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맞아 한 해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
정년퇴직까지 한 마당에 연말에 누가 고과(考課)를 하는 것도 아닌데 한 해 동안의 실적을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네 번째 가족신문을 만들기 위한 것도 있지만, 내 자신이 얼마나 계획성 있게 살았는지 점검하는 의미도 있다.
우선 정년퇴직 후의 하루 일과를 짜임새 있게 만든 몇 가지 작업의 기록을 세어 보았다.
- 거의 포화상태에 이른 법률백과사전 KoreanLII에 새로 올린 항목은 30여개에 그쳤으나, 영역을 마치지 못한 미완성 항목(Unfinished Articles)은 90개 이상 줄였다.
- 그 대신 블로그 기사는 Travel & People 80개, Law in Show & Movie 30여 개(2022.2.16. 기존 Daum 블로그 기사를 Tistory로 이전함) 등 100편 이상 새로 썼다.
- 특기할 만한 것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시와 노래를 영어로, 외국 시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 50편이 넘는다. 하이쿠도 한글과 영어로 지은 것이 영문 기준으로 모두 48수였다.
- 블로그에는 매월 13일을 Book's Day로 정해 그 동안 읽었던 책의 중요 구절과 내용을 소개하는 등 총 12편의 독서기록을 남겼다.
지난 1년간 나의 삶에서 그런 대로 알차게 건진 게 있다면 1주일에 2~3편 이상 창조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인터넷 상에 그 족적(foot print)을 남겼다는 점이다. 뭔가 갈무리를 하고 떠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강박증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 까닭이다.
연말 마감에 쫓기는 듯한 심정에서 레이더 망에 포착된 것은 다음과 같은 시였다.
역시 김상문 친구가 이심전심으로 며칠 전 [한사람 마음과 시]에 올려놓은 반성문(反省文) 같은 詩였다.
송년에 즈음하면 - 유안진
At the Advent of Year-end by Yoo An-jin
송년에 즈음하면
도리없이 인생이 느껴질 뿐입니다
지나온 일년이 한생애나 같아지고
울고 웃던 모두가
인생! 한마디로 느낌표일 뿐입니다
At the advent of Year-end,
I cannot help but feel the life of mine.
I feel like the past year same as my whole life.
When crying and laughing all the while,
I think, life is nothing but an exclamation mark, in short!
송년에 즈음하면
자꾸 작아질 뿐입니다
눈 감기고 귀 닫히고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어
모퉁이길 막돌맹이보다
초라한 본래의 내가 되고 맙니다
At the advent of Year-end,
I have only to become smaller and smaller.
With my eyes shut, ears closed, I've been so dwarfed
to become the original myself
as poor as a rough stone around the corner.
송년에 즈음하면
신이 느껴집니다
가장 초라해서 가장 고독한 가슴에는
마지막 낙조같이 출렁이는 감동으로
거룩하신 신의 이름이 절로 담겨집니다
At the advent of Year-end,
I've sensed the existence of God.
Lonely in my heart as poor as
the last sunset with moving sensibility,
I see the holy name of God be filled in it.
송년에 즈음하면
갑자기 철이 들어 버립니다
일년치의 나이를 한꺼번에 다 먹어져
말소리는 나직나직 발걸음은 조심조심
저절로 철이 들어 늙을 수밖에 없습니다.
At the advent of Year-end,
suddenly I think I've been mentally matured.
I feel like to be old at once for one year.
So my voice becomes gentle, footsteps cautious,
I cannot help getting old with self-matured thoughtfulness.
2023년 새해를 맞아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1년 전에도 코로나 팬데믹이 하루 속히 종식되고 일상생활이 정상화되기를 기원했지만, 그보다 더 예상치 못한 사건의 연속으로 우리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그로 인한 에너지와 곡물 값 상승과 전세계적인 물류대란, 인플레, 고환율과 고금리 추세는 주가 폭락으로 이어졌다.
연말에 <재벌집 막내아들>이란 TV 드라마에서 보여준 시간 여행(Time Travel)이란 소재는 미래예측이 단지 SF 팬터지물이 아닌 우리의 투자경제 활동에 얼마나 극적인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 실감하게 해주었다.
