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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1] 인천-다롄-뤼순: 현장에 가서 알게 된 사실

Onepark 2025. 12. 23. 18:30

지난 10월 초 전에 회원으로 활동했던 남북물류포럼 밴드에 들어갔다가 박하 선생이 올린 중국 랴오닝성 역사탐방 기행 안내를 보게 되었다.

인천에서 페리를 타고 다롄(大連)으로 가서 선양(瀋陽), 단둥(丹東) 등 만주 일대를 돌아보는 일정이어서 호기심이 동했다. 남북물류포럼 학술행사의 일환으로 단둥에 갔던 것 외에는 가보지 못한 곳들이었기 때문이다.

10월 중순 시칠리아-몰타 여행을 마치고 나서 하나투어 부산외대점의 최복룡 대표에게 참가신청을 하고 여권사본과 예약금을 지불했다.

나로서는 인천에서 국제여객선을 타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부평에서 택시를 탔으나 기사가 인천공항 터미널로 착각하는 바람에 조금 우회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 인천 국제여객선 터미널이 한때는 매우 붐볐다고 하나 이 날은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승객이 별로 없었다.

 

박하 박원호 선생은 부산 소재 건축사무소 공동대표로 재직하면서 국내는 물론 해외 각지를 다니면서 시인의 감성으로 엔지니어의 관점에서 여행기(Travelogue)를 쓰는 프로페셔널 여행작가이다.

일찍이 2016년 남북물류포럼의 실크로드 탐방의 일환으로 페르시아(이란) 여행을 같이 하면서 서로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박하 선생이 고선지의 생애, 고산 윤선도의 세연정 풍류에 관해 쓴 詩는 내가 직접 영역까지 해가면서 여기저기 소개를 하곤 했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열리는 남북물류포럼 조찬 세미나에서 보는 것 외에는 직접 만나서 교류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에 아쉬움이 컸다. 예를 들자면 박하 선생이 학원에 다니면서 배운 디지털 드로잉, 고전 한문 해석 등은 나도 하고 싶었기에 어깨 넘어로나마 배울 수 있었다. 더욱이 이번 여행을 앞두고 주요 여행 정보를 챗GPT를 통해 정리하여 여행 참가자 단톡방에 올리는 등 디지털 시대의 파이오니어 역할을 도맡아 했다.[1] 

 

* 여행 출발 전에 배포한 여행안내 책자
* 다롄으로 출항하는 다인페리의 비룡호 갑판 위에서 박하 선생과 함께
* 배가 인천항을 떠나자마자 인천대교 뒤로 저녁놀이 곱게 물들고 있었다.

 

5시 30분 우리가 탄 배가 출항한지 얼마 안되어 저녁 식사시간이 되었다. 

승객을 510명까지 태울 수 있는 비룡호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까지만 해도 중국 보따리상(다이궁)들로 만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쿠팡, 알리바바, 테무 등 온라인 상거래가 활기를 띠고 롯데 등 국내 면세점들이 다이궁에 대한 수수료를 대폭 낮춤에 따라 다이궁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그러자 다인 페리에서도 여객 수송보다는 콘테이너 화물 운송에 역점을 두는 모양이었다. 

21명이나 되는 우리 일행은 이번 항해의 주요 손님인 셈이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최복룡 대표의 사회로 이번 여행에 참여하게 된 동기와 기대하는 바를 돌아가면서 이야기했다. 말이 술술 나오게끔 이번 여행을 최 대표와 함께 기획한 박하 선생이 맥주와 음료를 돌렸다.

 

* 이번 역사탐방 프로그램을 기획한 박하 선생이 여행이 개요를 설명하고 있다.
* 1996년 취항 초기에 다롄항을 막 떠나는 비룡호
* 다롄항에서 비룡호 하선 직후 기념사진 촬영

 

중국은 국토가 광대함에도 GMT+8h 단일 표준시간을 쓴다. 그러므로 중국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나라와는 1시간 차이가 날 뿐이다.

