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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붉은 작약을 다르게 보기

Onepark 2022. 5. 31. 07:30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고 야외활동이 부활하여 새롭게 맞은 5월도 마지막날*이 되었다.

지방 곳곳에서는 출입자를 일부 제한하는 곳도 있지만 봄축제가 속속 열리고 있다고 한다.

마침 TV뉴스에서는 덕유산의 철쭉이 만개하기 시작하여 등산객들을 기쁘게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며칠 전 진안에서 감 농사를 짓는 유양수 친구가 자기집 정원 한쪽에 붉은 작약이 탐스럽게 피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모란이나 작약은 잎 모양은 사뭇 다르지만 꽃의 생김새가 서로 비슷한데 불과 며칠 동안만 화려하게 꽃이 피었다가 풍성하던 꽃잎이 져버리기에 보는이를 슬프게 한다. 절로 김영랑의 "[내년에 다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싯구절이 입에서 터져 나온다. 하지만 요즘은 모란꽃이 진 다음 얼마 안 있어 형형색색의 장미꽃이 만발하기에  모란꽃이 진다고 아쉬워할 분위기는 아니다.

 

* 작약의 잎은 모란의 잎보다 길고 윤택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출처: 유양수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모란꽃이 진 다음엔 야생화 외에는 양반댁의 뜨락을 장식할 꽃이 귀했던 것 같다.

이슬을 머금은 붉은 작약 꽃을 본 감상문 친구가 "봄 지난 뒤의 모란(春後牧丹)"이라는 한시(漢詩)와 해설을 올렸다.

세조의 왕위찬탈(1453년 쿠데타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사육신과 공신으로 운명이 바뀐 성삼문과 신숙주가 우연찮게도 똑같은 모란꽃을 보고 읊은 시이기에 호기심이 急상승했다.

 

부지런한 친구를 둔 덕분에 붉은 작약 꽃잎에 아침이슬이 맺힌 것을 볼 수 있었다.

부드럽고 탐스럽기 그지 없는 꽃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마치 영롱한 보석을 보는 것 같았다.

 

먼저 신숙주의 칠언절구를 우리말로 옮긴 것을 필자의 영어 번역문과 함께 올리고, 이어서 성삼문의 오언절구와 번역문을 신숙주의 것과 서로 비교해보기로 한다. 그 이유는 신숙주가 모란꽃을 보는 관점이 보통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春後牧丹  봄 지난 뒤의 모란 (Peony in Late Spring)

申叔舟 (신숙주, Shin Sook-ju)

春風桃李逐飛塵

濃艶依依帶露新

不與衆芳爭早晚

終然富貴保餘春

복사꽃 오얏꽃 봄바람에 흩날린 다음
늘어진 화사한 가지 이슬 머금어 새롭네
뭇 꽃들과 이르고 늦음 다투지 않더니
끝내 남은 봄의 부귀 독차지하는구나

Those flowers were scattered by spring wind.
These flowers are newly decorated with dew drops.
Here is No-contender against other spring flowers.
It will solely dominate the wealth remaining in late spring

 

다음으로 같은 모란꽃을 보고 시를 지은 성삼문의 관점을 취해 보기로 한다.

옛사람들이 부귀를 나타낸다며 좋아하던 꽃이 지금은 풍류를 즐기는 본보기가 되었다며 안타까워하는 시인의 심정이 느껴진다. 똑 같은 꽃임에도 사람들이 달리 보는 것을 꽃에도 마음이 있다면 부끄러워 할 것이라고 말한다.

 

成三問 (성삼문, Seong Sam-mun)

古人稱富貴

擧世號風流

脫身桃李地

物議花應羞

옛사람은 부귀라고 일컬었고
지금은 온세상이 풍류라고 부르노라
몸은 '도리'의 경지를 벗어났으니
분분한 물의는 꽃이 부끄러워하리

Previously, it was called wealth.
Now they say it’s joy for arts.
Physically, it comes out of reputable beauty.
The flower must be shameful of such controversies.

 

사랑채 또는 정자에 앉아 뜨락 탐스럽게 핀 모란꽃을 보며 지나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선비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춘풍도리(春風桃李)야 봄바람에 복사꽃 오얏나무꽃이 피었다거나 졌다는 것을 표현하는 당시(唐詩) 이래 시문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4자성어이니 그렇다 치자.

모란꽃을 보는 관점이 성삼문은 풍류를 표상한다고 한 반면 신숙주는 이슬 맺힌 농염한 자태를 보고 부귀를 누리는  사람을 연상하고 있다. 그렇기에 한 사람은 꽃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쓸데 없는 정도가 아니라 꽃이 부끄러워하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은 늦봄에 홀로 피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니 부귀를 누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표현했다.

 

시인의 이름을 가리더라도 전자는 매우 감각적이면서도 현세의 복락을 추구하는 사람인 반면, 후자는 윤리준법정신이 강하고 도덕관념이 투철한 사람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전자는 실력을 갖춘 수양대군이 왕위를 잇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야 한다며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후자는 나이는 어리지만 문종 임금의 장자인 단종이 당연히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며 목숨을 걸고 단종 복위를 도모했던 것이다.

 

여기서 유명한 심리 테스트용 그림이 생각났다.

매력적인 눈 모습을 연상한 사람은 '젊은 여자'라고 인식하지만 매부리코, 주걱턱부터 알아챈 사람은 '나이많은 노파'라고  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본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시각정보를 조합하여 물체를 인식하는 것이므로 눈을 통해 뇌에 전달되는 정보가 사람마다 같을 수 없는 것이다.

뜨락에 핀 모란꽃을 보고 한 사람은 부귀네 풍류네 하며 다투는 장면을, 또 한 사람은 느지막이 홀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여유로운 모습을 연상했다.

이와 같이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 그의 인생과 운명을 좌우하는 것을 보니 5월에서 6월로 바뀌는 자연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Annex

1. 모란/작약꽃이 '꽃 중의 꽃'이요 '부귀'의 표상인지는 모르더라도 그림(화투 패) 속의 목단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요즘 늦봄의 '모란꽃' 하면

화투의 6월 그림으로 유명하지.

설총이나 신숙주, 성삼문 같은

고사(故事)에나 남아 있을 뿐,

젊은이들은 향기도 가시도 있는

장미꽃 선물 받기를 더 좋아해.

 

붓꽃이 진 후 6월의 꽃이요 부귀라 했는데

이젠 수입종, 향긋한 장미에 모두 넘겨줬네

Card players know
It’s the flower of June.
Peony blooms after orchid.

In old days, it showed wealth [and honor].
Now it’s strange to the young
who like fragrant roses.

 

* 어버이날에 받은 핑크빛 작약을 모티브로 한 꽃바구니. 그러나 꽃잎이 바래고 바로 떨어져버렸다.

2. 여기서 다룬 사육신 성삼문과 계유정난 공신 신숙주의 모란꽃 한시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까닭에 영어로 번역하고 나서 무슨 법적 의미가 있을까 여러 날 고심하였다.

그러다가 두 분의 닮은점, 다른점을 생각한 끝에 필자가 운영하는 온라인 영문 법률백과사전 KoreanLII에 'Perspective (관점/觀點)'라는 항목을 새로 만들고 두 분의 한시를 나란히 올려놓았다.

 

3. 나이가 들수록 줄어드는 것은 문화생활 같다.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핫플레이스일수록 혼자 들어가기가 쭈볏거려지기 때문이다.

* 5월에 본 영화: Finding You (2021, Netflix)

* 5월의 콘서트: Wiener Symphoniker conducted by Chang Han-na (5.30, Lotte Concert Hall)