누가 30년 전에 분당 땅값이 그렇게 오를 줄 알았겠는가! 실로 우리의 현대사는 IMF 사태, 카드 대란, 9.11 테러사건 등 도저히 예측불가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많은 경우에 땀흘려가며 근면하게 일하는 것보다 머리를 써서 재테크를 하는 것이 재산형성의 지름길이었다. 그렇기에 지난 수년간 영끌족(영혼을 끌어서라도 돈을 빌려 부동산과 가상자산에 투사한 젊은이들)은 시행착오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여행자가 돈을 버는 이재(理財)에만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다.
12월 동짓날에는 액귀(厄鬼)를 물리치기 위해 붉은 팥죽을 먹는 것처럼, 한해를 결산하는 연말(year-end)이 되면 우리를 괴롭게 하고 가슴아프게 한 일들을 떠올리며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준비하고 다짐을 하게 된다.
4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 광주(光州) 부근 가상의 사평역에서 밤기차를 타고 떠나야 하는 한 젊은이를 바라본다.
고즈넉한 시골 역에서 밖에는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데 대합실에서 난로불을 쬐면서[2] 즐거웠던 나날을 생각하며 밤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제야(除夜)의 시간에는, 자정을 넘기면서 과거의 잘못된 일과 화해하고 용서하듯이, 누구나 새 날을 맞아 밤열차를 타고 목적지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3]
At Sapyeong Station by Gwak Jae-gu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The last train would hardly come.
Outside the waiting room, big snowflakes fell down all night long.
Sawdust stoves were kept ablazed
under the window shining with seemingly white and violet wild flowers.
Someone was sleepy like an old dark moon,
others were coughing here and there.
Keeping in mind the old good days, I
added a handful of sawdusts to the fire ablazed.
Tho' many words were kept deep inside,
they were silent with no words spoken at all
while dipping their blue-colored palms into the heat of a stove.
Sometimes to live is like being drunken, or
to return to home fiddling a giftset of
a package of dried fish or a box of apples
is the sense required to keep silent.
All of them were aware of it.
Amidst a sound of lingering cough and
smoke of cigarettes like bitter medicine,
the snowflakes covered everything with rustling.
Yes, all of them here listened to the harmony of snowflakes.
After midnight,
all the unfamiliarity and brokenheart would turn into snowy fields.
With some windows seemingly like maple leaves,
the night train would flow to somewhere.
While role-calling the old good days, I
throwed a handful of tears into the fire ablazed.
Note
1] 유안진(柳岸津, 1941~ )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 사범대 가정과와 동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문단에는 1965년 현대문학에서 시 「달과 별」 「위로」 등으로 박목월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2006년 정년을 1년 앞두고 서울대에서 명예퇴직하고 문단활동을 재개했다. 학자로서 활동하는 동안 1986년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수필집에 발표한 동명의 산문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2] 1980년 20대의 곽재구가 신춘문예에 응모하기 위해 가상의 시골역(사평역)을 구상할 때에는 서울 지하철 6호선의 녹사평역은 어느 도시계획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시골역에서의 난방은 불을 붙이기도 어렵고 수시로 땔감을 공급해줘야 하는 톱밥난로가 대부분이었다. 난방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불길이 살아 있는지 살펴야 했다. 그만큼 인간적이기에 이정하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톱밥난로 - 이정하
Sawdust Stove by Lee Jeong-ha
온기로 환히 달아오르는
그대 얼굴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When I look at your face.
which is becoming brightly red by heat,
merely by doing so
how happy I am!
때로는,
그대 가슴을 데워주기 위해
내가 톱밥난로로
뜨거워질 때도 있어야 하리.
Every now and then,
in order to make your heart warm up,
I'm willing to become your sawdust stove, and
make myself so hot.
3] 곽재구(郭在九, 1954~ ) 전남 광주 출생.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문학을 전공했다.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활동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토착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하였다.
1980년대 이후 대표적인 서정시로 자리매김한 이 시는 가상의 사평역을 통해 1980년 광주민주화 항쟁의 아픔과 설움을 속으로 삭이는 사람들을 엿볼 수 있다. '광주의 슬픔'을 알레고리 삼아 시인은 송이눈이 내리는 밤에 역 대합실의 침묵 속에서 그들과 슬픔을 나누며 한 줌의 눈물을 톱밥난로의 불빛 속에 던져넣고 있다. 과거 좋았던 때를 그리워하면서 파랗게 질린 사람들의 손이 난로불을 쬘 때 밖에 쌓이는 하얀 눈은 자정(子正)이라는 심판의 시간을 넘기면서 화해와 용서를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밤열차가 붉은 단풍잎 같은 차창을 달고 어디론가 떠나는 것처럼.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사평역에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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