우리는 중국 표준시간으로 7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얼마 안 있어 다롄 항에 접안하였다.

그리고 오전 9시 중국 해관(海關, 우리나라의 세관)이 문을 열 때를 기다려 하선하였다.

이미 인터넷으로 사전입국신고를 하였기에 휴대폰에 캡쳐한 신고서의 QR코드를 제출하면 되었다.

내 경우 전에 중국에 들어가면서 얼굴 사진도 찍고 열 손가락 지문을 등록했던 터라 전에 중국 어느 곳을 방문하였는지 묻고 여권 사진만 대조 확인하고서는 바로 통과시켜 주었다.[2] 

밖에 나가니 현지 가이드 이 영 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큰 여행 짐은 버스에 싣고 대형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다롄 항에서 출발한 버스는 시내를 통과한 후 바다를 가로지르는 성해(星海) 대교를 건너 첫 역사탐방 기행을 시작할 뤼순(旅順)으로 향했다. 

 

* 다롄 도심에서 곧바로 뤼순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해상에 교량을 건설했으나 시민들은 재물이 들어오는 물길을 막는다고 반대했다고 한다.

 

뤼순에서 탐방할 곳은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일본 당국의 재판을 받은 관동법원과 뤼순 감옥이었다. 마침 뤼순 감옥은 공사 중이라 하여 우리는 밖에서만 보고 일행 중 '길 위의 인문학자'로 알려진 권영주 선생의 해설을 들었다.  다음은 뤼순과 관련된 안중근 의사의 행적이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남만철도 건설 현장을 점검하고 10월 26일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과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哈尔滨, Harbin)에 도착했다. 우덕순과 조도선은 중간역인 채가구역에서, 안중근은 도착역인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암살 계획은 실패했다.

뤼순에서 출발한 이토가 탄 특별기차는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는 러시아 재무장관과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기차에서 내렸다. 환영인파 속에 있던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를 가까운 거리에서 저격하였다. 그 직후 안중근은 가슴 안에 있던 태극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 “코레아 우라!”(대한 독립 만세) 하고 3번 외쳤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군에 체포되었고 러시아 측의 1차 조사 이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졌다.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최재형이 거사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한 것은 일본이 아닌 러시아 제국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러시아인 변호사도 섭외해 놓았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관할을 주장하여 안중근은 뤼순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그 이듬해 관동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은 후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다.

안중근은 재판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토는 첫째,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둘째,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며 셋째, 주권국에 정미 7조약을 강요했고 넷째, 고종황제를 폐위하였으며, . . . 열다섯 번째, 일본과 전 세계를 속인 죄값이라 했다.

안중근은 1심 판결에 항소하는 대신 재판장에게 논문 집필의 시간을 달라 하여 일차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동양평화론의 서론을 썼을 즈음 갑자기 사형이 집행됨으로써 미완으로 남았다.

 

*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뤼순감옥
* 우리 일행은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권영주 박사의 현장 해설을 들었다.
* 우리 일행은 유적지로 보존되어 있는 관동법원으로 가서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은 법정을 돌아보았다.

 

* 안중근 의사는 조선군 의병장으로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을 물어 저격한 것임을 주장했으나 일본 당국은 살인범으로 취급했다.
*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남긴 유묵(遺墨). 일부는 국보로 지정되었다.
* 민족의 얼을 강조한 역사가 신채호 선생도 관동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뤼순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안중근 의사의 유족이 유해의 반환을 요청했으나 일본 당국은 이를 거부하고 뤼순 감옥 공동묘지에 묻은 후 후환을 두려워해 그 소재를 비밀에 붙였다.

우리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관동법원에서 나왔다.

바로 점심 시간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현지식 식사를 할 식당으로 향했다.

 

* 식당 앞에 주차되어 있는 BYD 전기차. 번호판의 바탕색이 녹색이다.
* 중국 요리는 테이블의 회전판 위에 주문한 음식이 한꺼번에 올려져 있으므로 우리는 그 비주얼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 일행은 뤼순 박물관으로 갔다.

