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수분이란 '흥부의 박'처럼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를 말한다. 우리의 민속 설화에 의하면 소중한 물건을 담아두는 단지라고 하는데 그안의 것들이 끝없이 새끼를 쳐서 내용물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설화 속의 단지를 가리킨다.
영어로는 'Widow's cruse'라고 한다. 성경(열왕기上 17장)을 보면 유대 땅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어느 과부가 밀가루 한줌과 기름 조금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선지자 엘리야가 먹을 것을 달라 하자 기꺼이 음식을 만들어 바친다.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대적했다가 도망자 신세가 되어 사르밧(Zarephath) 땅으로 피신한 터였다. 선지자는 이 욕심 없고 헌신적인 과부와 그 아들에게 축복을 내려 가뭄이 끝날 때까지 과부의 밀가루 항아리와 기름병에서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과연 이런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을까? 가능한 일이라면 그 발생 조건은 무엇일까?
며칠 전 Netflix에서 제인 오스틴(Jane Austen, 1775~1825)의 소설 <설득(Persuasion)>을 영화로 만든 동명의 2022년작 영화를 보았다. 그녀의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처럼 숱하게 많은 영화와 TV드라마, 연극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제인 오스틴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영국인 뿐만 아니라 세계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녀의 소설은 무수한 작품으로 각색이 되고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1] 이것이야말로 화수분이 아니고 무엇이랴!
놀라운 것은 이 소설이 변용(變容)을 거듭할 수록 그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여 남녀간의 성평등, 피부색에 의한 인종차별 같은 사회적 이슈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변치 않는 것은 젊은 남녀의 밀고 당기는 복잡미묘한 심리를 다뤄서 보는이들로 하여금 가슴을 졸이게 만드는 것이라 하겠다.
줄거리는 단순한 편이다. 미모와 교양, 이태리어까지 구사하는 언어실력을 갖춘 방년 20세의 앤 엘리엇은 젊은 선원 웬트워스의 청혼을 받고 결혼을 약속한다. 그러나 허영심 많은 아버지와 가족 친지들의 설득을 못이기고 학식과 재산의 차이가 많이 나는 그와 파혼을 한다. 이에 실망한 웬트워스는 해군에 들어가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하여 승진을 거듭하고 거액의 전리품도 챙기게 된다.
수년이 흐른 후 빚더미에 올라 앉은 앤의 아버지 엘리엇 남작이 바스(Bath)로 이사를하고 그의 저택을 어느 부유한 군인에게 세를 주기로 했을 때 세입자의 처남이 그곳에 놀러온다. 놀랍게도 그가 바로 재력 있는 함장이 된 웬트워스가 아닌가!
여전히 콧대 높은 처녀인 앤은 7년 전 바람 맞힌 웬트워스에게 호감을 표할 수도 없고 다른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그에게 관심없는 척 가슴앓이를 한다. 웬트워스 역시 자기에게 틈을 내주지 않는 앤에게 다시금 실망을 하고 멀리 배를 타고 떠나기로 결심한다. 앤트워스가 떠난 후 그가 남긴 메모를 보고서야 그의 본심을 알게 된 앤이 그의 뒤를 쫓아간다.
비슷한 사례는 회화와 미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파리에서 멀지 않은 노르망디 지방에는 지베르니(Giverny)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가 집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이곳에 정착하여 43년을 살면서 정원을 가꾸고 그림을 그렸다. 연못에 물이 흐르도록 센 강 물길을 돌리기 위해 이를 불허하는 시 당국과 4년간 법정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연못에는 수련을 키우고 일본식 구름다리를 놓았다. 그리고 꽃들이 만발한 정원과 수련이 피어 있는 연못을 소재로 수백 점의 그림을 그렸다.
