심했고, 그 왕관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다.
② 브람스의 심리적 후퇴와 '자유'에 대한 갈망
실제로 슈만이 사망한 직후인 1856년 가을, 두 사람은 스위스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많은 학자들은 이때 두 사람이 결혼이나 관계 정립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막상 슈만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사라지자, 브람스 스스로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된다는 중압감과 결혼이라는 제도적 구속에 두려움을 느끼고 한 발짝 물러선 정황이 발견된다. 브람스는 평소 "독신이야말로 예술가에게 자유를 준다"고 말했다. 클라라는 브람스의 이러한 심리적 망설임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예민하게 간파했고, 그가 도망치기 전에 먼저 고결한 동반자의 관계로 선을 그어 그를 지켜주었던 것이다.
③ 현실적인 나이 차이와 육아의 무게
결혼 생활을 마감할 당시 클라라는 37세의 지친 미망인이었고, 8명의 자녀(그중 몇 명은 병약하거나 정신질환 조짐이 있었음)를 홀로 부양해야 했다. 반면 브람스는 이제 막 날개를 펼치려는 23세의 청년이었다. 클라라는 자신의 가정이 가진 비극의 무게를 브람스에게 지우는 것은 그를 파멸시키는 길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Note
1] 리스트가 편곡한 슈만의 "헌정"은 손열음의 연주로 감상할 수 있다. 여기에는 뤼케르트의 독일어 원시가 영어, 한글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2] KBS 클래식 FM 〈세계의 모든 음악〉2026.5.21 [43:25] 방송 참조.
3] Gemini를 통해 슈만과 클라라 부부에 대한 연구의 폭과 깊이가 상당함을 알 수 있었다.
* 《The Marriage Diaries of Robert and Clara Schumann》 (ed. Gerd Nauhaus) : 신혼 초 클라라가 남편의 작곡을 위해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억누르며 느꼈던 심리적 갈등과, 그럼에도 남편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자 했던 일기 등의 기록
* 《Letters of Clara Schumann and Johannes Brahms, 1853-1896》 (ed. Berthold Litzmann) : 슈만의 입원 기간과 사후, 클라라가 브람스에게 털어놓았던 가슴 아픈 심정, 남편의 정신 질환을 바라보는 공포와 연민, 그리고 슈만 사후 그의 음악적 유산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서한들을 수록
* Nancy B. Reich, 《Clara Schumann: The Artist and the Woman》 (Cornell University Press) : 클라라가 '출산과 육아'라는 엄청난 육체적 부담 속에서도 어떻게 가계를 책임지고 남편의 음악적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는지 클라라의 주체적 관점에서 완벽하게 복원
* Beatrix Borchard, 《Clara Schumann: Ihr Leben》 (Ullstein) : 독일의 저명한 음악학자가 쓴 평전으로, 슈만 사후 클라라가 왜 평생 검은 옷을 입고 '슈만 음악의 전도사'로 살았는지, 그녀의 말년 행보와 남편의 전집 편찬 과정을 철저한 사료 검증을 통해 분석
* Joan Chissell, 《Clara Schumann: A Dedicated Spirit》 (Hamish Hamilton) : 클라라가 겪었던 심리적 변화를 연대기 순으로 추적하며, 특히 슈만의 엔데니히 정신병원 입원 기간 동안 그녀가 취했던 태도와 내면의 고통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연구서
4] 실제로 슈만의 아버지는 신경쇠약으로 고통받다 일찍 사망했고, 누나 에밀리는 사춘기 시절 심각한 우울증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슈만 자신도 20대 초반부터 극심한 감정 기복, 환청,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증을 겪고 있었다. 현대 의학자들은 슈만이 '조울증' 또는 '조현병'을 앓았던 것으로 분석한다.
* Peter Ostwald, 《Schumann: The Inner Voices of a Musical Genius》 (Northeastern University Press) :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슈만 가문의 '유전적 정신질환 가계도'를 분석한 책으로, 로베르트 슈만의 누나(자살), 슈만 자신(정신병 투병)에 이어 아들 루트비히에게 어떻게 그 정신적 결함이 고스란히 유전되었는지 의학적으로 조명하였다.
5] 클라라와 브람스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고결한 러브스토리는, Gemini에 의하면 두 사람이 주고받은 방대한 편지 분석을 통해 완벽히 검증되었다고 한다.
* 《Letters of Clara Schumann and Johannes Brahms, 1853-1896》 (ed. Berthold Litzmann) : 두 사람이 평생 주고받은 편지를 집대성한 가장 핵심적인 사료이며, 특히 슈만 사후인 1856~1858년 사이 두 사람의 감정이 격정적인 연인에서 고결한 음악적 동반자로 정착해가는 심리적 밀당과 고백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Clara Schumann: Ein Künstlerleben. Nach Tagebüchern und Briefen》 (Berthold Litzmann) : 클라라의 사후 그녀의 자녀들의 협조를 얻어 일기와 편지를 바탕으로 쓰인 최초의 공식 평전. 클라라가 자녀들에게 브람스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남긴 편지 원문이 이 책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었다.
* Nancy B. Reich, 《Clara Schumann: The Artist and the Woman》 (Cornell University Press) : 클라라가 브람스의 구애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19세기 독일 사회의 가부장적 모순, 경제적 독립성 문제, 그리고 '슈만의 미망인'이라는 정체성이 그녀의 음악 커리어에 가졌던 의미를 날카로운 역사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 Jan Swafford, 《Johannes Brahms: A Biography》 (Vintage Books) : 브람스 평전의 대작으로 평가받는 이 책은, 슈만 사후 브람스가 느꼈던 죄책감과 자유에 대한 갈망, 그리고 스위스 여행 직후 브람스가 심리적으로 후퇴했던 정황을 브람스의 시각에서 밀도 있게 추적했다.
* Styra Avins, 《Brahms Life and Letters》 (Oxford University Press) : 브람스의 서한들을 바탕으로 그의 인간적 면모를 밝힌 책. 브람스가 클라라라는 위대한 여성을 향해 가졌던 경외감과, 남녀 간의 결합을 포기한 이후에도 어떻게 평생 그녀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했는지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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