일행 중에 건축학을 전공 이강주 교수가 박물관 건물 외관(facade)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유행했던 절충주의(Eclecticism) 양식의 특색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 건물을 설계한 일본의 건축가가 본토에선 흔치 않은 건축양식을 일본이 점령한 이 곳에 적용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박물관 앞에는 수형(樹形)이 뒤틀린 듯 뾰족하게 위로 솟구치는 일본종 가이즈카 향나무가 심어져 있었다.[3] 

 

* 일제 지배하의 1915년에 건설된, 로마 양식과 벚꽃 모양의 장식이 혼합된 절충주의 건축양식의 뤼순 박물관
* 가이즈카 향나무 앞의 팻말에 적혀 있는 글은 각주 3] 참조.
* 박물관 입구에 악귀로부터 시설을 지키는 돌사자상 (앞발로 공을 굴리는 숫사자).

 

* 각종 제의(祭儀)에 사용되었던 세 발 달린 솥(鼎)

 

 

* 청옥으로 부처님 손(靑玉佛手)을 닮은 과일 모양을 조각한 청나라 玉공예품
* 황옥을 부처님 손을 닮은 불수감(佛手柑) 모양으로 조각하여 꽃을 꽂는 데 사용한 청나라 玉공예품
* 청나라 시대 여성의 장신구
* 세상사를 달관한 듯한 표정의 나한상 (羅漢坐像)
* 19세기 후반 유행했던 절충주의(Eclecticism) 건축양식의 뤼순 박물관 앞에서 단체 사진

 

뤼순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다롄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 일행은 뤼순 군항 앞에 소재한 구 역사(舊驛舍) 앞에서 버스를 내려 주변을 돌아 보았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한반도를 일본제국에 병탄하는 작업을 마치고 만주땅 개발을 위한 철도 부설 현장을 순시하기 위해 이곳에서 특별열차에 올랐다. 그러나 종착지는 하얼빈역 플랫폼 안중근 의사의 총구 앞이었던 것이다. 그의 유해는 이곳에서 배에 실려 일본으로 향했다.

이강주 교수가 뤼순역 구 역사 건물은 러시아에서 아주 흔한 목재를 많이 쓰고 지붕 위의 첨탑이나 처마가 전형적인 러시아 양식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몇몇 일행은 저 뒤에 보이는 203고지가 러일 전쟁 때 노기 마레스키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군이 러시아 군 요새를 빼앗기 위해 수많은 장병을 사지로 몰아넣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몇 차례의 공방전 끝에 일본군은 고지 위의 철조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러시아군 요새를 가까스로 점령하고 뤼순 항의 러시아 함대를 괴멸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노기 장군도 두 아들을 뤼순에서 잃었고, 그는 메이지 왕 장례식 종소리를 들으며 할복자살하는 것으로 전몰 희생자들에게 속죄하였다고 전한다.

 

*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사적지로 보존하고 있는 뤼순 구 역사(舊驛舍)

 

우리 일행이 탄 버스는 다롄의 필수 관광코스인 성해광장(星海廣場) 앞에서 우리를 내려주었다. 평소 이맘 때에는 성해대교 위로 지는 석양을 구경하기 좋은 곳이지만 이날은 날이 포근한 만큼 하늘에는 안개 구름이 끼어 저녁놀은 볼 수 없었다. 대신 광장 한쪽에 자리잡은 테마 공원에서 야간 조명을 밝힌 각종 놀이기구가 신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다롄시 건설 100주년 기념 조형물인 100인의 발자국(자칫 그 위에 발을 디뎠다간 어디선가 부는 호르라기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큰 책을 펼쳐놓은 듯한 거대 조각 위를 거닐며 역시 중국은 '차이나는 스케일'(Chinese scale)을 자랑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성해공원 한쪽에는 여경이 말을 타고 있는 동상이 서 있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공원(총면적 186만) 안쪽으로는 큰 길을 건너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 영 가이드는 이곳에는 본래 신호등이 없으며 보행자가 횡단보도에 발을 딛는 순간 일방통행 차량들은 무조건 정차해야 하는 룰이 있다면서 우리를 이끌고 시범을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는데 헤드라잇을 밝힌 차량들이 모두 우리 앞에서 멈추는 것이었다.