프랑스 정부는 인상파 화가인 모네의 수련 연작을 기증받은 후 튈르리 궁의 오렌지 온실을 개조하여 대형 수련 그림만 따로 전시하는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을 만들었다. 그러니 지베르니의 연못은 화가 모네와 프랑스 정부에 창작과 관람객 유치를 위한 일종의 화수분이었던 셈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영국의 아동문학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 1866~1943)는 토끼가 주인공인 <피터 래빗의 이야기> 시리즈로 막대한 인세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여성작가가 자기 이름으로 책을 출판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림 동화책을 처음 출간해 준 젊은 출판업자와의 사랑도 짧게 끝나자[2] 포터는 그녀가 어렸을 적에 자주 놀러 갔던 잉글런드 서북의 호수 지역(Lake District)의 윈더미어에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포터는 그곳 농장에 살면서 현지 토종 양떼를 키우는가 하면 자연상태의 보존을 위해 애썼다. 그리고 사후에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에 4천 에이커나 되는 부동산을 기부하였다.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영국 정부가 그 일대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함으로써 레이크 지역은 여전히 본래의 목가적인 풍경을 유지하고 있다 한다. 그러니 주민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파헤져지지 않은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화수분처럼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멀티미디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화수분이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One Source Multi Use' 내지 Spin-off가 가능한 핫 아이템을 발굴하는 것이 요체라 하겠다. 대부분 온라인 게임에서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거니와, 웹툰이나 웹소설, 드라마에서도 이른바 '대박'이 나오기도 한다. 2021년 세계적으로 히트한 <오징어 게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건희 회장의 사후 유가족이 정부에 조건없이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 역시 우리나라 문화와 예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화수분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화수분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Global] 전세계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주제를 살리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일 것
- [Versatile] 장르나 형태를 불문하고 무엇으로든지 표현할 수 있을 것
- [Digital] 디지털화되어 있거나 적어도 인터넷을 통해 유통할 수 있을 것.
그렇다면 나는 생전에 '아무리 퍼다 써도 마르지 않는 샘' 같은 화수분을 장만할 수 있을까?
내 욕심 같아서는 위의 세 가지 요건에 따라 Global한 언어인 영어로 작성돼 있고 Versatile하게 법과 시, 문학으로 포장된 온라인 KoreanLII (Korean law via the Internet) 사이트도 후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3] 역사상으로는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같은 훌륭한 선례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것은 독자와 방문자들이 KoreanLII 콘텐츠를 얼마나 유익하고 재미있게 봐주느냐에 따라 달려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집단지성과 지혜를 모아 장기적으로 개선하고 추진해야 할 과제라고 하겠다.
Note
1] 제인 오스틴의 <설득>이 영화화된 것은 2022년 Netflix 영화 이전에도 1995년과 2007년에는 BBC에서 TV영화로 만들어 큰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그밖에 TV 미니시리즈나 연극 무대에 올려진 것은 실로 부지기수이다. 그것은 <설득>이 제인 오스틴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당시의 사회상과 신분과 재산을 둘러싼 인간관계, 특히 여성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수작(秀作)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2] 베아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 시리즈는 30개 언어로 1억 5천만 부 이상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였지만 처음엔 작가가 여성이고 말도 안되는 토끼 이야기라는 점에서 출판업자들로부터 모조리 거절 당했다. 그러나 1902년 노먼 워른이라는 젊은 출판업자가 그림 동화책의 성공을 예견하고 작가의 오리지널 일러스트레이션을 컬러로 인쇄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포터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분 차이가 있는 그와의 약혼을 강행하고 윈더미어에 힐탑 별장도 구입했으나 그는 약혼한지 한 달 만에 별장에 가보지도 못한 채 37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연은 르네 젤위거와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미스 포터>(2007) 영화로 만들어졌다. 포터는 그 후 그녀의 사업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시골 변호사 윌리엄 힐리스와 1913년에 결혼하고 니어 소레이(Near Sawrey)에 살면서 처음의 별장은 농장일 하면서 저술을 하는 작업장으로 썼다고 한다.
3] KoreanLII의 콘텐트는 기본적으로 이미 출판된 《금융법률사전》을 통째로 옮겨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최신 법령과 법제를 꾸준히 업데이트했다. 그리고 필자의 전공분야인 상법, 개인정보 보호 법제와 동산금융 법과 실무, 북한과 통일에 관한 법제를 추가하여 내용상으로 풍부하고 로스쿨 강의교재 용으로 만들었기에 공ㆍ사법의 분야 별로 골고루 설명하고 있다고 믿는다.
여기에 인문학적인 소재로 우리 시가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 300편에 이르고, 고전시와 외국 시를 우리말로 옮긴 것도 200편 가까이 된다(영문학자 등 전문 번역가의 번역 포함).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과 힘을 합쳐서 이 모든 것을 날줄과 씨줄로 엮는다면 어떤 기상천외의 작품이 나올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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