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자 황동규(黃東奎, 1938~ ) 교수가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 쓴 시 몇 편을 소개하다가 그가 약관의 나이에 미당 서정주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조숙한 고등학생이 여대생을 짝사랑하면서 쓴 산문시를 미당 선생이 보고서 현대문학 1958년 11월호에 다음과 같은 평과 함께 추천하였다. (그 시는 서울고등학교 교지에 기고한 글로 밝혀졌고, 소설가 황순원 씨의 장남인 시인은 서울대 영문학과에 입학하였음)
"지성을 서구적 기질에 의해 흉내 낼 줄밖에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 속에서 귀하고 중요한 지성의 움직임을 발견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등단한 작가로는 최인호(崔仁浩, 1945~2013)도 있다. 그는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데뷔한 바 있다. 그는 4년 후 대학 재학 시절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다시 한 번 화제가 되었다.
지금은 나이로 사람을 평가하다간 '꼰대' 소리를 듣기 십상이지만 1950-60년대만 해도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유교 전통이 살아 있었다. 19세의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이 쓴 '불놀이'를 읽고 크게 감탄했던 나로서도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를 읽을 때 화자(話者)의 나이부터 가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사변적(思辨的)인 시에 '즐거운 편지'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곰곰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즐거운 편지 -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첫 연에서 연상의 여인을 흠모하는 화자는 자기라는 존재가 사소한 배경에 불과하리라는 것을 자인한다.
둘째 연에서는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한없는 기다림을 통해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가노라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눈이 퍼붓다가 그치고 그 자리에서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는 계절의 순행을 의식의 흐름으로 바꿔놓은 게 돋보였다. 이런 식으로 표현한 젊은 지성을 우리도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다소 짖궂은 생각이 들었다.
이 시의 맥락을 인공지능(AI)이 얼마나 이해하고 어떻게 이미지로 표현할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Gemini에게 이 시를 읽어본 다음 Nano Banana로 그 인상(印象)을 표현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두 컷의 이미지를 그려주었다 (머리 스타일이나 옷차림에 대해서는 몇 차례 수정이 있었음).
Joyful Letter
by Hwang Dong-gyu
1
My thoughts of you are always trivial things,
like the sun setting and the wind blowing
against the backdrop where you sit.
But someday, when you wander endlessly
through suffering, I will call to you
with that long-transmitted triviality.
2
Truly, truly, the reason I love you lies in
how I transformed my love into
that endless, unbroken waiting.
As night fell, snow began to pour down
in the valley. I believe my love too must
cease somewhere. I only think of
the posture of my waiting then.
I believe that in the meantime,
the snow will cease,
flowers will bloom, leaves will fall,
and then the snow will pour down again.

인공지능이 그려준 발랄한 여대생과 사색 모드의 여성을 먼 발치에서 보고 첫사랑을 키웠던 당시 고교생이던 시인은 '즐거운' 상상을 하며 '편지'를 썼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다음 순간 인공지능은 아무리 까다로운 지시를 받더라도 아무 말 없이 불과 1-2분 만에 이런 그림을 몇 장이고 그려주는 데 똑같은 작업지시를 받은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처음엔 '즐거운 편지' 詩를 읽고 참신한 지성에 탄복한 나이 든 평자의 반응이 대비가 되었다. 그러다가 이 시에서 상상이 되는 이미지를 보고 나서는 이런 작업지시를 받은 젊은 사원은 별 이의나 불평 없이 그림을 그려줄까 염려스러웠다.
요즘 IT기업이나 일반 직장을 불문하고 AI로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업무에서는 인력을 줄이고 신규 채용도 줄이고 있다는 뉴스 보도가 떠올랐다. 과거 선망의 대상이었던 전문직 변호사, 회계사들과 조직내 실권을 휘둘렀던 인사 담당이 일차 감원 대상이라는 말도 들린다.
MZ세대 젊은이들은 직장에서 업무지시를 받으면 '이걸요?', '제가요?', '왜요?'를 연발한다고 한다. 또 퇴근시간만 되면 상사 눈치 보지 않고 칼같이 퇴근하며 半연차 쓰는 건 예사이고 끄떡하면 사표 내고 실업수당 받으며 다른 직장을 알아본다고도 한다.
그러니 업무상 AI 사용이 보편화됨에 따라 젊은이의 채용을 기피하는 것을 '시니어들의 복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조직이 과연 오래 갈 수 있을까?
로펌의 예를 들어보자. 당장 판례조사나 서면 작성하는 것은 수퍼로이어 같은 인공지능이 잘하겠지만, 로펌 변호사의 업무가 그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클라이언트를 응대하고 상담하는 것 뿐만 아니라 다른 변호사와 협업을 하고 소송에 임하여 전략을 세우고 상대방이나 재판부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일은 경험 많은 사람 변호사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경력직을 수시 채용한다고 하는데 그 인력의 공급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결론은 자명해진다. 일단 추세를 따르더라도 조직내 젊은 그룹과 나이 든 간부들이 서로 협력하여 AI시대에 맞는 인재의 발굴과 양성에 힘써야 할 것이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겠지만 기업과 조직의 발전은 비전을 가진 유능한 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위의 '즐거운 편지'에서 시인은 예언자처럼 말했다.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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