 

* 신호등이 없어도 보행자가 횡단보도에 들어서면 차량들이 멈춰섰다.

 

저녁 6시가 가까워오자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우리는 19세기에 러시아 인들이 많이 살았던 러시아 거리로 갔다. 러일 전쟁 때까지 러시아 조계(租界)였던 이곳에는 러시아풍 건물들이 남아 있었다.

입구의 미술관이나 길거리 조명을 밝힌 쇼핑 스트리트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겼으나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번 여행의 첫 밤을 보낼 다롄 시내의 5성급 IHG(인터콘티넨털) 호텔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중국 여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객실이 널찍하고 시설이 좋아 항공기 좌석 업그레이드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 러시아 거리에는 러시아 기념품과 음식들을 파는 가게들이 영업 중이었으나 사람이 별로 없었다.

 

* 저녁식사 때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하는 중국음식점의 상차림
* 우리 일행이 투숙한 IHG 호텔은 일반 객실도 어주 널찍한 Suite 급이었다.
* 하룻밤 묵고 떠나기엔 아쉬운 IHG 호텔 창밖으로 보이는 다롄시 야경

 

Note

1] 박하 선생의 따님(박현아)은 KAIST를 나온 AI 전문가로서 AI 오디오 콘텐츠 플랫폼을 운영(스타트업 이어가다)하고 있고, 사위는 한국 전통문화대학교의 디지털 헤리티지 학과의 이종욱 교수로 이번에 이집트 기록유산을 디지털로 복원하는 사업에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고 했다.

이집트 정부는 이번에 대박물관을 개관하였거니와 파피루스 등에 기록된 유산을 디지털로 복원하는 사업에 있어서 프랑스나 영국 등에 맡기지 않고 문화재 약탈보다 복원에 열심인 한국에 위탁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국가문화유산청이 중심이 되어 ODA 사업으로 이집트에 필요한 기자재를 제공하고 기록유산 디지털 복원 작업을 4년간에 걸쳐 수행하게 된다. 

 

2] 중국을 여행하는 사람은 항시 보안검색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항공기 탑승 때처럼 엄격하진 않지만 살상무기로 쓸 수 있는 것은 소지하여서는 안된다.

내 경우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여행 필수품으로 늘 들고 다녔는데 인천항에서 보안 검색에 걸렸다. 맥가이버 칼이 병 따게, 코르크 마개 따게, 드라이버 등으로 쓰이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날카로운 칼로 쓰일 수 있는 까닭에 금지품목이라고 했다. 보안 요원이 압류하려는 것을 선물 받은 것이라서 나중에 찾을 수 있게끔 보관이라도 해달라 통사정했더니 별송(別送)으로 처리하여 하선할 때 찾을 수 있도록 해줬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캐리어를 들고 기차도 타고 해야 하므로 언젠가는 뺏길 것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하선할 때 찾지 않고 귀국할 때도 같은 배를 타므로 승무원에게 맡겨 두었다가 귀국한 다음에 인천항에서 찾겠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지만 이런 물건은 소지하지 않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3] 뤼순 박물관 앞 가이즈카 향나무 사진을 찍고 나서 보니 그 앞 팻말에는 중국의 혁명 사상가 천두슈(陈独秀)의 어록이 젹혀 있었다(놀라운 구글 렌즈의 위력!). 이번 랴오닝성 역사탐방의 주제로 삼아도 좋을 경구(警句)라 생각되었다.

 

"사람답게 사는 것과 일하는 것은 모두 한평생 배워야 할 학문이다. 구구절절 큰 도리를 말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하는 일은 실천이 중요하며, 항상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여 습관으로 만드는 게 좋다. 이성적인 친구와 대화하는 것도 아주 좋다. 1909년에도 이러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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